Monthly Archives: March 2003

집을 계약하고..

3. 6. 목
새벽에 일어나지 않으려고 좀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여전히 5시쯤 한번, 6시쯤 한번 눈을 떴다. 다행히 다시 잠이 와 주어 8시쯤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었다.

일어나 메일 체크를 좀 하고 씻은 후 빨래를 하러 내려간다. 아직 동전 장치를 하지 않아 가지고 갔던 25센트 짜리들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음.. 매니저가 계속 게으름을 피워주었으면 좋겠군. ^^;
새 아파트로 옮긴 후에도 빨래는 공동 세탁실을 이용해야 한다. 왜 이 나라는 세탁기를 집집마다 장착하지 않을까? 한국에선 아무리 서민 아파트라도 세탁기 놓을 자리는 다 있는데 여긴 침실 두개짜리 아파트(꽤 큰 편)에도 공동 세탁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시트콤 <프렌즈>를 볼 때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뉴요커들이 빨래바구니를 들고 빨래하러 가는 모습이 신기했었는데.. 아직은 이해하기 힘든 문화의 차이다.
지난번 빨래할 때도 왔다갔다하는 바람에 얼마나 잘 헹구고 하는지 파악을 못했는데, 오늘 역시 밥 먹으러 올라온 틈에 빨래가 다 끝나버렸다. 한국 세탁기는 보통 한시간은 잡는데.. 여긴 30분도 안 걸리는 것 같다.
아직 몇 번 안 써봐서 모르겠지만.. 지난번 유럽 등지에서도 세탁기를 사용해 본 결과 한국 세탁 시스템이 상당히 괜찮은 것 같다.

아침은 어제 수퍼 스토어서 사온 햄과 치즈를 얹은 토스트와 동네 마트서 산 문제의 통조림 – 미트볼과 그레이비 소스. 역시 예상대로 허접한 맛. 열심히 먹어댔지만 결국 한 개는 남기고 만다. 난 워낙 미트볼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남편도 입맛에 안 맞는 모양이다.
아침을 먹고 빨래를 드라이어에 옮기고 온다. 조금 후 보고 온 아파트의 매니저가 전화를 걸어 집을 원하면 보증금을 내러 오라고 한다. 별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기분이 좋아진 채 커피를 마시고는 잠깐 잠이 든다.

요즘은 정말 평화롭고 사치스러운 일상이다. 강가의 아파트를 빌려 정착을 위한 준비 외에는 한가로운 휴식을 즐기고 있다. 산책 겸 시장을 봐 밥을 해먹고, 볕이 잘 드는 창가의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영어공부를 한다는 명목으로) 누워 있는다.
지난 한 달간 (짐을 싸기 전 주부터 이 곳에 도착해서 일주일 간) 너무도 빡빡한 나날을 보내서인지.. 지금 누워있다가도 문득문득 깜짝 놀란다. 지난 몇 달간 되뇌던.. “뭐 잊어버린 거 없나..? 앗, 그거 했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음.. 그 생각을 하니 앞으로 며칠 간은 계속 누워있어도 될 것 같다. ^^;
솔직히 정말 피곤했다. 서른 해 동안 우리가 지내온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힘들었다. 에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달콤한 잠시의 낮잠에서 깨어 시아버지의 생신축하 차 전화를 드린다. 오늘 제주도 여행 가시는데.. 날씨가 맑았으면 좋겠다. 일기를 쓰고 있던 남편은 다 말려졌을 옷가지를 가지러 내려간다.

라면으로 간단한 점심을 마치고 나갈 채비를 한다. 오늘은 딸기를 두고 갔다 오기로 한다. 어제 잠시 점만 찍고 온 수퍼 스토어에서 먹거리를 좀 사오기로 한 것이다. 딸기는 입이 삐쭉 나오지만.. 오래 안 걸리니까 그냥 나간다.

매일 드는 차비를 좀 줄여볼 생각으로 월 정액권을 사기로 했는데, 알고 보니 월 정액권은 월초에만 판매를 한다고 한다. 김 샜다. 할 수 없이 할인 묶음표(10%)를 사가지고 스카이트레인에 오른다. 오늘은 제일 앞칸에 타 남편은 신났다. 여긴 무인 주행으로 첫번째 칸 제일 앞에서 주행방향 정면을 볼 수가 있다. 계속 거기 앉아본다고 벼르던 남편은 드디어 그 자리에서 사진도 찍고 무서운 척(롤러 코스터라나?)도 한다.

아파트 매니저의 사무실에 도착하니 매니저가 귀여운 딸과 함께 있다. 곧 약정서를 꺼내 몇 군데에 체크를 하고 사인을 하라고 한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깨알 같은 글씨의 약정서 세 페이지를 꼼꼼히 읽는다. 계약에 관한 어려운 용어가 많아 힘들었다. 정말 자세한 내용이다. 거의 한시간이 넘도록 읽고 나자 남편도 나도 열이 올라 얼굴이 빨개진다. 그 동안 매니저는 딸과 얘기를 하며 우리를 기다려 준다. 다 읽은 후 몇 가지 의문사항을 물어보고 사인을 한 후 개인수표로 보증금을 지불한다. 보증금은 월세의 50%. 계약금의 역할을 하며 우리가 퇴거할 때 집 상태에 따라 깎거나, 문제가 없으면 이자를 붙여 돌려준다. (그래 봤자 이 나라의 이자는 턱없이 낮다.) 그 밖에 위험한 물질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서약서, 애완동물에 대한 책임 각서 등에 다 사인을 한 후 모든 일을 마무리한다. 28일쯤 전화를 걸어 열쇠를 받을 날을 결정하기로 했다.

큰 일을 마쳤다는 뿌듯함으로 가볍게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수퍼 스토어로 향한다. 식재료를 좀 산다. 파스타 소스와 스파게티 면 등 몇 가지를 사 버스 정류장에서 바게뜨를 뜯어 먹으며 버스를 기다린다. 바람이 제법 차다.

버스엔 새 골프채 세트를 마련한 아저씨가 행복한 표정으로 상자를 안고 있다. 한국에서 부정적인 모습의 골프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불쌍한 우리들은 골프채와 버스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여긴 골프가 꽤 싼 스포츠라고 한다. 언제쯤 되면 우리도 골프를 그냥 운동의 하나로만 보게 될까..

집에 오니 간만에 홀로 있었던 딸기가 달려들어 핥고 뛰고 난리도 아니다. 잠시 놀아주다가 곧 저녁 준비를 한다. 오늘 메뉴는 순두부찌개. 지난번 한국수퍼서 산 순두부다. 조금 맵다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괜찮은 저녁이다.
아침에 딸기 털 사이에서 개벼룩이 한 마리 더 나와 다른 약을 사와서 목덜미에 발라주고 지금 무릎에 놓은 채 (움직이면 약이 다른 데 묻을까 봐) 일기를 쓰며 약이 스며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차 마시면서.. 어제 산 박하차는 단 맛이 나는 게 꽤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