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날씨가 정말 이상하다.
10월이 지나면서 비가 내리는데 예의 전형적인 음울하고 추적추적 오는 비가 아니라 장대비가 쏟아졌다. 일부 지역은 물에 잠겼다.
11월 하순에 접어들자마자 눈이 일년에 두번 올까말까 하는 밴쿠버에 50년 만의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더니 다음날부터 영하 20도까지 떨어져 쌓인 눈이 꽁꽁 얼어붙었다. 눈에 갇혀 출근을 못하는 일도 일어났다.
눈이 녹자마자 폭풍으로 여기저기 단전이 되었다. 직장이 있는 곳은 산과 바다를 끼고 있어서인지 자연재해에 약하다. (아니, 밴쿠버 자체가 자연재해에 약하다. 워낙 눈이 안 오니 동부쪽으로 치면 평균에도 못 미칠 눈에도 전 시내 교통이 마비되는 사태가 일어난다.) 그래서 며칠 동안 일하는 동안에도 불이 깜박깜박거려 문을 닫느냐 마느냐 얘기들을 하곤 했다.
그 와중에도 우리 집은 내륙쪽이어선지 정전도 안 되고 꿋꿋이 버텨주었는데 드디어 어제밤, 밤새 창문이 덜컹거리면서 비가 쏟아지고 나무 흔들리는 소리, 거리에 깡통인지 뭔가 굴러다니는 소리로 잠을 설치는 가운데 단전이 되어 암흑천지가 되었다. 너무 시끄러워 (침대 바로 옆의 창문이 계속 덜컹거린다. 블라인드를 좀 열어보니 키큰 나무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로 저리로 흔들리고 있고..) 잠을 이룰 수가 없지만 별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니..
간신히 다시 얕은 잠에 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뜬다. 밤새 잠을 설친 후라 몸이 무겁다.
다행히 가스는 끊기지 않아서 가스 벽난로를 켜고 그 앞에 남편이랑 딸기랑 옹기종기 모여앉아 등산용 라디오에 귀를 귀울이고 있다. 지하주차장의 문도 전기로 조작되는 거라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갈 수고 없고 엘리베이터(집을 보러 다닐 때 고층을 배제한 것이 얼마나 잘한 짓이었는지! 사실 고층이 더 비싸서 제외되었지만)도 당연히 안 움직이고 참 난처하게 되었다.
회사에 전화해 봤더니 남편의 직장 나의 직장 둘다 정전 상태이다. 차도 못 움직이는데 버스나 스카이트레인을 타고 그 먼 곳까지 갔다가 오늘 회사 close한다고 하면 얼마나 허무할까 싶어 일단 직장들 문을 열기로 결정할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기로 얘기를 했다.
라디오를 들으니 밖은 난리도 아니다. 나무가 쓰러져 길이 폐쇄된 곳이 주요도로라 길은 꽉 막히고 정전으로 신호등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해 그에 따른 도로 정체도 심하고 일단 도로 사정이 날려온 나뭇가지나 각종 쓰레기들로 안 좋다고 한다.
회사에 나가기가 더 싫어진다. 게다가 버스를 타고갈 경우 중간에 갈아타는 시버스도 두대 중 한대만 운영해서 30분에 한대만 다닌단다.
수십년간 인간이 쌓아올린 업적 중 가장 빛나는 것일 법한 전기가 낡은 전봇대로 얼마나 허약하게 지탱되고 있는 것인지.. 특히 캐나다는 난방, 취사(전기 스토브)도 모두 전기에 의존하기 때문에 정말 생계에 문제가 바로 생긴다.
우리는 부루스타(정확한 명칭이 뭘까?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짜짜로니를 끓여먹고 거실에 앉아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시간이 남으면 버릇처럼 컴퓨터를 켜지만 모뎀이 작동을 안 하므로 인터넷은 되지 않는다. 뭔가 굉장히 허전한 느낌이다.
뭔가 중독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다행히 손이 떨린다거나 난폭해지지는 않는다.
밤새 난리더니 창밖은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밝은 햇살이 내려쬐기 시작한다.
이래저래 회사 땡땡이친 김에 산책이라도 나가야 하는 걸까? 오늘 하루 천재지변으로 공쳐서 일당을 날렸으니 아껴써야겠다.
날씨가 이상하면 무서워진다. 웬지 지구가 더 이상 인간을 못 참아주는 날이 가까워오는 느낌이.. 조금만 더 참아주길 속으로 바라면서 딸기를 끌고 나선다. 바람은 여전히 세게 분다.
결국 직장은 오늘 문을 닫았고 오후 다섯시 경이 되어서야 삐빅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왔다. 하루종일 벽난로 옆에서 꼬박꼬박 졸다가 이제서야 눈이 반짝이며 다시 문명의 단맛을 만끽하고 있다.
MADDOG Jr. (2006-12-17 05:18:58)
저런 무방비 자태를 올리다니…
암튼 그나마 밴쿠버가 매년 UN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3위에 들었던 이유는 날씨 덕이었건만.. 이젠 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