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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피노 여행기 – 4일차

제 4 일

나의 기록:

어제 저녁 내내 태풍 때문에 집에 갈 수 있을까 하루 더 묵어야 하나 날씨예보를 보면서 고민했는데 일단은 길을 떠나기로 한다. (바람은 그렇다 치고 눈이 또 올까 봐 너무 무서웠다.) 조심조심 가보자 하는 것도 있었지만 토피노에 더 있기가 지겨워서.. 일단은 떠나기로.

부지런히 짐을 챙기면서 아침으로 컵라면을 먹고 우유 남은 것도 홀랑 마시고 커피도 내려서 텀블러에 담아두고 만반의 준비를 해서 모텔을 나선다. 태풍은 한풀 꺾여서 밤 동안의 바람의 잔해(부러진 나뭇가지 등..)만 남기고 조용하다. 비는 여전히 내린다. 바닷가에 잠깐 들러 파도가 해변을 때리는 걸 마지막으로 구경한다. 이상하게도, 모든 면에서 규모가 큰 이 곳이지만 파도의 세참은 한국의 그것을 따라올 수 없는 것 같다.

주차장에서 자기 차를 먼저 빼겠다고 꽥꽥거리는 이상한 놈을 만나 남편이 기분이 나빠져 내가 운전을 하기로 한다.

험한 여정을 시작하는데 우리가 온 그 길 입구로 들어설 때 <반드시 체인을 지참하거나 눈에 대비할 수 있는 차만 들어갈 것> 뭐 이런 비슷한 안내문이 있었다. 왜 오기 전엔 이런 걸 못 봤지? 우리가 온 길이 워낙에 장난 아닌 길이었던 거다. 긴장에 긴장을 하면서 천천히 엑셀을 밟는다. 올 땐 눈이 멈추고 몰랐지만 오늘 보니 길이 꼬불꼬불하고 패인 곳도 많다. 눈 올 때 여길 어떻게 왔었던가 다시 아찔하다. 길엔 눈이 안 오지만 비가 쏟아지고 길 옆으로는 눈이 아직도 고스란히 쌓여있다. 나도 남편도 초긴장 상태로 포트 알버니 도착. 마을을 보는 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운전대를 남편에게 넘기고 한 숨 놓는다. 이제부터는 고속도로니까 열심히 가기만 하면 된다. 한참 달려 나나이모 찍고 던컨이란 마을에 도착.

* * *

남편의 기록:

토피노에서 포트 알버니를 거쳐 나나이모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4번 고속도로라고 불리우는 곳인데, 사실 포트 알버니까지는 워낙 꼬불탕 길에다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도로라서 고속도로라 부르기가 좀 민망한 곳이다. 하지만 포트 알버니를 나와 나나이모까지는 길이 곧게 뻗어져서 제한속도 시속 110킬로 라고 써놓은 표지판도 종종 보인다. 아.. 정말이지 운전이 슬슬 지겹다. 토피노로 들어갈 때에도 운전만 한 10시간 가까이 한 것 같았는데.. 나갈 때에도 그 정도 하게 되겠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운전으로 날리는 시간이 거의 한국에 비행기 타고 가는 시간과 맞먹겠다… 등등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열심히 달리다 보니까 어느새 던컨 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던컨이라는 도시는 이곳 원주민 인디언들의 전통이 잘 남아있고, 동네 여기 저기에 오래된 벽화들이 있는 도시라고… 관광안내책자에 나와있었지만.. 도저히 그 ‘멋있다는’ 벽화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몇 가지 벽화들이 그려져 있기는 했지만.. 설마 저걸 가지고 그 호들갑들을 떠는 걸까?? 할 정도로 ‘소박’하다. 만일 진정으로 저 벽화가 그 벽화가 맞는다면, 정말이지 캐나다 썰렁한 것은 전세계적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

원주민의 전통이 남아있다고 하더니 월마트며 세이브 온 푸드 등이 모여있는 대규모 몰이 무엇보다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옆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라고 크게 써 붙여 놓은 식당이 있다. ㅎㅎ 원주민의 전통이라니. 이름은 “Dog House”라고 하는데, 원주민 사람들로 득시글 득시글하다. 가격도 그리 만만하지 않던데.. 어쩌자고 태풍 오는 주말에 이런 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건지.. 나는 “해물 클럽하우스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아내는 토요일 스페셜 메뉴였던 “에그?? 머핀……”을 주문했다. 샌드위치는 그럭저럭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었지만 그 무슨 머핀이라던 스페셜 메뉴는 아내 조차도 느끼하다고 할 정도로 알프레도 소스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음.. 어쩌면 나름대로 맛있는 메뉴였을지도.. 하지만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사람들로 바글대는 식당에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며 밥을 먹다 보니까 벌써 3시 반이 훌쩍 지나갔다.

* * *

나의 기록:

아 정말.. 정확히 묘사하자면 잉글리쉬 머핀에 칵테일 새우와 달걀반숙을 얹고 그 위에 치즈소스를 듬뿍 뿌려낸 요리였다. 계란도 느끼하고 새우도 느끼하고.. 남편은 한입도 도와주지 않는다. 차로 입안을 가셔내면서 간신히 다 먹어 치웠다.

부지런히 차를 몰아 드디어 빅토리아 도착. 아직도 태풍의 여파가 남아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심하게 분다. 페리에서 집어 들고 간 광고지를 보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흥정을 해본다. 워낙 비싼 동네에 있다 와서 여기는 좀 저렴할 줄 알았는데 편리한 시내 쪽은 그다지 싼 편은 아니었다. 이곳 저곳 방 구경을 좀 하다 아주 좋은 위치에 있는 모텔에 가격 문의. 좀 오래되었지만 가격도 저렴하고 딸기 숙박료도 따로 받지 않는단다. (다른 개 받는 곳은 20달러 정도씩 얹어 받는다.) 처음엔 너무 오래되어 보여 내키지 않았으나 주인 할아버지가 딸기를 아주 예뻐하고 위치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아서 그냥 묵기로 한다. 방에 들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처음엔 낡아 보이기만 하던 게 거의 골동품 수준이다. 나름대로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재미난 방이다. 차를 만들어 마시면서 잠깐 숨을 돌리고 (레몬을 짜 넣어 홍차를 만들어 주었더니만 “신물 올라온 맛”이라면서 거부하는 남편이었다.) 동네 한 바퀴 구경하러 간다.


처음에는 그냥 낡은 여관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모든 집기가 골동품이었다
특히 현관문에 있던 핍홀(집 밖을 확인하는 구멍)은…


중세 고성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욕조의 수도꼭지들을 보라.. 마치 장발장이나 몽테크리스토가 갇혀있던
형무소에서나 있을 법한 그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금고인데… 그 안에는 제빵 틀이 있다.
왠지 오래된 오븐이 아닐지.. 아래에서 나무를 때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씨가 조금 진정되어 간다. 일단 차로 5분 거리 정도 되는 유명한 펍에 가서 직접 담근 맥주와 폭찹, 굴로 저녁을 먹었다. 나는 낮에 꾸역꾸역 먹은 계란이 아직 소화가 덜 되어 많이 먹을 수는 없었지만 음식 맛이 꽤 훌륭했다. 남편은 피곤하다며 (운전을 그리 했으니 피곤했겠지) 별 입맛이 없다고 했으나 맛있는 맥주와 안주 맛을 보더니 랄랄라 맛있게 먹고는 감자튀김도 한 접시 더 시킨다. 감자튀김도 맛있는 소스 두 가지 – 카레요구르트 소스, 스위트 칠리 소스 – 와 함께 나왔는데 너무 배가 불러 다 못 먹고 싸왔다.


스피내커즈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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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한 넛브라운 에일(왼쪽)과 상큼한 헤페바이젠


그리고 신선한 굴회(굴 한 개에 2불)


돼지고기 스테이크라 할 수 있는 폭찹까지..

다시 모텔로 돌아와 차를 주차시켜 놓고 밤 산책. 적요하던 토피노의 밤과는 달리 여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관광객들과 유명한 의사당의 야경이 여행 온 기분을 실감나게 해 준다. 오늘 바람으로 페리가 운항을 못했다고 하던데, 숙소에 머물던 사람들이 날이 개자 밤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나온 것 같다.


빅토리아 엠프레스(황후) 호텔…

조금 걷다가 모텔로 돌아가 골동품 수도 손잡이를 삑삑 돌려 목욕을 하고 골동품 안락의자에 앉아 글을 쓴다. 딸기는 지쳐 떨어지고 남편도 먼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