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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인 어제 저녁부터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어젠 일을 조금 일찍 마치게 되는 날이라 시내나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까 하는 계획을 세웠었지만(우리에게 크리스마스의 모습은 역시 종로나 강남역 빌딩 숲의 트리 장식이다. 여기도 집집마다 트리 장식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운타운 시내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약간의 향수를 해결하고자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어쩐지 스산해져서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 생각과는 달리 문 여는 곳이 하나도 (하나도!) 없다고 한다. 이곳의 젊은이들은 크리스마스엔 모두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보내는 모양이다. 밥 먹을 곳 하나 없는 비 오는 겨울 밤거리를 헤매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저녁 겸 맥주를 한 잔씩 하고 집으로 돌아와 낸시에게 선물로 받은, 초를 켜면 열의 힘으로 위에 달린 금색 천사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장식품을 켜놓고 잠시 놀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역시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아랫집 할머니와 함께 동네의 교회에 가기로 했기 때문에 서둘러 준비를 하고 내려갔다. 아랫집 할머니는 한 때 암을 앓기도 했지만 이겨내고 취미인 플라잉 낚시를 하기 위해 캠핑카를 마련해 1년에 몇 번씩 여행을 떠나 이곳 저곳의 계곡을 다니며 낚시를 즐기고 돌아온다. 멋진 삶이다. 연금을 아껴 낚시여행에 쓰는 것 같다.
할머니를 만나 조그만 선물을 교환하고 함께 교회로 갔다. 할머니는 작은 강아지를 키우는데, 강아지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가 섬에 있다고 해서 딸기도 데리고 갔다. 가봤더니 사람보다 개들이 더 많다. 일찍 갔기 때문에 여자 목사님과 다른 아줌마와 수다를 좀 떨다가 조금 후 예배를 시작했다. 어제 큰 예배가 3번이나 있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거의 안 왔다. 모두 합해 한 10명 정도가 모여 정말로 따뜻한 가족 같은 예배를 드렸다. 딸기와 다른 강아지들도 조용히 예배에 참여했다. (사실은 좀 킁킁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늦게 온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슬렁 가서 인사를 하기도.. ㅎㅎ)

집으로 돌아와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책을 정리했다. 이상하게도 책이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다. 이민 올 때도 반 정도를 추려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고 왔는데, 오늘도 또 추려냈다. 짐을 늘리지 않으려고 책을 잘 안 사는데 왜 자꾸 책이 늘어나는 기분이 들까? 책을 추려내는 눈이 점점 정확해져서 일까?
버릴 것은 버리고 가져갈 것은 상자에 넣어 벽 한 쪽에 쌓고 나니 벌써 낸시와 약속한 시간. 낸시는 우리가 한 번도 명절 칠면조 요리를 먹은 적이 없다고 하자 오늘 우리를 위해 거한 저녁을 마련해 주었다. 요리에 4시간이나 걸린다는데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안타깝게도 카메라를 깜박 잊고 안 가져가서 그 훌륭한 저녁 사진을 올릴 수가 없는 게 아쉽다. 밥을 먹고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그림 알아 맞추기 게임을 했다. 전통적인 명절 게임이라나. 낱말카드를 보고 한 사람이 그림을 그리면 나머지 사람들이 그게 뭔지를 알아 맞추는데, 먼저 맞추는 팀이 이기게 된다. 영어가 짧은 탓에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게임을 하다 보니 8시가 되어가고, 같이 간 식구는 아이들이 있어 그만 자리를 정리했다. 너무 고마워서 우리도 섬을 떠나기 전에 한번 맛있는 것을 만들어 대접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바쁜 크리스마스도 거의 지나가고 9시도 넘은 시간, 남편은 뒤에서 (술이 약간 들어간 탓에) 큰 목소리로 TV를 보며 이것저것 평을 하고 있다. 딸기는 이불 속에서 자고 있고, 평화로운 크리스마스 밤이다.

내가 일하는 가게는 1년 364일 문을 연다. 오늘이 유일하게 닫는 날이다. 뭐 다른 쇼핑몰도 매일같이 열긴 하지만 여긴 개인 사업체라 그런지 왠지 매일 일하는 이민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1월 1일도 일하게 된다. 그만두겠다는 통지를 해놓은 마당이라 약간 꾀가 나려고 하지만 그래도 나가기 전날까지는 열심히 해줘야지 결심한다.
그러고 보니 2004년이 닷새 남았다. 다이어리도 바꿔야 하고, 집안 정리도 해야 하고. 사실 크게 할 일도 없는 것 같은데 괜히 마음만 분주하다. 2005년이 기대된다. 그리고 아직도 새해가 기대된다는 사실이 기쁘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