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September 2016

16년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하는 K씨, 저녁 산책 삼아 필요한 것 한두가지를 사러 가면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서 서성거릴 때가 많다. 근데 요즘 아이스크림이 너무 달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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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실에 얼려둔 바나나가 있어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줌. 바나나 잘 익은 것을 잘라서 얼려두었다가 푸드 프로세서에 갈면 그것만으로도 아이스크림의 느낌이다. 케피르를 좀 섞으면 더 크리미함. 이번엔 얼려둔 블루베리도 몇 알 넣어서 만들었는데 새콤하니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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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가 DVD 체크를 하고 있길래 보니 강아지 고양이 잘 다루는 법. 이 멍멍이는 손톱 깎으려 손을 쥐면 사납게 변하면서 아르릉거리는데 간식으로 주위를 분산시킨 후 깎으면 된다, 뭐 이런 내용.

딸기 손톱 깎아주던 생각이 났다. 눈이 안 보이게 되고 나서 손 만지는 것조차 싫어해서 손톱줄을 사서 달래면서 살살 갈아주다가, 우연히 동네에 좋은 그루머를 알게 되어 데리고 갔었다. K씨는 버둥대며 악을 쓰는 딸기를 잡고, 나는 간식을 주고 (딸기는 그 와중에 열심히 받아 먹고;) 그 사이 그루머가 발톱을 자르곤 했던… 정신 쏙 빠지는 시간이었지.


14일 목요일 – 추석.

점심시간에 서두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맛있는 한국떡집이 있어 송편을 사옴. 한 팩은 챙기고 한 팩은 런치 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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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설명을 프린트해 두었더니 다들 재미있어 했다 ㅎㅎ
송편에 대한 질문이 많아서 속 고물이랑 만드는 법 등도 위키피디아에서 찾아 프린트해서 옆에 두고.

나는 깨 고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다른 고물을 원했는데 전부 깨였음.. 쳇. 그러나 동료들은 무척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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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마트에 들러 잡채와 전을 사다가 명절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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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산책하면서 둥근 보름달도 보고. 거의 완벽한 추석이었네 ㅎㅎ


16일 금요일

올해로 K씨와 결혼 16년차. 우리에게 기념일은 평소에 잘 못하는 것들에 돈 쓰는 것을 정당화 시켜주는 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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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자 마자 얼른 집으로 와서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평소엔 잘 안 써서 몇년 째 가지고 있던 옛날 종이 표를 사용했는데 (올해 초부터 시스템이 교통카드로 바뀜.) 어떻게 들어가긴 했으나 도착역에서 나올 수가 없어서 결국 챙겨갔던 교통 카드를 사용해야 했음. (업무시간에 자기들 사무실에 찾아가야 환불을 해준단다.. 뭥미..) 어쨌거나 저 표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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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가 보기로 한 식당은 밴쿠버에서 해산물로는 최고라는 평가를 듣는 곳이다. 해물을 좋아하는 우리들은 기대를 담뿍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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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 빵은 허브 버터와 콩으로 만든 스프레드와 함께 나온다.

평소 식당에선 술 주문은 안 하는데 특별한(…) 경우니까 백포도주 주문. K씨가 좋아하고 엄마와 동생과의 추억도 있는 Pender Island산 와인이 있길래 그걸로 주문했다. (http://seastarvineyards.ca/stella-maris-2014/) 드라이하면서 꽃향기도 은은하고..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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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메뉴에 원산지 별로 리스트업 되어있었음. 그리 멀지 않은 곳들인데 굴의 모양도 맛도 달라 싱기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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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 관자 세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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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살.. 뭐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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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를 김 부각 같은 것에 얹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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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테린. 테린이 뭔가 해서 찾아보았더니 – 잘게 썬 고기・생선 등을 그릇에 담아 단단히 다져지게 한 뒤 차게 식힌 다음 얇게 썰어 전채요리로 내는 음식이라고 한다. 위 네가지 요리가 샘플러로 나오는데, 연어 테린은 무척 맛있었다. 나머지 세 요리는 간이 너무 강해서 재료 본연의 맛이 아쉬웠음. 혹시 다시 가게 된다면 연어 테린만 다시 먹고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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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씨의 메인 요리 – 랍스터 소스를 얹은 핼리벗 요리. 아주 잘 구워졌는데 내가 랍스터 소스를 좋아하지 않는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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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문한 미소 소스를 얹은 은대구 요리. 이거 정말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구운 생선 요리 중 최고라고 할 수 있겠음. 조개 관자는 사이드로 주문했는데 이건 굳이 안 시켜도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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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식으로는 초콜릿 케익과 아메리카노. 중간에 서버가 오늘 무슨 날이냐고 묻기에 대답했는데 초콜릿으로 글을 써줌.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웬지 좋았음? ㅎㅎ
이 시점에선 엄청 배가 불렀으나 이 집 디저트도 유명하다길래 주문해 봤다. 케익 안에 녹인 초콜릿이 들어 있어 주르르 흘러 나온다. 이것도 맛있었음..

꼭 무슨 날이 아니라도 연어 테린이나 은대구 요리는 다시 가서 먹어볼 만하다 생각함. (애피타이저나 디저트는 생략하고.) 그러나 한정된 자원에 아직 못 가본 식당은 많아서 이 식당에 언제나 또 가게 되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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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토요일

2년째 필요하다 생각만 하고 미루던 스틱 청소기를 사러 몰에 감. (바닥은 룸바가 전담하는데 얘가 구석진 곳은 잘 못하고, 또 눈 앞에 있는 거 후딱 치울 때 가벼운 청소기가 아쉬웠음.)
지난 달에 여러 곳에서 대폭 세일하는 걸 보고 (곧 단종될 모양;) 살까 말까 하다가 사용감을 몰라 미뤄두었는데, 백화점에 걸린 전시품을 사용해 보았더니 꽤 괜찮더군. 찾아보니 마침 아직도 세일 하는 곳이 동네에 있다.
그래서 아침 일찍 가보았는데 글쎄 세일 가격을 한 시간 전에 정상가격으로 바꿨다네?! 그럼 말아라 하려 했는데 그냥 어제 가격으로 주겠다고 한다. 그렇게 가사 도우미를 하나 더 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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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날 저녁을 거하게 먹어서 아침 생각이 없다가 몰에 있는 중국 빵집에서 빵 하나씩 사서 아침. 사진 좀 찍어주려면 꼭 저런다니까. 저래야 블로그에 올리니까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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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잘 못하는 것들에 돈 쓰는 것을 정당화하기 제 2탄. 맛사지 받으러 가기. (요즘 공부하느라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K씨가 원함.) 동네에 중국분이 하는 저렴한 곳이 있다고 해서 시험 삼아 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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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억수같이 내려서 조금 일찍 맛사지 가게 도착. 기다리는 의자가 너무 편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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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 맛사지실. 남자분 한 분과 여자분 한 분이 들어오셔서 어깨와 등을 중심으로 꾹꾹 누르는 맛사지를 해 주신다.
눈 높이가 낮았던 나는 엄청 시원하고 좋았는데 (아줌마 힘드시겠다 생각을 계속 하면서) K씨는 아팠다며 투덜투덜. 그렇잖아도 중간에 너무 세게 누른다고 K씨가 얘기했는데 아저씨가 영어를 못 하셨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K씨 말대로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는지 어디가 아픈지 미리 묻지도 않고 바로 맛사지를 시작했던 건 좀 이상했구나 싶기도 하고. 그냥 싼 맛에 가는 건가 ㅎㅎ 암튼 다음번엔 다른 곳에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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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맛있다고 들은 감자탕집.
재료가 아주 충실하게 들어있는 건 좋았고, 맛은 그냥 괜찮았다. 제일 좋았던 건 사실 솥밥이었음. 다른 집 솥밥은 그냥 돌솥에 밥을 퍼 담은 것 같은데 (누룽지가 안 생김) 여기는 솥에 밥을 했는지 물을 부어놓으니 아주 맛난 눌은 밥이 되었다. 밥은 K씨 덜어주고 눌은 밥을 싹싹 긁어먹음.


요맘때쯤 되면 여름에 캠핑이다 뭐다 내팽개쳐둔 피부가 자기 좀 봐달라 반항하기 시작.
피부가 깜짝 놀랄만큼 좋아질까 기대하며 백화점의 유명한 제품을 사보기도 했는데 효과를 잘 모르겠어서 이번엔 저렴한 제품들을 사서 듬뿍 발라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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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민감성 피부를 위한 스크럽제. 세일 중이라 $3.99에 구매. 며칠간 써봤는데 얼굴이 보들보들한 것이 아주 만족스러움. (스크럽제가 환경에 안 좋다고 해서 찾아봤는데 이 제품은 플라스틱이 아닌 호두껍질가루 등을 사용해서 괜찮다고 한다.. http://www.stives.ca/product/detail/777320/smooth-nourished-oatmeal-scrub-mask?gclid=CKK2_YfSo88CFQOSfgodSfYEog&gclsrc=aw.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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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이 들었다는 유기농 크림. 세일해서 $15 정도에 산 것 같다. 여름 동안 선크림도 안 바르고 돌아다녔으니 비타민C 좀 공급해줘야지.. 며칠 써봤는데 효과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약간 얼굴빛이 환해진 것도 같고? 좀 따갑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행히 나는 그다지 민감한 피부는 아닌 듯.


이렇게 보낸 결혼 16년차의 주말이었다. 결혼 기념일 식사라기보다 식도락 동호회 정모같은 느낌이었지만 나름 즐거웠음. 걸핏하면 제각각 삐지기도 하지만 (나이 탓인가…)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뒤끝은 그럭저럭 짧아진 것 같은, 16년 차 부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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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한국 지진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이제 이것으로 마지막이길.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