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친구분들과의 조촐한 술자리였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의 짧은 스노우슈잉이 아쉬워서였는지, 에너지가 남은 우리는 며칠 전 만두파티 때 남은 숙주를 생각해냈고, 숙주볶음을 안주 삼아 한 잔 하기로 했다.
요즘 종종 해 먹고 있는 숙주 볶음. 대패 삼겹살, 파, 마늘에 굴소스만 있으면 몇 분 안에 완성되는 초간단 요리인데 맛있다.
이런 저런 얘기들 끝에 겨울 캠핑 이야기가 나왔고, 내친 김에 다음 날 가보자고 으쌰으쌰. (아마 K씨는 술을 좀 마신 상태라 동의했을 듯? ㅎㅎ)
우리는 장비가 없지만, 전문가 친구분들께 감사하게 장비를 빌릴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장비를 챙겨서 와 주심.
우리가 향한 곳은 Elfin Lake. 여름 백패킹과 겨울 스노우슈잉 코스로 사랑받는다고. 자세한 정보는 https://www.outdoorvancouver.ca/snowshoe-trail-guide-elfin-lakes/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눈으로 뒤덮인 비포장 절벽길이라 오르는 내내 심장이 쫄깃쫄깃.. 다행히 친구분들 차가 이런 곳에 최적화된 모델이라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친구분들이 몇 년 전에 오셨을 땐 예약 없이 도네이션으로 캠핑을 하셨다는 얘길 들었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미리 예약을 해야한다는 공지가 붙어 있다.. 이런. 그래도 일단 들어가본다. 가서 캠핑비를 내면 되겠지 하고. 잠깐 오르다 보니 예약 없이 캠핑을 하면 벌금 144불이라고!
쫄아서 혹시나 하고 오는 길엔 되지 않던 인터넷을 체크해 보니 다행히 LTE가 연결된다. (의외였음 – 캠핑 사이트 체크해 보란 배려인가?) Elfin Lake는 텐트 사이트와 대피소가 있는데, 당일임에도 자리가 남아 있어서 대피소를 예약함. 친구분 말로는 예전에 묵으셨을 때 대피소가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서 텐트가 더 쾌적할 수도 있을 거라 하시며, 만일을 위해 텐트를 지고 가시겠다고 한다. (무거우실텐데 ㅠㅠ)
초반 5Km는 대부분 오르막이다. 천천히 보조를 맞춰 눈길을 걸어간다. 뺨에 닿는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다.
친구분들 기억에 얼마 안 가 작은 대피소가 있었다고 하시는데, 꽤 가도 나오질 않는다. 그냥 길 가에서 서양대추 (작아도 당분이 많아 등산 간식으로 좋다 ㅎ)랑 귤을 까먹고 조금 더 걸으니…
요기 있네~ ㅎㅎ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는데 기온이 낮아서인가 렌즈가 뿌얘졌다..
영차 영차 들어가보니 왁자지껄 하다. 짐을 챙겨 나가려는 참인가 보다.
우리만 남아 난롯불도 쬐고 간식도 먹는다.
쉘터 옆 화장실도 가고. 여름 사진과 비교해 보니 계단이 반 정도 눈에 묻혀있는 것 같다. 겨울 동안 더 쌓이겠지.
잘 쉬었으니 다시 스노우슈즈를 신고 떠날 채비를 한다. 목적지 대피소까지는 6Km 남았다고. 이제껏 오르막이었으니 앞으로는 좀 완만한 길일 듯 싶다.
가면서 구름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겨울산의 모습..과 텐트에 식량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산을 오르는 J님.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걸어 오시는 P님.
입맛이 없다며 아침부터 밥을 먹지 않던 K씨의 체력이 바닥을 쳤는지 매우 힘들어 하고… 늦은 오후가 되면서 하늘이 더 아름다워지는데.. 한편으로는 도착 전에 해가 져 버릴까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언덕을 하나 넘을 때마다 여기만 지나면 쉘터가 나오겠지 하는 기대는..
또 이런 눈밭을 보며 깨지는 것이었다. 아.. 지겹게 이어지는 폴대들 ㅎㅎ 그리고 언덕 넘을 때마다 욕이 나오기 시작한 K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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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드.디.어. 저 멀리 쉘터의 모습이 보인다.
예쁘게도 생겼구나~~~ 아직은 1층으로 출입이 가능하지만 겨울이 깊어지면 눈이 쌓여 2층으로 출입해야 한단다 ㅎㅎ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나무로 만든 2층 침대들이 연결되어 있고 최대 33명까지 잘 수 있다. 우리는 일찍 도착한 편이라 얼른 구석 명당에 자리를 펴고.
1층에는 식당이 있다. 취사는 가능하나 물은 없으므로 밖에서 눈을 퍼와서 끓여서 물을 만든다.
기진맥진해서 자리에 딱 붙어 P님이 해주시는 밥을 기다림.. 죄송하다;;
밥과 김치찌개. P님께서 더 맛있게 할 수 있는데 급하게 준비하는 거라 별로라고 아쉬워하셨으나 정말 꿀맛꿀맛이었다. 밥을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먹고 나서는 곧장 잠자리에 들어 열 시간 이상을 숙면. 중간에 잠깐씩 깨긴 했으나 (식당과 침실 사이가 뚫려 있어 식당에서 술마시며 ‘엄청’ 시끄럽게 카드 놀이 하는 소리가 그대로 다 들림) 너무 피곤해서인지 곧바로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K씨가 오후에 일이 있어 새벽부터 일어나 또 P님께서 끓여주신 만두 라면으로 아침을 먹고.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응석에 민폐가 장난이 아니었구먼 ㅠㅠ) 만두라면도 밥을 말아 국물까지 싹싹.
이렇게 밖에 나와 마시는 커피는 또 웰케 맛난건지!
이렇게 캄캄할 때 길을 나섰다. 오전 6시 반.
헤드랜턴 불빛에 반사되는 폴대를 길잡이 삼아 열심히 걷는다. 이 주변은 산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므로 반드시 폴대 있는 곳으로만 다녀야 한다.
날이 서서히 밝아 오고.. 구름이 옅게 깔려 있었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눈 덮인 산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내리막길이 많은 것도 있지만 저녁과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서인지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또 여유가 있으니 풍경도 감상하고 수다도 좀 떨고.
P님과 J님께 너무 신세를 져서 죄송할 따름. 두 분 안 계셨으면 이런 모험을 떠날 엄두도 못 냈을텐데. 정말 감사하다.
이렇게 순식간에 계획되고 실행된 우리의 첫 겨울 백패킹 경험. 요 며칠 나는 산에서의 그 상쾌한 공기와 눈 위를 걷는 재미, 아름다운 산의 풍경들을 잊을 수 없어 백패킹 장비들을 열 검색하며 다음 모험을 계획 중이고 K씨는 한숨을 쉬며 “이것이 숙명이라면..” 하면서 누군가를 패러디하고 있는 중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