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을 2017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시작은 친구분들과의 조촐한 술자리였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의 짧은 스노우슈잉이 아쉬워서였는지, 에너지가 남은 우리는 며칠 전 만두파티 때 남은 숙주를 생각해냈고, 숙주볶음을 안주 삼아 한 잔 하기로 했다.

요즘 종종 해 먹고 있는 숙주 볶음. 대패 삼겹살, 파, 마늘에 굴소스만 있으면 몇 분 안에 완성되는 초간단 요리인데 맛있다.

이런 저런 얘기들 끝에 겨울 캠핑 이야기가 나왔고, 내친 김에 다음 날 가보자고 으쌰으쌰. (아마 K씨는 술을 좀 마신 상태라 동의했을 듯? ㅎㅎ)


우리는 장비가 없지만, 전문가 친구분들께 감사하게 장비를 빌릴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장비를 챙겨서 와 주심.

우리가 향한 곳은 Elfin Lake. 여름 백패킹과 겨울 스노우슈잉 코스로 사랑받는다고. 자세한 정보는 https://www.outdoorvancouver.ca/snowshoe-trail-guide-elfin-lakes/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눈으로 뒤덮인 비포장 절벽길이라 오르는 내내 심장이 쫄깃쫄깃.. 다행히 친구분들 차가 이런 곳에 최적화된 모델이라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친구분들이 몇 년 전에 오셨을 땐 예약 없이 도네이션으로 캠핑을 하셨다는 얘길 들었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미리 예약을 해야한다는 공지가 붙어 있다.. 이런. 그래도 일단 들어가본다. 가서 캠핑비를 내면 되겠지 하고. 잠깐 오르다 보니 예약 없이 캠핑을 하면 벌금 144불이라고!

쫄아서 혹시나 하고 오는 길엔 되지 않던 인터넷을 체크해 보니 다행히 LTE가 연결된다. (의외였음 – 캠핑 사이트 체크해 보란 배려인가?) Elfin Lake는 텐트 사이트와 대피소가 있는데, 당일임에도 자리가 남아 있어서 대피소를 예약함. 친구분 말로는 예전에 묵으셨을 때 대피소가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서 텐트가 더 쾌적할 수도 있을 거라 하시며, 만일을 위해 텐트를 지고 가시겠다고 한다. (무거우실텐데 ㅠㅠ)

초반 5Km는 대부분 오르막이다. 천천히 보조를 맞춰 눈길을 걸어간다. 뺨에 닿는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다.


친구분들 기억에 얼마 안 가 작은 대피소가 있었다고 하시는데, 꽤 가도 나오질 않는다. 그냥 길 가에서 서양대추 (작아도 당분이 많아 등산 간식으로 좋다 ㅎ)랑 귤을 까먹고 조금 더 걸으니…

요기 있네~ ㅎㅎ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는데 기온이 낮아서인가 렌즈가 뿌얘졌다..

영차 영차 들어가보니 왁자지껄 하다. 짐을 챙겨 나가려는 참인가 보다.

우리만 남아 난롯불도 쬐고 간식도 먹는다.

쉘터 옆 화장실도 가고. 여름 사진과 비교해 보니 계단이 반 정도 눈에 묻혀있는 것 같다. 겨울 동안 더 쌓이겠지.

잘 쉬었으니 다시 스노우슈즈를 신고 떠날 채비를 한다. 목적지 대피소까지는 6Km 남았다고. 이제껏 오르막이었으니 앞으로는 좀 완만한 길일 듯 싶다.


가면서 구름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겨울산의 모습..과 텐트에 식량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산을 오르는 J님.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걸어 오시는 P님.

입맛이 없다며 아침부터 밥을 먹지 않던 K씨의 체력이 바닥을 쳤는지 매우 힘들어 하고… 늦은 오후가 되면서 하늘이 더 아름다워지는데.. 한편으로는 도착 전에 해가 져 버릴까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언덕을 하나 넘을 때마다 여기만 지나면 쉘터가 나오겠지 하는 기대는..

또 이런 눈밭을 보며 깨지는 것이었다. 아.. 지겹게 이어지는 폴대들 ㅎㅎ 그리고 언덕 넘을 때마다 욕이 나오기 시작한 K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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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드.디.어. 저 멀리 쉘터의 모습이 보인다.

예쁘게도 생겼구나~~~ 아직은 1층으로 출입이 가능하지만 겨울이 깊어지면 눈이 쌓여 2층으로 출입해야 한단다 ㅎㅎ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나무로 만든 2층 침대들이 연결되어 있고 최대 33명까지 잘 수 있다. 우리는 일찍 도착한 편이라 얼른 구석 명당에 자리를 펴고.

1층에는 식당이 있다. 취사는 가능하나 물은 없으므로 밖에서 눈을 퍼와서 끓여서 물을 만든다.

기진맥진해서 자리에 딱 붙어 P님이 해주시는 밥을 기다림.. 죄송하다;;

밥과 김치찌개. P님께서 더 맛있게 할 수 있는데 급하게 준비하는 거라 별로라고 아쉬워하셨으나 정말 꿀맛꿀맛이었다. 밥을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먹고 나서는 곧장 잠자리에 들어 열 시간 이상을 숙면. 중간에 잠깐씩 깨긴 했으나 (식당과 침실 사이가 뚫려 있어 식당에서 술마시며 ‘엄청’ 시끄럽게 카드 놀이 하는 소리가 그대로 다 들림) 너무 피곤해서인지 곧바로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K씨가 오후에 일이 있어 새벽부터 일어나 또 P님께서 끓여주신 만두 라면으로 아침을 먹고.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응석에 민폐가 장난이 아니었구먼 ㅠㅠ) 만두라면도 밥을 말아 국물까지 싹싹.

이렇게 밖에 나와 마시는 커피는 또 웰케 맛난건지!


이렇게 캄캄할 때 길을 나섰다. 오전 6시 반.

헤드랜턴 불빛에 반사되는 폴대를 길잡이 삼아 열심히 걷는다. 이 주변은 산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므로 반드시 폴대 있는 곳으로만 다녀야 한다.

날이 서서히 밝아 오고.. 구름이 옅게 깔려 있었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눈 덮인 산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내리막길이 많은 것도 있지만 저녁과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서인지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또 여유가 있으니 풍경도 감상하고 수다도 좀 떨고.


P님과 J님께 너무 신세를 져서 죄송할 따름. 두 분 안 계셨으면 이런 모험을 떠날 엄두도 못 냈을텐데. 정말 감사하다.

이렇게 순식간에 계획되고 실행된 우리의 첫 겨울 백패킹 경험. 요 며칠 나는 산에서의 그 상쾌한 공기와 눈 위를 걷는 재미, 아름다운 산의 풍경들을 잊을 수 없어 백패킹 장비들을 열 검색하며 다음 모험을 계획 중이고 K씨는 한숨을 쉬며 “이것이 숙명이라면..” 하면서 누군가를 패러디하고 있는 중 ㅎㅎㅎ

 

13 thoughts on “잊을 수 없을 2017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1. 남쪽나라살아요

    으으. 정말 멋지십니다. 짝짝짝.
    제가 5ㅏ느! 동네에는 아직 이런 산장이나 대피소를 본적없는데 Walk in the woods책에 자주 나와서 상상해보던데긴한데 생각보다 잘 되어 있는듯 합니다. 겨울 추위 끔찍한 저는 상상도 못할 캠핑입니다

    Reply
    1. Ana Post author

      대피소는 상당히 따뜻해서 침낭도 옆 지퍼 열어두고 잤어요. 난로가 항시 켜져 있더라구요. 원래는 삽으로 눈 파고 텐트에서 잘 요량이었는데 ㅎㅎ (친구분들 말씀으론 생각보다 덜 춥다고 하네요..)
      조만간 눈밭 캠핑도 도전해보고 싶긴 한데.. 장비 구입의 압박이 심해서 올해 가능할 지는 모르겠어요. 안 되면 겨울 가기 전에 대피소 백패킹이라도 몇 번 더 하고 싶고요. (근데 여기가 5월까지도 눈밭이라고 하더라구요 ㅎ)
      백패킹 재밌죠? ㅎㅎ 써니베일님의 백패킹 이야기도 너무 좋았어서 가끔 글 보러 가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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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nonymous

        전화로 답글을 달았더니 오타가 많네요. 부끄러워라.
        난방되고 하는 산장 있으면 저도 겨울에 산행을 도전해볼수 있을거 같지만, 손가락 어는거 너무 너무 싫어해서 엄두가 안날거 같아요. 저는 영하가 되지 않아도 한 영상 10도만 아래로 내려가면 손가락이 어는 이상한 증상이 있는데 그 느낌이 싫어요. ㅠㅠ

        저번에도 한번 여쭈어 볼려고 했었는데
        제가 워드프레스로 옮길려고 하는데 혹시 .org쓰시나요? 아니면 .com 쓰시나요?

        네이버는 원래 싫어하는데다가 아이디가 정지되서 못 쓰고 티스토리는 인터페이스가 불편하고 다시 다른데로 옮겨 보고 싶어요.

        Reply
        1. Anonymous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거 같아 쑥스러운데, org쓰시는군요. 그럼 저도 org로. .com이랑 차이는 잘 모르겠는데 얼마전 어디서 읽은 글에 따르면 org에다 꼭 만들라는데 보니깐 제가 2-3년전에 .com 쓸러고 계정을 또 하나 만들어 둔게 있네요.

          Reply
          1. Ana Post author

            사실 이 사이트로 이사오는 걸 K씨가 다 했기 때문에 잘 모르는데, 지금 찾아보니 .com과 .org의 차이는 호스팅을 누가 하느냐라고 하네요. 저희는 호스팅 업체에 매년 돈을 내고 서버를 쓰고 있어요. .com을 쓰시면 무료인데 대신 도메인에 wordpress가 들어간대요.

          2. Anonymous

            리플라이가 다음레벨로 안들어가서.
            어제 도메인 만들었어요. sunnyparks.org로 만들었는데 구글에서 샀는데 60일 지나야 도메인 이동이 된다고 해서 무용지물이 됐어요. 그냥 wordpress.com에다가 연동해서 써야 할까봐요. 근데 뭔가 뭔지 몰라서 헤메고 있는데 시간나면 다시 한번 찬찬히 봐야할거 같습니다.

          3. Ana Post author

            sunnyparks.org 가봤더니 연동 잘 되는데요? ^^
            60일 이후엔 도메인도 바뀌게 되는 건가 봐요..

  2. 림쓰

    우와.. 무려 백패킹으로 다녀오셨네요!
    꼭 해보고 싶었던 엘핀 겨울 백패킹인데, 읽으며 대리만족 했습니다 ^-^ 너무 좋으셨겠다는!!!
    김치찌개와 만두라면까지! 메뉴 초이스조차 기가막히네요. 침이 꼴깍ㅎㅎ 덕분에 좀더 자세한 엘핀 실시간? 정보 보았네요… 저도 꼭 한번다녀오고싶습미돠!ㅎㅎ
    언제가 될진 모르겠습니다만, 백패킹 좋아하신다면, 혹은 이번에 즐거우셨다면 다음에 꼭 한번만이라도 시간 맞춰 같이 가고 싶네요~~~^.^

    Reply
    1. Ana Post author

      네.. 너무 좋았어요!!! 그 기운으로 비오는데 또 씩씩하게 출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ㅋㅋㅋ
      아 정말 림쓰님이랑 같이 놀러가야되는데 말이예요.. (블로그 포스팅하신 거 보면 같이 놀면 진짜 재밌겠다 싶단 말이죠 ㅎㅎ) 제가 백패킹 장비를 하나 하나 마련하고 있는 중이라 당장 백패킹은 어렵지만.. 오토캠핑이나 스노우슈잉.. 뭐 그것도 안 되면 커피라도 마십시다 ㅎ
      다행히 엘핀 레이크 스노우슈잉 백패킹은 봄까진 할 수 있겠더라구요. 엘핀 레이크 봄 백패킹 관련 빵 터진 재미난 포스팅 하나 봤는데 함 읽어보세요 ㅎㅎ
      https://www.inafarawayland.com/hiking-elfin-lakes-trail/

      Reply
  3. 바람

    엄마 쟤 눈퍼먹어? ㅋㅋ
    저 허연게 무엇인고했다가,
    눈퍼서 물만드는거라니 급 생각나버렸어요.
    그나저나 와.. 정말 눈밭을 헤치고 ㅎㅎ
    대단하심!

    Reply
    1. Ana Post author

      전에 브로콜리 너 마저 이름 지을 때 나온 후보들 중 하나가 엄마 쟤 흙먹어라던데 ㅎㅎㅎ
      바람님 새해 잘 시작하셨어요? 올해는 함 만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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