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수요일
간만에 좀 세게 자전거를 타서인가 다리가 화끈거려 잠들기가 힘들었는데 트레일러를 때리는 빗소리에 세시 반쯤 일어났다. 약하게 시그널이 잡혀서 오랜만에 트위터 접속도 해 보고. (트위터는 사진이 없어서 그런지 조금씩 볼 수 있다.) 별로 흥미도 없고, 졸린 것 같은데 눈을 감으면 빗소리가 너무 시끄럽고. 그러다 문득 발 쪽의 침낭이 차게 느껴져 불을 비추어봤더니 이런.. 물이 좀 묻어있다. 비가 새는 건가…
아침에 다시 살펴보니 다행히 새는 건 아닌 것 같고 창문에 맺혔던 물방울들이 흐른 거였다. 트레일러의 특성상 커튼 등으로 덮여진 부분엔 물방울이 맺혀서 낮 동안 말리곤 하는데 여긴 워낙 습하다 보니 낮에도 잘 마르지가 않는다. .
축축한 침낭에 놀라 불을 켜는 바람에 K까지 일어나 함께 화장실 다녀오고, 밤 동안에 분 바람으로 쓰러진 폴대도 다시 세우고. K는 다시 잠들고 나는 따뜻한 물을 마시며 한 두 시간 기록을 했다.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트레일러에서 쉬면서 잠도 보충하고 그럴 예정.
아침으로 김치순두부 라면을 먹고 (종가집 김치라면 정말 괜찮다) 커피까지 마신 후 드라마 한 편 보고 다시 잠을 청해본다. 한 숨 자고 눈을 뜨니 세시. 슬슬 일어나 나갈 준비를 시작한다.
오늘은 Ucluelet의 Pluvio에 예약을 해 둔 날이다. 이 레스토랑은 처음으로 파인 다이닝이 맛도 있구나 생각하게 된 곳. 기념일에나 갈 만한 가격대지만 메뉴를 준비하며 고민한 흔적과 정성이 느껴져 먹고 나서 가성비 ㅎㅎ 생각도 않게 되고 소박하지만 열심히 세팅한 로컬 음식 코스 요리를 먹는 경험도 매우 재미있는 곳이다.
가면서 어제 저기서 자전거 탔었지 하고 사진도 찍고…
일단 타운에 도착해서 예약 시간이 될 때까지 동네 산책을 하는데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우산이 몇 번이나 뒤집혔다. 그나마 비가 세지 않아서 다행.
부두쪽에 갔다가 아기 사슴 두 마리가 밥먹는 걸 보고는 한참이나 구경. 밥먹는데 방해해서 미안했지만 시간이 많이 남아서 ㅎㅎ
예약 시간 맞춰 식당으로 간다. Covid 이후 예약제로만 운영하고 있고 (적어도 2-3주 전에는 예약해야 함) 두 가지 코스 요리 중 하나를 미리 예약해야 한다. 와인 페어링 가격이 괜찮고 (잔 와인 가격이 쎄서 상대적으로) 셀렉션도 꽤 좋았다는 K씨의 기억이 있어 한 사람 분 (K씨는 운전해야 해서 한 잔만) 페어링 추가.
일단 직접 구운 식전빵과 사케 버터. 스낵은 연어 퓨레와 베리, 그리고 캔디드 샐몬. 거기에 오징어핫도그를 추가했다. 뭐 다 맛있지. 음식 기다리며 칵테일 한 잔 할 때 곁들이는 것들인데 와인 페어링을 한터라 너무 마시게 될까봐 다른 음료는 주문하지 않았더니 조금 심심했던 건 있었다.
첫번째 코스는 말하자면 쌈요리인데 로컬 상추에 핼리벗 세비체, 관자를 갈아만든 소스 등을 얹어서 먹는다. 쌈의 나라 출신인지라 새로운 요리를 경험하는 감동이 덜했네. 페어링은 샤도네이, 피노 그리 등을 블렌드한 백포도주. 두번째는 생선 요리. 가장 맛있었다. 송어를 촉촉히 구워 트러플 소스를 올리고 직접 채취한 버섯과 셀러리악 뿌리를 구워 곁들였다. 페어링은 드라이한 사과향이 나는 백포도주. 즐겁게 먹었다. 다음 요리는 48시간 수비드한 후 그릴에서 구워낸 갈비 요리. 쉬라 적포도주를 곁들여 먹었다. 갈비찜이 연상되는 웬지 익숙한 맛. 다음은 체다 소스를 얹은 와플과 아이스와인 (간만에 아이스와인 맛있었음), 그리고 탄산주를 곁들여 다크 초콜릿 타르트로 마무리. 와인 페어링을 했더니 이것저것 꽤 많이 마시게 되었다. 다음 번에 다시 가게 되면 식전 칵테일과 와인 한 잔 정도 주문하는 것도 괜찮을 듯.
예약이 두시간반이었는데 그 시간을 꽉 채워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저녁때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잦아들어 그리 어렵지 않게 다시 집으로 왔다. K씨는 오자마자 깍두기를 꺼내서 먹고 (버터 디톡스) ㅋㅋㅋ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트레일러에서 따뜻하게 난로를 켜두고 기록을 남긴다. 이날도 빗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밖에는 비가 오지 않아도 숲 속 나무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로 계속 들리는 빗소리…
따뜻한 이불 속에서 드라마를 좀 보다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