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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작은 고개 하나를 넘었다

어제 온라인을 통해 DJ Doc가 밴쿠버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연일은 바로 어제 당일 ㅋㅋㅋㅋㅋ 대단한 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라는 인간 자체가 팬질..이란 걸 하지 못 하는 인간임. 누구누구 빠 이런 것도 못 함.) 새 앨범이 나오면 챙겨듣는 몇 안되는 가수들 중 하나이고, 특히 이번 국정농단 사태 이후 발표한 노래를 듣고는 이하늘은 정말 천재구나 생각하고 있던 터에 (가사에 나오는 내용이 뉴스로 보도된 지 약 2주만에 노래가 나왔는데, 라임이 환상이다..) 바로 우리 동네에서 공연을 한다니 꼭 가보고 싶었다. 곧바로 K씨에게 연락을 했는데 마침 K씨가 바쁜 날이라 스케줄 조정이 어렵다고. 오후 내내 사무실에서 일하면서도 마음은 전전긍긍 다른 곳을 헤매고.. (다음 주부터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ㅠㅠ)

혼자서라도 가볼까 하다가, K씨도 좋아하는 팀이라 혼자 가기 미안하기도 하고, 또 혼자 가면 뻘쭘하고 밤늦게 집에 올 것도 걱정 되고 해서 접었다가, 동생에게 조언도 구했다가… 마음이 요동치던 중, 혼자서도 콘서트 정도는 갈 수 있는 씩씩한 아줌마가 되어야지 하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고 퇴근 직전 구석자리에 하나 빈 좌석을 예매했다. K씨랑 같이 간다면 좀 앞자리로 샀을지 모르겠지만 혼자 가니까 젤 싼 걸로. 표를 산 후 빛의 속도로 집으로 와서 아침에 볶아놓은 버섯을 밥에 얹어서 후다닥 마시고 혹시 몰라 그라놀라바도 하나 챙기고 텀블러에 물도 가득 채워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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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학교 주변 KFC에 투고로 요깃거리를 사러 갔다가 거기서 혼자 비스킷을 먹고 있는 세련된 머리 스타일의 선배 언니를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았는데, 첫번째로는 비스킷에 딸려 나오는 버터를 몽땅 다 발라 먹는 모습에 놀랐고 (그 땐 버터는 ‘악’이라고 생각하던 때) 두번째는 카운터와 가까운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고 맛있게 비스킷을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기억과 얼마간의 시간차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역시 그 시절 어느 날 나는 혼자 식당 가기를 결행하였다. (떡국인지 떡라면인지 뭐 그런 걸 먹은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그 때는 혼자 식당에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가는 게 꼭 넘어야 하는 과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위한 과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때는 내 인생을 잘 살기 위해 꼭 해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했다.

어제 스카이트레인을 타고 공연장으로 가는데 그런 느낌이었다. 어른이라면 혼자서 콘서트는 한번 가봐야 해. 뭐 그런 느낌? ㅎㅎㅎ 가면서, 그리고 너무 일찍 도착해서 공연이 시작하기를 기다리면서, 정유정 작가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읽었는데, 항상 눈 앞에 나타난 장애물들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살다가 다 내려놓고 쉬기 위해 간 여행에서, 히말라야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본인을 발견하는 내용이 나온다. 콘서트 오는 걸 과제로 생각하다니, 이거 남 얘기가 아닌데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공연은 딱 생각했던 것만큼 재미있었다. 뒷쪽 구석자리인지라 비교적 점잖은 분위기일까 생각했으나, 그래도 이왕 인생의 한 고비(?)를 넘는 대단한 마음가짐으로 갔으니 재미있게 놀아야지 싶어서 신나는 노래가 나오면 일어서서 몸을 흔들었다. 학생 때도 클럽을 안 다녀 본, 완전 몸치지만 뭐 어때.

노래 중간중간 하는 얘기들 대부분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았다는 건.. 뭐 예상하고 있던 바. 하지만 나는 예술가들의 의견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거나 동의할 수 없어도 창작물이 뛰어나면 그냥 넘어가고 말게 된다. 심지어 동의는 하지 않더라도 얼마간의 그들의 의견에 대한 존중심까지 생길 때도 있다. (예를 들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 특히 사생활은 창작물 감상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편이고. 그래서 그런 농담들엔 그냥 눈을 꾹 감고 노래와 분위기만 즐기려 노력했다.

약간 아쉬웠던 점은 앞에 노래 가사를 스크린에 띄워 주거나 했으면 따라부르기 좋았을텐데 (당연히 가사가 기억이 안 난다..심지어 요즘 자주 들었던 수취인 분명조차도! 뭘 기억해야 한다는 습관 자체가 없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준비가 아예 없었고, 많이 아쉬웠던 점은 K씨랑 같이 갔다면 맥주라도 한 잔 씩 하고 좀 더 신나게 놀 수 있었을텐데 혼자 가서 그냥 맹물 마시면서 조신하게 놀았다는 것.

이번에 밴쿠버에 온 것이 10년 만이라던데, 언제 다시 올 지는 모르겠지만 (본인들도 이제 멤버 하나 무릎 나가거나 하면 그냥 그렇게 끝이라고.. ㅋㅋㅋ) 건강하게 다시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 때는 꼭 미리 알아두었다가 더 재미있게 놀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