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저녁

역시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길다. 11시 전에 아침을 먹고 빨래를 하고 영어공부까지 했다.
남편은 마분지로 상자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내가 오늘 선물할 치즈케익을 담을 상자를 부탁했더니 허리가 아프다고 계속 투덜대면서도 식탁 위에 종이를 늘어놓고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하고 있다. 상자 네 개를 만들었는데 네 개의 모양이 다 다르다. ㅋㅋ

케익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두 조각은 선배네 딸들을 위해 포장하고 나머지 두 조각은 매니저들에게 각각 주기로 했다. 일단 이사 온 후 이것저것 부탁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도 있고, 좀더 친해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번 우편물 도난 사건 –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할 예정 – 때도 그랬지만 도난 사고가 있을 경우 가장 먼저 의심 받는 사람은 매니저이다. 응급사태를 대비해 모든 집들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게 그 첫째 이유고, 대부분 이민자 출신이란 것도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유다. 우리도 매니저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다. 처음엔 모두 다 조심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일 서로를 의심하고 살면 얼마나 정신이 피곤할까..?
케익을 가져다주면서 만난 매니저는 어제 그 집에 가봤더니 방충망을 가져가 버려서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고 얘기해준다. 애고.. 역시 요행은 그리 쉽게 오는 게 아닌가 보다.
어쨌든 케익을 선물하고 기분 좋게 돌아와 오렌지와 사과, 셀러리로 주스를 만들어 마시고 나갈 준비를 한다. 역시 뭔가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있다.
옷을 따뜻하게 입고 집을 나선다. 곧 5월인데 날씨는 계속 차다. 언제쯤 봄이 오려나???
선배 댁에 도착해 일단 남편 일 얘기를 나눈 후 선배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고 우리는 10분 정도 선배네 집을 지킨다. 선배네 언니가 딸을 데리러 학교에 갔기 때문이다. 여기는 어린이들을 집에 혼자 두어도 법에 걸리고 해서 그런지 다들 부모가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는 분위기다.
언니는 돌아오자마자 급히 우리 식사를 준비해주고 다시 큰 딸을 데리러 간다. 정말 밴쿠버의 부모들은 바쁘다. 자녀들의 학교 통학을 책임져야 하고, 과외 활동이나 자원 봉사 등등도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온다.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도 그렇게 해서 어머니들끼리 친해지기도 한다.
선배네 작은 딸과 함께 김치찌개를 반찬으로 든든히 늦은 점심을 먹고 남편은 부탁 받은 컴퓨터 정리를 하고 나는 TV를 본다.

남편의 일이 다 끝나고 7시쯤 집으로 돌아와 그 동안 별렀던 딸기 미용(?)을 해준다. 안 깎아준 지 꽤 되어 털이 많이 자랐는데 마침 털갈이 때가 되어선지 많이 빠지기도 해서이다. 셋이 다 기진맥진한 채 한 시간이 넘도록 씨름을 하고 나서 딸기를 씻기고 우리도 씻고 나니 10시가 다 된 시각이다.
며칠 전 사 놓은 맥주와 나초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뉴스를 보고 있다. SARS, 유괴당할 뻔한 소년 이야기 등등.. 재미없다. 한국은 편안한 걸까? 지금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고 뒤숭숭한 것 같던데.. 왜 이리 먼 얘기처럼 들리는지.. 바로 얼마 전에 깡패 같은 미국이 힘없는 약소국을 뭉개버렸는데 말이다.
막연히 잘 해결되겠지..란 생각만 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이래저래 피곤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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