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금요일

요즘엔 일기를 뜸하게 쓰게 된다. 이사 후 계속 피로가 남아있었는지, 뭘 쓰거나 하기보다는 그냥 앉아서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리고 이사를 온 후 소소롭게 일어나는 일들 – 예를 들면, 누가 우리집 우편물을 가져가 버렸다던가 – 도 만만치 않아서, 왔다갔다하면서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금방 하루가 지나가고 마는 것이다.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긴장하고 있는 것인지, 한국에서였다면 일로도 안 치는 것들을 꼼꼼히 보고 처리하려면 신경이 더 많이 쓰인다.
게다가 확실히 내 집에서 지내는 것과 잠시 머무는 곳에서의 생활은 다른 모양이다. 지난 달 뉴웨스트민스터의 아파트에서는 참 시간이 많았던 것 같은데 여기서는 똑같이 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 오히려 주변에 편의시설이 다 마련되어 있어 움직이는 시간은 훨씬 덜 드는데도 – 시간이 빨리 간다. 이것저것 챙길 일이 더 많은가 보다.

오늘은 Good Friday – 성 금요일로 공휴일이다. 우리도 덩달아 늦잠을 자고 일어나 한국에서 가져온 참마시 라면으로 아침 겸 점심을 대신한 후 어제 봉변을 당한 소파 커버 –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어제 우리집에 퍼그 네 마리(장군이, 우리, 땅콩이, 미니미)를 키우는 E가 잠시 놀러 왔었는데 미니미가 소파에 실례를 하고 말았다 – 를 빨아 널고 치즈케익 한판 굽고 햇볕이 내리쬐는 침대에 기대 누워 책을 좀 보다가 다시 낮잠에 빠져버렸다.
일어나니 오후 네시.. 오늘부터 다음주 월요일까지는 큰 연휴인 부활절 기간이다. 원래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9시에 문을 닫는 쇼핑센터들도 6시면 문을 닫는다. 딸기도 나가자고 조르고, 저녁거리도 마련할 겸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가 오다가 어제 오늘은 비교적 청명한 날씨다. 비록 아침에 잠깐 비가 흩뿌리긴 했지만 오후 내내 햇살이 비치고 있다. 딸기는 땅콩을 물고 종종걸음을 치는 청설모를 쫓아가려 힘껏 앞으로 내닫지만 끈 때문에 뜻을 못 이루고.. 하지만 곧 잊고 다른 목표물을 향해 발을 내딛고 있다. 쇼핑 센터 안은 휴일을 맞아 가족과 함께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모두들 토끼 모양이나 달걀 모양의 초콜릿을 사고 있다. 토끼 인형도 많이 팔고 있다. 부활절 토끼(Easter Bunny)의 풍습은 독일 이민자들이 미국에 전해 온 것이라는데, 부활절 토끼가 부활절 전의 목요일에는 빨간색의 달걀을, 부활절 전날 밤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달걀을 낳아 곳곳에 숨겨놓는다고 해, 부활절 아침이 되면 어린아이들이 이 달걀을 찾는 놀이를 한다고 한다. 초콜릿 가게는 대목을 맞아 사람들이 줄을 서서 계산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검소하다는 캐나다 사람들이 이런 기념일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는 걸 보면.. 마치 한국에서 명절 차례상 차리느라 돈을 쓰는 것과 같은 의미겠지..

일단 월마트로 가서 포장지와 리본을 좀 샀다. 요즘 빵과 쿠키 굽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지난 번 구웠던 치즈케익을 남편 선배댁 딸들에게 선물로 갖다 주었는데 너무 좋아해서 자신감을 얻어, 앞으로 간단한 친구 방문에는 쿠키나 케익을 가져가기로 마음 먹었다. 어제는 버터링 쿠키를 구워 우리집에서 버스로 한 10분 정도 가는 곳에서 애견 미용을 하는 장군엄마에게 놀러갈 때 가져갔는데, 맛있다고 가져간 것을 모두 먹어주어 기뻤다. 장군엄마는 치과의사가 되려고 UBC에서 공부하다가 강아지가 너무 좋아 공부를 그만두고 애견미용을 배워 애완용품 가게 한켠에서 애견미용 일을 하고 있는 친구다.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앞으로도 친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암튼.. 그래서 쿠키 선물할 때 쓸 포장지를 사고 야채를 좀 사려고 했는데 야채가게가 문을 닫아 버려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 또 잘 해먹는 것은 생과일 주스 – 이민 오면서 남편이 떡볶이를 좋아하니까 찬밥으로 떡볶이를 해먹을 수 있다는 만능 녹즙기를 사 가져왔는데, 정작 해보니 별로 맛이 없고 떡이 막 풀어져버린다. 녹즙기 회사 홈페이지에 가보니 제대로 된 떡볶이를 하려면 처음부터 떡볶이용으로 밥을 고슬하게 쪄서 식힌 후 떡을 뽑아 바로 먹어야 한다고.. 간단하게 찬밥을 활용하려던 우리 생각대로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직 밥을 쪄서 해먹어본 적은 없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져온 녹즙기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여기 풍부한 과일과 채소로 주스를 만들어먹고 있다. 오렌지나 자몽, 사과, 당근, 마(한국 마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색깔이 분홍색이다.), 브로콜리 등 여러 가지를 섞어가면서 마시는데, 즙을 짠 찌꺼기가 아깝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정도 채소를 한꺼번에 먹는 것도 즙이니까 가능한 것 같다. 남편은 오렌지 외의 과일은 잘 먹으려 하지 않는데, 주스로 만들어주면 그럭저럭 잘 마셔준다. 사과 한 개를 깎아놓으면 반 개 먹기가 힘들었는데, 주스로 마시면 한 컵에 사과 하나, 자몽 하나, 마 한 토막 등등 여러 가지 채소를 한꺼번에 섭취하니 좋다.

저녁때 주스를 마셨더니 포만감이 들어서, 9시가 넘어서야 남편 선배 댁 언니가 주신 닭고기로 닭도리탕을 만들어 늦은 저녁을 먹고 일기를 쓰고 있는 중이다. 이제 씻고 책을 좀 읽다가 자야겠다.

아직 캐나다에 온지 두 달이 안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로, 이민 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도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기서도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지만, 가끔씩 동생과 친구들과 커피 마시면서 수다떨던 시간들이 그립다. 그래도 인터넷이 발달해서 식구들과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거의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것에 감사를 해야 하겠지. 아무쪼록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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