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쓰게 된다 (김중혁, 2017)

한국에 갔을 때 망설이다 산 ebook reader는 정말 잘 쓰고 있다. 한국어책을 읽으면 영어책을 더 멀리하게 되는 것 아닐까 싶었지만, 한국어책을 읽지 않을 때도 영어책을 열심히 읽지는 않았으니까.. 뭐라도 읽는 게 낫지 뭐.

요즘 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유행인가 보다.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어하나 보다. 좋은 일이다. 김중혁 작가의 비소설은 처음 읽어보는데, 아주 좋았다. 근래 읽은 책 중 스크랩을 가장 많이 한 책인 듯.

너무 많은 것 아닐까 싶지만, 내가 읽으면서 스크랩 했던 부분들:


나 역시 소설을 읽다가 식상한 비유가 서너 번 반복되는 것 같으면 책을 덮어버린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사소한 표현에 공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커다란 이야기에도 공을 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 글을 써나갈 때 나는 자주 ‘내 안의 적’과 맞닥뜨린다. ‘내 안의 적’과 자주 싸운다. “이걸 쓰려고? 아버지 얘기를?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자세하게 쓸 거야? 집안사를 그렇게 다 얘기하는 게 괜찮아? 일단 써보기나 해봐. 너무 심하게 쓰면 좀 그렇지 않겠어?” 나는 마구 써내려가고 싶다. 아버지에 대한 어린 시절의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싶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나는 조금씩 문장을 정제했다. 다듬고 고쳐나갔다.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한 점수를 평균 내는 스포츠 심사위원단의 방식처럼, 나는 가장 거친 생각과 지나치게 추억에 젖은 마음을 지워 버렸다. 그게 옳은 방식일까. 여전히 나는 궁금하다.


… 책을 읽다 보면 머리에 지식이 가득 차는 듯한 희열을 맛볼 때가 있는데,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점점 더 모르는 상태가 지속되길 바란다. 여전히 잘되지 않지만, 책에서 읽은 것들을 세상에서 써먹고 싶어 좀이 쑤시지만, 내가 아는 게 진짜 알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한번 더 물어보려고 노력한다. 두 번 읽으면서 계속 물어보려고 한다.


모든 첫 문장은 근사하다. 왜냐하면 끝을 보았기 때문이다. 끝이 없는 첫 문장은 출판되지 못한 첫 문장이고, 출판된 모든 첫 문장은 끝이 있기 때문에 근사할 수 밖에 없다.


솔직하고 정직한 글은 무조건 좋은가. 솔직하고 정직하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가. 2016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 세월호가 침몰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을 것이다. 인간은 단순하지만 또한 복합적이므로 여러 가지 감정이 동시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 지역과 관련이 있는 A씨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의 근황을 먼저 확인했을 것이고, 안전을 확인한 후에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
A씨가 솔직하게 글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세월호에 내가 아는 사람은 타고 있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과연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이것이 최초의 감정이고 솔직한 마음이라고 해도 이렇게 글을 쓸 수는 없다. 최초의 감정에 이어 여러가지 다른 마음이 생겨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감정이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 과정을 다 거치고 나면,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에 공감하고 나면, 완전하게 솔직한 문장을 쓸 수는 없게 된다. ‘솔직하다’라는 의미 역시 달라지고 만다. 글을 쓴다는 것은 ‘최초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포털의 댓글들이 금방 재미없어지는 이유는 거기에 어떤 ‘정리’와 ‘공감’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문구나 표어를 붙여두는 것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자신의 다짐을 걸어두는 일이다. 그렇게 살고 싶다고, 그렇게 되고 싶다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못 박아두는 일이다. 그러나 다짐을 걸어두는 순간, 마음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글은 생각과 마음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지만 생각과 마음은 쉽게 지치며, 쉽게 변질되고, 쉽게 증발한다. 갈수록 글쓰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책을 많이 읽기로 소문난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나는 보고야 말았다. 그 선배가 얼마나 아는 게 많은지, 얼마나 지식 자랑하는 걸 좋아하는지, 남의 이야기를 끊으며 이야기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른 사람의 무식을 구박하며 이야기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두 보고야 말았다. 아는 게 독이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글쓰기는 독서에서 시작된다.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어떤 글을 쓸지가 결정된다. 어떤 책을 읽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도 중요하다. 아무리 새로운 책이라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다면, 그 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던 글쓰기는 점점 누군가를 의식하게 된다. 일기조차도 그렇다. 이 세상에 완벽한 혼자만의 글쓰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분리시키는 일이고, ‘나’와 ‘나를 바라보는 나’가 대화하는 일이므로 ‘나를 바라보는 나’가 존재하는 순간, 누군가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 살리에리가 어떤 곡을 작곡했는지는 아무도 관심 없다. “아, 살리에리? 알지, 평생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하다가 결국 2인자로 남은 사람이잖아.” 누군가 나를 그런 식으로 기억한다면 죽은 다음에도 정말 죽을 맛이겠구나 싶다. …
아마 많은 예술가들은 살리에리의 심정을 잘 알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신의 작품을 참고 견디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찮아 보이는 자신의 작품을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뭔가 만들어본 사람은 모차르트가 아닌 살리에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난 모차르트가 될 수 없는가 자문했던 적이 많을 것이다. 나도 해봐서 아는데, 자문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질투와 시기심을 견디며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 장진 감독의 주인공들은 함께 모여서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긴 하지만 입장은 잘 좁혀지지 않는다. 거기에서 코미디가 생겨난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실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들이다.


대화를 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문제다. 대화에는 치밀하고 자세한 논리가 없다. 오직 책을 통해서만 언어의 세세한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문장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수십 수백 번 고친다. 오해가 없도록, 오해가 적도록, 계속 고친다. 책만 읽고 대화를 하지 않는 것 역시 문제다. 책에는 반론이 없고, 피드백이 없다. 책을 무조건 신뢰하는 순간 벽에 갇히게 된다. 언어와 비언어 사이, 말과 글 사이에 인간들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로 에필로그를 마치고 싶다. G. K. 체스터튼의 말이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라면, 서투르게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나도 당신도 천재는 아니다. 천재 같은 것은 어쩌면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 우리가 만든 창작물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조차 놀라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가. 우리는 만드는 사람이고, 창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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