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계획한 주. K군도 휴가를 내고 지난주부터 뭘 할지 즐거운 논의를 시작했다.
물망에 오른 곳은 와이너리들로 유명한 오카나간, 그리고 페리를 타고 약 40분 정도 서쪽으로 가서 있는 선샤인 코스트였다.
일단 오카나간은 가는 길이 험하고 (매우 가파른 고속도로가 있는데 6월에도 눈이 와 폐쇄되기도 한다) 명물인 각종 과일 철이 아직 아닌데다가 며칠전 눈에 결국 포기해 버렸다.
선샤인 코스트로 거의 결정하고 가서 뭘할까 검색을 하는데 이 곳은 기본적으로 바닷가의 아름다운 풍경 외에는 별달리 할 일은 없었다. 그냥 숙소 정하고 가서 푹 쉬다 오는 것. 빠듯한 예산으로 가는 것이라 숙소 비용을 제하고 나면 별로 남는 돈도 없는데다가 대부분 비수기 여행의 경우 식당들도 닫고 동네도 썰렁했던 것을 기억하고 이리 궁리하고 저리 궁리하다가 결국 밴쿠버 즐기기로 낙찰. 즉 교통과 숙소에 들어갈 비용을 아끼는 대신 밴쿠버에서 그대로 지내면서 평상시엔 잘 못 가는 식당이라던가 박물관, 미술관 등을 다녀보기로 했다.
사실 밴쿠버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하고 나름 미식/문화 도시라고 하는데 서울 사람 남산 안 간다고 우리가 모든 곳을 다녀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밴쿠버 즐기기에 앞서 책을 몇권 읽어보았다. 마음에 드는 두 책 – 론리플래닛은 BC주 전체를 다루고 있지만 밴쿠버가 다이제스트로 나와있어 읽어봤는데 나름 재미있었다. 라이프스타일을 보니 BC주 사람들은 서로 라이벌 의식 없이 자기 사는 데서 만족하고 산다고 하는데 맞아 맞아.
그리고 City of Glass는 로컬작가인 Douglas Coupland (나름 유명작가로 내가 일하는 도서관 쪽에 산단다. 이 사람 엄마가 책을 빌리러 자주 온다는데 난 누군지 모른다.)가 에세이처럼 쓴 밴쿠버 소개서인데 꽤 재미있었다.
일단 엊저녁 퇴근하고 휴가를 축하하면서 간만에 외식하러 갔다. 동네 파스타 집에 가서 평상시엔 손떨려 못시키는 와인까지 한 잔씩. 파스타는 그럭저럭 괜찮았음.
오늘 아침엔 정기검진하러 잠깐 병원에 가기 위해 K군의 직장 근처에 갔다가 내가 좋아하는 커피집서 K군은 스프와 베이글, 나는 블루베리 스콘과 커피. 그리고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웨스트밴쿠버의 바닷가에 산책갔다. 여긴 내가 일하는 도서관이 있는 곳. 밴쿠버 주변에서 가장 잘 사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이다. 하긴 다운타운과도 가까우면서 저렇게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있으니 왜 아니겠어.
그나저나 우린 왜 휴가 첫날부터 각자의 직장 주변을 배회했단 말이냐.
장소를 옮겨 그리 멀지 않은 딥코브에도 갔다. 딥코브는 내륙쪽에 숨어있는 곳이라 바다가 잔잔해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월요일이라 대여점이 문을 닫았을 줄 알았는데 꼬마아이들이 잔뜩 카약을 배우러 와서 구명조끼를 입느라 분주하다. 나도 카약을 타고 싶어져 2시간 대여했다. 딸기도 함께 갈 수 있다고 해서 강아지용 구명조끼도 함께 빌렸다.
노를 저어 평화로운 바다로 나아간다. 날씨도 화창하고 기분이 참 좋았다. 양쪽으로 멋진 집들도 구경하면서 희희낙락.
그러나…
약 한시간 정도 노를 저어 멀리 나갔는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더니 바람이 몹시 불기 시작했다. 바로 카약을 돌려 열심히 열심히 저었는데 바람에 카약이 잘 나가지 않고 방향도 이상해진다.
손이 시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지고 딸기는 징징대고… 팔이 떨어지도록 노를 저어댔다. 텅빈 바다에서 쪽배의 노를 젓고 있으려니 웬지 외로웠다. 배가 생각한 대로 안 나가니 좀 무섭기도 하고…
한시간 동안 (나중엔 비까지 맞아가면서) 쉴 새 없이 노를 저어 드디어 출발지에 도착.. 흑흑흑.
휴가 때마다 사건 하나씩 생기는데 이번엔 안 떠나니 별 일 없을 줄 알았더만 결국 한 건 했다.
후들후들한 팔을 부여잡고 퇴근시간에 걸려 밀리는 고속도로를 따라 동네로 와서 어디가서 저녁을 먹을까 하다가 한국장 옆 오며가며
본 식당으로 가기로 결정. 주차하고 들어서는데 어머나 깜짝이야.. 문도 열어주고 마치 한국 백화점처럼 인사도 공손히 하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이다. 잠시 쫄음.
오늘 스페셜이라는 칵테일 벨리니와 페퍼민트 차, 작은 오징어(꼴뚜기?) 튀김, Basa라는 생선요리, 그리고 뜨거운 초콜릿이 가운데 들어있는 케익과 라즈베리시럽에 바닐라아이스크림이 곁들여나오는 디저트까지 먹었다. 음식들이 제법 맛있었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물론 자주 가서 먹지는 못하겠지만.. ㅎㅎㅎ)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나니 몸이 노골노골하다. 첫날 너무 무리해서 내일부터 앓아눕는 거 아닌지 약간 걱정은 되지만 즐거웠던 휴가 첫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