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 첫날

2003. 2. 25. 화
도착 사흘째.. 이제야 제 시간에 자게 되는 것 같다. 지금은 밤 열한시가 조금 넘은 시간.. 한국은 오후 네 시를 막 넘겼겠구나.

지난 이틀간은 피로와 시차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떠나기 전날 밤 늦게까지 보영이 명주와 수다를 떨고.. 그 이후에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잠을 못 이루었다. 한국을 별로 좋아한 적은 없지만.. 비행기 안에서 한국의 불빛이 점점 멀어져 갈 땐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것에 대한 눈물이었을까.. 피로와 슬픔으로 지칠 대로 지쳐 와인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는 연이어 대여섯 시간을 잠들었다. 일어나서는 창문을 좀 열어보니.. 북극 가까이의 아름다운 일출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고있는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깨웠더니만 남들 자는데 창문 닫으라고.. –;;; 지당하신 말씀이었지만.. 멋없어라.

도착해서는 지루한 이민 수속.
이민국 사무실에서 정착 서비스와 할 일에 대한 안내를 간단하게 받고, 사진을 다시 찍고 (너무 작다고.. 대사관에서 보내준 그림의 동그라미보다 얼굴이 작게 나오면 안되나 보다. 덕분에 비행에 지쳐서 눈 밑이 검어진 적나라한 사진이 들어있는 영주권 카드를 발급 받을 것 같다. –;;), 이민 서류(대사관에서 비자와 함께 보내준 얇은 몇 장의 서류. 이곳 사람들은 그저 immigration document라고 부르더군. 영주권 카드가 나올 때까지 이민자임을 증명해준다.)에 서명하고 사본 한 장 받고. “Welcome to Canada!”란 인사와 함께 이민국을 나와 시간이 많이 지나 다른 짐들은 다 찾아가고 바닥에 버려져 있는 우리 가방들을 들고 세관에서 공항에서의 마지막 절차를 밟았다. 딸기를 데려와서 세관신고서의 Food, Animal 난에 표시를 했더니 무슨 음식을 가져왔느냐고 묻는다. 딸기를 가리켰더니 웃으며 그 난에 X표를 치고는 pet이라 쓴다. 애완동물은 신고대상이 아닌가 보지????? 이런 종류의 신고서 작성은 언제나 어려운 것 같다.

드디어 공항을 나서서 밴쿠버에 첫발을 내디딘다. 날씨는 맑고 약간 쌀쌀한 정도. 춥지는 않다. 올해의 밴쿠버 겨울은 평년과 많이 다르다고 한다. 비도 많이 안 오고 맑은 날씨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다행한 일이다. 햇빛이 있는 날은 왜 그런지 기분이 밝지 않은가. 막 도착한 우리에겐 밝게 빛나는 해가 고마울 뿐이다.
한시간이 넘도록 기다리신 (감사..) 남편의 선배와 함께 점심을 먹고 (포호아가 맥도널드처럼 여러 나라에 있는 체인이었나 보다. 여기서 밥을 먹었다.) 숙소로 와서 짐을 풀었다.
우리가 묵을 Apricot cat & black dog B&B에선 여기서 Sara(B&B 주인)을 도우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 일본인 게이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정말 Black dog Maya가 있다. 큰 개지만 순하고 예쁜 까만 눈을 가지고 있다. Apricot cat은 이제 없다고 한다.) 비수기인 덕분인지 고맙게도 2층 방 세 개가 모두 비어있어서 햇빛이 잘 드는 남향 방을 골라 잡을 수 있었다. 숙소는 상당히 깔끔하고 마음에 든다. 물론 우리에겐 비싼 숙소지만 처음이라 낯설고 지친 우리를 푹 쉬게 해줄 것 같다. 다운타운에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 마음에 든다.

선배는 가시고 우린 차이나타운에 가서 전화카드를 사고 오는 길에 가게에 들러 저녁으로 먹을 빵과 살구잼을 샀다. 잔디가 많은 길에 딸기를 걸렸더니 정말 살 판 났다. 이곳 저곳 킁킁거리며 신나게 걷는다.
일단 집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알리고(전화요금이 상당히 싸다. 중국 전화카드를 샀는데 약 8천원으로 한국에 280분이나 전화를 걸 수 있다. 1분에 30원 꼴이라니.. 거의 시내 전화 수준 아닌가. 여기에 많이 사는 중국인들에게 감사를. 그리고 이곳은 대부분 시내전화가 정액제 요금이어선지 숙소에서도 시내전화는 자유롭게 쓸 수 있어 좋다. 게다가 휴대폰도 시내전화 값이라 역시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씻고 저녁을 먹고는 방에 돌아오니 7시. 남편과 잠시 얘기를 나누다 곧바로 잠에 빠져들어 한밤중에 깼다. 아.. 불면은 괴로워. (늘 잘 자는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평상시 잠을 잘 못자는 남편이 화를 내겠지만.. 특히 여행 중에 잠을 잘 못자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겁이 많은 나는 화장실도 못 가고.. 배가 고파져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아래층 부엌에 내려가지 못하는 것이다. 계속 두 가지 괴로움을 참으며 날이 밝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괴로움이란.. 흑..)
하지만 마침 남편도 깨서 글도 쓰고 얘기도 나누다가 세시가 넘어 다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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