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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의 힘 – 경계선 (2018)

결국 <경계선>을 보고 말았습니다. 뭐, 사실 <성스러운 거미>를 보자마자, 그리고 ‘왓챠’에 이 영화가 있다는 걸 알자마자 보려고는 했었는데 무슨 일인지 선뜻 손이 안 가더라구요. 시차 적응을 위해서 밤에 영화 보는 걸 자제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축구 게임에 열중하느라고 그랬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리스트에만 넣어두고 번번이 건너뛰기를 한 달째. 결국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이 감독 영화는.

도대체 얼마나 장르의 규칙에 정통해야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걸까요? 관객들을 ‘확신범’에 공감하게 만드는 ‘지독한 연출력의 힘’. 그 이상도 이하도 표현을 못 하겠습니다. <성스러운 거미>에서는 여성을 납치 살해하는 치졸한 연쇄 살인범을 신실한 무슬림으로 그려요.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독실한 신자라는 이유만으로는 그의 살인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할 거예요. 이건 감독도 잘 알죠. 하지만 여기에 감독은 살인범의 아내, 아이, 그리고 사과라는 소품을 이용해서, 그리고 서스펜스 장르물의 관습을 능숙하게 버무림으로써, 관객들은 어느새 혹시나 살인범이 잡히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내게 됩니다. 살인범이 내세우는 명분에 감화된 것이 아니라, 단지 장면 구성과, 연출, 편집 만으로 말이죠. 히치콕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서스펜스는 관객이 알고 있는 어떤 사실을 등장인물이 모를 때 발생합니다. 비단 스릴러 장르물이 아니더라도, ‘박해영’ 작가의 <나의 아저씨>에서도 아내의 외도가 가족들에게 들킬지, 자신의 절망이 주변 사람들에게 들킬지 걱정하는 이선균에게 시청자들은 공감하고 서스펜스를 느낍니다. 그리고 <성스러운 거미>에서는 남편이 방금 살해한 여성의 시체를 아내가 발견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장르물에 익숙한 관객들은 서스펜스를 느끼고 살인자 남편과 공감합니다.

전작 <경계선>에서도 바로 이런 장면 구성과 연출의 힘이 관객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합니다. 일단 주인공 ‘티나’는 타인의 비밀을 발견하는 걸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는 초능력적인 후각을 통해,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사실을 발견하는 스페셜리스트입니다. 하지만 영화 시작 후 처음 몇 분 동안 관객은 티나의 평범하지 않은 외모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곧, 외모로 인해 주인공이 겪고 있는 무례함을 목격하면서 아마도 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회 영화일 것이라는 짐작을 갖게 되는 거죠. 그리고 <노트르담의 꼽추>와 <미녀와 야수>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 와서 그런지, 관객들은 그로테스크한 외모로 인해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주인공에게 자연스럽게 감화되며 자신이 극 속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으로 파렴치한 범죄를 적발하게 되면서 더욱더 강화되는데, 이때부터 관객은 주인공과 동일시된 자신이 사회 정의 구현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일반 장르 영화처럼 감상할 준비가 되어갑니다.

티나의 동거인 ‘롤랜드’는 아마도 개를 이용한 사업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투견 대회와 같은 개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사업에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개들은 오히려 그에게만 충성하고 티나에게는 적대적입니다. 인간의 진화와 거의 같은 시기를 거쳐서 진화해 온 개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이용을 당하든 실험을 당하든, 자신을 키워주고 먹이를 주는 인간과 더 친밀함을 보여줍니다. 늑대의 얼굴을 닮은 티나를 향한 개들의 과격한 대응은 영화 중반까지의 티나의 고독을 더욱더 깊게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또 다른 주인공 ‘보레’의 등장으로 크게 회전합니다. 범상치 않은 ‘보레’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그리고 ‘보레’와 ‘티나’의 관계를 통해, 이제 영화는 ‘사피엔스 인간’들이 지구 먹이 피라미드의 최정점으로 살면서 얼만 독선적이고 이기적으로 살아왔는지, 그로 인해 지구가 얼마나 망가져왔는지에 대해 논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크게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죠. 단지 장르 간의 융합과 변이를 거친, 그리고 깊은 생각을 담은 그냥 웬만한 수작 정도로 보입니다. 박찬욱의 영화 <박쥐>에서도, 그 이전의 만화 <기생수>나 다른 몬스터 영화에서 한 번쯤은 다룬 소재입니다. 하지만 감독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 인간 사회 기준으로 봤을 때 혐오스럽고 역겨운 최악의 범죄에 연관된 ‘보레’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은 순간적으로 방향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정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영화는 ‘티나’의 선택과 ‘보레’의 선택 중 그 어떤 것의 제대로 된 결말도 없이, 그렇다고 피해자 부부를 위로하거나 그들의 회복을 보여주거나, 정의를 집행하는 것도 없이, 이야기를 ‘뜩’하고 끝내버립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방식은 <성스러운 거미>와 이 영화가 서로 다른 점입니다. <성스러운 거미>의 경우 감독은 열린 결말 속에서 묵직한 질문만 던지고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떤 영화보다 선명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치밀한 구성과 연출로 관객들을 한구석으로 몰아놓고는, ‘자, 이제 당신이 선택할 차례!’라고 시치미 뚝 떼며 말하는 감독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자칭 ‘독실한 종교적 신념’으로 살인을 했던 살인자가 죽음 앞에서 비굴하게 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의 아들이 먼저 간 아비의 유지를 잇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모습 역시 숨기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누구나 이런 여성 살인 문제가 광신도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한 사회의 집단 마취를 통해 발생하는 거라고 말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모를 수 없습니다. 그 잔소리가 불편하지 않은 건, 단지 그가 말하는 방법이 무척 세련되어서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세련됨에는, 집요한 연출력으로 영화 내내 관객이 허당끼있는 가해자에게 공감할 여지를 두었다는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반면 <경계선>에서는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찜찜함이 남습니다. 보레가 관련된 범죄가 현재 전 인간 세상이 가장 혐오하는 범죄이기 때문이죠. 만일 보레의 공격 대상이 정치가나 기업가, 혹은 차별적 행동을 서슴지 않는 백인 남성이었다면, 보레의 행동에 갈채를 보내는 관객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구인을 공격하는 판도라 행성 주민을 보고 박수를 보내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감독은 보레가 가담한 범죄에 아주아주 극단적인 설정을 둠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보레에게 다시 감화되는 일이 쉽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인간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범죄가. 다른 세상에서도 같은 기준으로 판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현재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사피엔스 인간 사회에서 만든 도덕 기준을, 다른 생물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