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와서 한동안 소매업종에서 일할 때는 직장 동료 중에 어린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북미에서는 대학교에 진학할 때나 취업을 할 때, 고객 서비스 업종 근무경력이 꽤 중요하게 평가를 받기 때문에, 보통 용돈도 벌 겸 소매업이나,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많이들 알바를 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끼리 어울릴 때에는 그곳 고딩 문화를 그대로 갖고 와서 격렬하게 장난을 치곤하더군요. 세계 어디를 가나 전두엽이 아직 덜 발달한 상태에서 인생 실전 경험이 적은 중고생들이 가장 과격한 법이잖아요.
그날도 이민 1세대 중년 노동자로서 피곤한 몸을 직원 휴게실 소파에 기대 누워 있었을 때입니다. 애들이 와서 장난을 걸더군요. ‘핫. 참. 이놈의 동안(童顔)을 어쩔 거야. 정말 미소년은 피곤하구나’하는 심정으로 받아줬어요. 한국이나 캐나다나 중고딩 남자애들이 쓰는 비속어에는 성(性)과 배설물이 빠지지 않더군요. 근데, 한국 중고딩 때 썼던 창의적인 욕설 (예 – 닝기미.. 어이구 이런 좆밥 새끼들이 어서 지랄 옆차기여. 크아아아악 퉤, 가래침으로 마빡에 콱 빵꾸를 내뿔릴랑께)을 영어로 번역해서 반박하려니… 참 피곤하더라구요. 그리고 또, 욕이라는 게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줄줄줄 나오지 않고, 조금이라도 버벅대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물리력을 동원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제법 놀란 표정이었어요. 장난을 쳤는데 다큐로 대응을 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80년대 위성도시 중고딩들이 즐겼던 장난스러운 스킨십을 좀 한 것뿐이었는데 말이죠.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굳은 표정을 한 채로 다시 소파에 누운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때 당시, 2000년대 초 밴쿠버 남자 고딩들이 장난으로 즐겨 쓰던 호칭은 ‘호모’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현장 기능공으로 일할 때에도 남자 직장 동료들끼리 장난으로 쓰던 호칭이 ‘호모’였던 걸로 봐서는, 이게 딱히 소매업종에서 알바하는 사람만 사용하는 (장난) 욕설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서는 좀 신선했어요. 요즘 한국 중고딩들도 그러는 것 같은데, 80년대 한국에서 중고생 시절을 보낸 남성들이 친구들끼리 쓰는 (장난) 욕설은 보통 ‘미친새끼’, ‘병신새끼’였거든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는 뿌리 깊은 장애인 차별의식이, 북미 서구에서는 뿌리 깊은 동성애자 차별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욕설을 북미만큼 친구들끼리 장난으로 쓰지 않았던 건, 동성애자 인권에 대한 논의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요.
태국은 불교 윤회 사상을 많이 믿기 때문에 성전환자에 대한 인식이 더 관대하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사상이 지배적인 북미나 서구 유럽에서 먼저 동성애자 인권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아마도 시민혁명 이후 집단의 행복보다 개인의 행복을 더 우선하는 ‘개인주의’라는 것이 사회적 합의로 되어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겠죠. 또, 기독교 전파 이전인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에서의 동성애에 대한 기록도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지식인들에게는 거부감이 좀 덜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더라 하더라도, 자기들과 생태나 행동 면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집요한 공격 행위는 예전부터도, 그리고 지금도 많이 존재합니다. 서양은 개인주의와 동성애 문화뿐 아니라 ‘마녀 사냥’의 전통 역시 가지고 있으니까요.
런던 프라이드 (Pride, 2014)
제작 : BBC Films, Canal +
배급 : 20세기 폭스, Pathé
각본 : 스티븐 비어스피드
연출 : 메튜 워쳐스
출연 : 밴 슈네처, 조지 맥케이, 앤드류 스콧, 빌 나이, 이멜다 스턴톤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1984년 마가렛 대처의 집권 시절에 석탄노조 파업을 지원했던 레즈비언 / 게이 활동가들의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고 해도 각색이 좀 많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영화는 전형적인 휴먼스토리 – 성장물의 플롯을 답습합니다. 사회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만큼 ‘함성’이 있고 ‘선동’이 있고, ‘합창’도, ‘분열’도, ‘패배’도, ‘재회’도, ‘행진’도 다 포함합니다. ‘브롬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조’가 런던의 레즈비언 / 게이 활동가 그룹을 만나면서, 갖은 모험과 고난, 그리고 개인적인 성장을 통해서 한 명의 어엿한 활동가로 거듭난다는 이야기는, 오비완 케노비를 만나 루크가 한 명의 제다이로 성장하는 스타워즈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 보면, ‘음… 이쯤에서, 한번 갈등이 있겠네’, ‘아.. 저 사람은 나중에 포섭되겠구먼’ 하는 식으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정도예요.
하지만, 사회적 차별이나 정부의 탄압과 같은 거대한 힘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물과 기름처럼 겉돌던 성소수자와 마초 광부들이 단합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감동을 주는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사건이라는 점에서 감동은 더 증대되죠. LGSM (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광부를 돕는 게이 / 레즈비언 모임)의 리더 격인 ‘마크’가 광부 파업에 지지를 결정한 것은 어떠한 이해타산도 없이 순전한 동정심이나 측은지심 때문이었습니다. 사회와 공권력의 탄압을 줄곧 겪어 왔던 성소수자 그룹들만이, 현재 공권력의 타깃이 되어있는 광부노조 파업을 도울 수 있다는 의도였죠. 이처럼 짝사랑과 같았던 연대의식은 이후 성소수자 권리의 대한 정책 입안으로 돌려받게 됩니다. 영화의 말미에서 “이후, 영국 노동당 강령에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조항을 포함하는 것이 투표로 통과되었고, 이는 전국 광부 노조의 압도적인 지지에 힘입었다.”라는 자막까지 보게 되면 눈물까지 나올 정도였어요.
1984년은 서구사회에서 AIDS에 대한 공포가 시작되던 즈음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남부와는 달리 북미 유럽 국가들은 병원 내 위생이 철저했었고, 또 원숭이 고기를 가공하거나 섭취하는 일도 적었으니, 대부분의 AIDS 환자들은 남성 동성애자들 그룹이나 성매매자들이었죠, 혹은 그들에게 감염된 사람이든지요 (https://www.cdc.gov/hiv/basics/hiv-transmission/ways-people-get-hiv.html). 영화에서도 탄광 마을의 한 주민이 자신들을 돕는 기금을 마련해온 LGSM 멤버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걸 거절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AIDS 감염을 걱정하면서요. 뭐 실제로, LGSM의 ‘마크’도 AIDS로 인해서 20대의 나이로 요절했고, 주요 멤버였던 ‘조나단’은 영국에서 최초로 AIDS 진단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영화 제작 시까지 30년 넘게 생존했습니다). 이렇듯 과학적 근거나 사회적 논의와는 별개로, 현실적으로 동성애와 AIDS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받아들여졌죠. 80년대부터 2022년 지금까지 계속해서 말이죠.
일단,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위해서 이후부터는 HIV (인간 면역 저하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AIDS (후천적 면역 결핍 증후군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는 문자 그대로 어떤 증상을 말하는 것이지 병명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성매매자들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왜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HIV 감염률이 높은 걸까요? 현재까지 분석에 의하면 항문의 점막이 질의 점막보다 약하고, 배설기관이기 때문에 위생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동성애자와 HIV 감염을 연관시킬 때, 항문성교를 주로 나누게 되는 남성 동성애자 (게이) 집단을 지목하게 되는 것일 텐데요. 이때 여성 동성애자들이라든지, 다른 성소수자들(주1)까지 싸잡아 손가락질하는 것은 좀 너무 무지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이쯤에서 “도대체 왜 저들은 생식기관이 아닌 배설기관을 이용해서 섹스를 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섹스가 ‘생식’이라는 생물학적 목적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 피임이나 매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일이잖아요. 결혼한 부부에게 있어서 외도가 금기되는 것과는 별개로, 미혼들에게 섹스는 친교 행위나 성욕 및 스트레스 해소, 맨몸 운동과 같은 다양한 용도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용도만큼이나 (지적 판단력과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진 성인의 상호 합의하에) 다양한 성행위가 존재하는 것도 인정해야겠죠. 그게 질 삽입이 되었든, 구강 삽입이 되었든, 항문 삽입이 되었든 말이죠. 그리고 비교적 쉽게 파열되는 항문 점막은 게이들에게 있어서 주된 HIV ‘감염경로’이지, 그 자체로 HIV를 생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콘돔을 사용한다면 HIV 전파를 막을 수 있다는 얘기죠.
또 다른 질문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성애자들에 비해 동성애자들의 감염률이 높은 건 왜 그런가?” 하고 말이죠. 이 질문에 생물학적인 정답은 없을 것 같아요. 게이들의 유전자에서 공통적인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은 이상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없는 이상), 그들의 행동양식을 보고 몇 가지 가설만 세울 수 있겠죠. 제가 생각하는 첫 번째 가설은, 성적 소수자들이 생래적으로 더 성에 관심이 많고, 자유로운 성적 활동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스젠더 (Cisgender : 출생시 부여된 생물학적 성정체성과 정신적 성정체성이 동일한 사람) 이성애 중심의 사회의 탄압을 각오하고, 금기시되는 성적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수많은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출생 시 주어진 성을 스스로 변경하려 하는 것 아니겠어요?.
예를 들어, 80년대 대학가에서, 굴절된 사회 현실에 분노했던 많은 대학생들이 학생운동에 동참했었는데요,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 생각으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운동에 참여했었다고 기억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80년대 학번 중에서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학생들은 그냥 면학에 열중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취업준비를 하기도 했었죠. 그들이 이기적이거나 출세 지향적이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학생운동을 지휘하던 사람들에 비해서 정치에 관심이 적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게 정말로 그냥 정치가 싫어서든, 본인 앞가림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서든 말이죠.
반면에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더 나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꿈꾸면서 사회문제를 심지어 (당시에는 금기시되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 방면으로 접근하고 분석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들 80년 학번 세대들은 여전히, 그 이전이나 그 이후 세대들에 비해 훨씬 현실 정치에 관심이 많고 참여적이기도 한데요,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정치병 환자라고 조롱하거나 비난하기는 힘듭니다. 이들의 취향이나 열정이 타인의 자유나 존엄성, 인권을 방해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성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동성애자들의 성적으로 자유로운 행태를 비난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가설로는 이들의 성적 교제가 결혼과 같은 공인된 제도, 혹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보다, 음지에서, 보건 / 위생이 철저히 관리되지 못하는 장소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990년대에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방송에서 취재했던 한국 남성 동성애 그룹의 명소들이 있었죠. ‘파고다 극장’이나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같은 상당히 공개된 장소였어요. ‘일반인’과 대조적으로 스스로를 ‘이반’이라고 칭하며 멸시와 차별을 감내했던 한국 게이 그룹에게 있어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발현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1980년대의 런던도 마찬가지였겠죠. 폐쇄적이고 은밀한 장소, 자연스럽게 위생 관리에 있어서 비교적 열등했던 장소에서 그들의 성적 교류가 이루어졌으리라 짐작합니다.
몇몇 유럽 국가나 캐나다와 같은 나라에서 국가차원에서 동성부부 가정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들의 성활동을 (그게 진정 옳은 일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사회 규범의 테두리 안에 보호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됩니다. 게이들의 비밀스러운 성행위를 일부일처제 가정의 틀로 묶어둠으로써 성폭력 위험에 대한 노출을 줄이고 게이그룹 중심으로 전염되는 성병 확산을 한 가정 안으로 봉쇄하는 기능이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국가차원에서 엄청난 인적자원을 고스란히 확보하려는 의도도 물론 있습니다. 아시죠? 프랜시스 베이컨, 아르튀르 랭보, 록 허드슨, 앤디 워홀, 프레디 머큐리, 팀 쿡(애플 CEO) 모두 게이입니다.
이런 모든 국가 / 사회적 노력으로 예전에 비해 HIV 전파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https://www.unaids.org/sites/default/files/media_asset/Annual_Progress_Report_HIV_Prevention.pdf), 그래도 여전히 서구 유럽 사회에서 HIV의 주된 전파경로는 게이 그룹입니다. 그리고 2022년 현재, 전 세계적인 ‘원숭이 두창 (Monkey Pox)’의 확산에 있어서도 게이 그룹이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걸로 지목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구요 (https://www.who.int/news/item/25-05-2022-monkeypox–public-health-advice-for-gay–bisexual-and-other-men-who-have-sex-with-men).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한 번쯤은 보드 때문에 팔이 부러진다고 해서, 그들을 의료 서비스 과부하의 원인으로 비난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얘길 들으면 보통 “거봐. 내가 스케이트보드 위험하다고 했지?”라고 한 마디하고 그만이겠죠. 팔이 부러지는 일이 AIDS나 원숭이 두창처럼 전염성이 없어서 그런 것일 겁니다. 만일,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나와 공도에서 교통을 방해하고 사고를 유발한다면 그 역시 비난을 받게 될 테구요.
그렇다면, 게이 그룹을 중심으로 성행위를 통해 전파되는 전염병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1980년대부터 게이 그룹이 마치 AIDS의 사신인 것마냥 여론을 조성하고 사회적으로 비난해왔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항문 섹스를 멈추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성적 교류가 더욱더 음지로 숨어 들어가, 공권력의 관리 바깥에서 AIDS 환자가 늘기만 했었죠. 그러면 항문 섹스를 법적으로 금지해야 할까요? 근대 시민사회에서 개인의 성행위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터부시 되어 왔잖아요. 때문에 한국 역시 2000년 대에 들어서 간통죄를 없앤 것이겠죠.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많을 겁니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사회 차원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함으로써 그들이 당당히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하는 방법입니다. 사회적 낙인 없이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하게 되면, 일부일처제라는 근대사회의 약정 안에 규범적으로 가둬 두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할 테고요, 감염이나 발병여부 파악도 더 정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항문 섹스에 콘돔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공론화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여론 조성이나 사회적 합의에 대한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겠죠.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미국식 기독교 단체들과 사회 보수 기득권층의 만들어낸 여론이 매우 공고합니다. 그나마 있는 자유로운 성행위는 대개 남성들이 음성적으로 여성의 성을 매수하는 유흥업소에서만 있는 형편이고요.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 안에 항상 들어가는 한국이 사회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전근대에 머물려고만 하는 것은 좀 안타깝습니다.
때문에, 사회에서 나이, 성별, 피부색, 종교, 사상, 은행 잔고, 출신 지역 등으로 그동안 차별받아왔던 모든 사람들이 힘을 모아 차별 금지법 입법을 지지하는 것으로 사회 통합을 위한 첫 단추를 마련해야 합니다. 각자의 입장이나 처지가 다르고, 무슬림이 동성애자들을 지지할 리가 없고, 동성애자들 중에서도 무슬림을 싫어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연대가 되겠냐구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른 사상을 반대하는 것과, 나와 다르다고 해서 차별을 용인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니까요. 그리고 한국 시민들은 이미 평화로운 시위를 통해 정권을 교체한 경험이 있잖아요. 영화 속에서 도노반의 연설처럼 “훨씬 더 크고, 더 강한 적과 맞서 싸우느라 지칠 때, 우리가 그동안 그 존재를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사실 우리의 친구였고, 아군이라는 걸 발견할 때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누이는 종종 저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야. 연극하는 사람들은 술 마시면 웃고, 떠들고, 어깨동무하면서 춤추고, 노래하고 그러는데, 왜, 영화하는 놈들은 술만 마시면 그렇게 쌈박질을 하는 거냐?” 예전에는, 누이의 저런 말이 연기자로서 자부심에 가득 찬 편견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왠지 이해가 갈 것도 같습니다. 아무래도 자신의 몸뚱아리를 움직여 가면서 즐거움을 찾는 활동이, 앉아서 비디오만 보거나 인터넷 검색만 하는 것보다 사람 생각을 더 건전하게 만드는 것 같거든요. 타인과의 교제도 더 부드럽게 할 수 있는 것 같구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만연한 세대 간의 갈등이나 성별 갈등이라는 것들이, 어쩌면 섹스가 모자라서 그런게 아닌가라고도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물론, 2~30대 청춘들이 자유로운 사랑을 나누기 위한 사적인 공간 하나 마련하는 일도 힘들게 만드는 미쳐버린 한국 부동산 가격도 한몫을 하는 것이겠지만요.
“과연 누가 변태인가. 꼴리면 하고, 땡기면 살고, 싫어지면 헤어지는 그들이 변태인가. 돈 때문에 하고, 계급 때문에 살고, 싫어져도 못 헤어지는 우리가 변태인가. 정말이지 누가 더 변태인가”
주(1) : 시스젠더 (Cisgender : 출생시 부여된 생물학적 성정체성과 정신적 성정체성이 동일한 사람) 이성애자와 구분해서 말하는 이른바 성소수자들 그룹을 부르는 명칭은 현재 ‘2SLGBTQIA+’로, 다음과 같은 성소수자들을 포함합니다 : 2Spirit,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er, Questioning, Intersex, Asexual, + Pansexual, + Agender, + Gender Queer, + Bigender, + Gender Variant, + Pangender. 앞으로 이런 성소수자들이 별도의 명칭으로 따로 구분되지 않고 부모에게 부여받거나 자신이 선택한 이름을 가지고, 각자의 존엄성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불리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