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tligeist – 고스트 스토리

서양권에도 지박령이라는 개념이 있는지 한 번 찾아봤더니 있더군요. Residual + Ghost 를 독일어 식으로 표현한 근사한 단어가. 근데 사실 생각해보면 원래 서양 귀신들은 대부분 지박령이잖아요. 인간과 완전히 다른 생명체인 뱀파이어나, 인간이 만든 새로운 피조물인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 (Monster) 말고요. 흔히 Ghost라고 하면 대개 낡은 집 (Haunted House) 이나 어느 구조물에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아니면 아예 공동묘지라든지 말이죠. 영화 첫 부분에 서 C의 유령이 병원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M이 떠난 후에도 그 집에 계속 머무는 것이 처음엔 좀 이해가 안 갔었는데, 애초에 서구권에서 Ghost를 생각할 때 원래 집에 짱박혀 있는 혼령이라고 생각해보니 또 납득이 가기도 하더라구요.​

병원 벽에 나타난 천국의 계단을 우정 지나치고, M과 함께 한 동안의 추억 (C 말로는 역사 history)을 만든 집으로 돌아 온 C에겐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솔직히, 영화에서 보여진 것 만으로는 그닥 공감이 가지 않았어요. 연 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현세에서 사는 게 충분히 피곤해요. 뉴스를 보면서 매일매일 분노와 무력감을 동시이 느끼고, 계속해서 내가 물성을 유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지 회의가 들어요. 만일 급작한 사고를 당해 세상을 뜰 경우, 누군가가 이 집을 정리할 때 부끄럽지 않도록 항상 소지품 정리에 신경 쓰고 있어요. 물론 현세에서 충족되는 욕망도 있긴 해요. 맛난 음식을 먹을 때라든지 좋은 사람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라든지, 재밌는 영화나 만화를 보는 일도 빼놓을 수가 없죠. 하지만 그런 일들은 꼭 우리 집이 아니더라도 가능하거든요. 전 욕망을 충족하러 한데 나가서 잠을 자는 사람이잖아요. 근데 C는 도대체 왜 돌아온 걸까요? 아니, 모든 지박령들은 무슨 미련이 남은 걸까요? 사람이나 관계가 아니라 땅과 터전에 미련이 생기는 이유는 어떤 건지, 맨날 어딘가로 떠날 궁리를 하는 지금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어요. ‘집’ 이라는 건, 분명 누군가에겐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말이죠.

​심지어 영화에서도 시종일관 땅에 미련을 두는 것에 대해 비관적으로 말을 해요. 간신히 미 서부에 자리를 잡은 신규 청교도 정착민들의 캠핑 장면 바로 다음 날 원주민의 습격으로 보이는 참극의 현장을 붙힌다든지, 어느 파티에서는 지구라는 행성의 유한성에 대해 설교하는 사람 (딱 봐도 목수로 보이는)이 나와요. 그가 생각하기로는 문명이나 예술조차 수명을 가지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C가 옛 집 터에 계속 눌러앉아 있는 이유는 뭐죠? M이 남긴, 정체도 모르는 쪽지를 파 내기 위해? 문명과 예술과 지구가 소멸해도, 언어와 의지는 연결된다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요? 제발 ‘사랑’이라고 만은 말하지 말아주세요. 왠지 이도 저도 안 풀릴 때 냅다 던지는 조커 카드 같아서 사랑이라는 얘길 들으면 마음이 헛헛해지거든요.​

왜 그런 구절 있었잖아요? 칼 세이건인지 스티븐 호킹인지를 인용하면서, ‘육체가 영혼을 규정하는 건 오직 우리 우주 안에서에 한한다’ 얼추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전 너무 공감했던 거 있죠. 저기서 ‘우리 우주’ 라는 건 그냥 ‘우리가 살고있는 차원’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아요. 20대 때는 골수 유물론자로 산 적도 있었지만, 나이가 먹을 수록 왠지 영혼은 육체와 별개의 존재가 아닌지 생각이 들거든요.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도,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비슷한 얘길 하고 있죠. 지구의 생명체들이 물 속 단세포 생물에서 진화를 거듭하다가 결국 물 밖으로 나온 것처럼 언젠가는 인류가 지구의 우주 밖으로 나오게 될 텐데, 그 때의 모습은 어떨 것인가.. 하는 질문 말이에요. 그리고 그들의 대답은 모든 지구인들의 의식이 하나로 뭉쳐진 거대한 의식체였어요. 근데, 저런 얘길 들을 때마다, 어쩌면 바로 지금도 수많은 의식들이 지구 밖으로 나가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거든요. 그게 죽음의 의미라면, 뭐 또 그렇게 아쉬운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나’라는 개체의 개성이 매몰되는 건 좀 아깝지만, 또 누가 알아요? 그렇게 또 다른 차원에서 하나의 거대한 의식체 속에 존재하더라도 꾸준하게 안 웃기는 농담하고, 방구 뿡뿡뀌고, 박치기하고 있을지.

덧. 전통적인 서양 유령의 형상을 생각했을 때, 침대 시트를 소품으로 쓴 건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밖에 할 수 없어요! 단돈 1억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모두 제작진들의 참신한 발상 덕택이겠죠.

우리 귀신들에게는 무슨 소품을 쓸 수 있을라나요? 중국 강시들 같은 경우는 죽은 시체들 마다 스카이 콩콩이 배정되는 걸로 할까요? 그럼 우리 귀신들은? 목발을 주면 어떨까요? 귀신들 마다 목발을 짚고 절룩이면서 뛰어다니는 거예요. “내 다리 내놔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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