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토피노 1

BC ferries 의 RV 승선료 할인 혜택을 받기 위해선 집에서 늦어도 6시에 출발해야 했다. 엊저녁 퇴근하고 갑자기 고기가 무척 마려워진 탓에 평소엔 하지도 않던 테이블 바베큐를 하고 나서, 곧바로 엄청난 후유증  (기름 청소, 새까맣게 타버린 그릴 설거지 등)을 겪고, 출발 직전 이래저래 준비하다 보니 아주 늦게서야 잠에 들었다. 또 새벽에 짐을 옮기느라 4시반에 일어 났더니 잠이 너무 부족한 상태다. 일기예보대로라면 오늘 비가 많이 오기로 되어 있고, 게다가 토피노로 가는 4번 국도는 (지형으로나 기후 변화로나) 험난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운전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일단 페리를 잡으러 뛰쳐나가 본다.

항구로 가는 밤길은 언제나 두근두근

17번 국도 덕에 델타 남쪽 트와슨 페리 터미널로 가는 길은 매우 쾌적하다. 터미널에 줄 서 있는 차량들을 보니 역시 놀러가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들이 즐비하다. 여름 휴가 시즌이 끝나고 대부분의 학교는 개학을 했다. 가을로 들어가기 초입, 그리고 밴쿠버의 그 유명한 비오는 겨울이 슬슬 시작되는 것 같은 이 시기에 굳이 우리처럼 휴가를 가는 사연들은 어떤 것일까? 몸이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무겁다. 와인 탓인가? 뜨근한 물에 손을 씻으니 온 몸이 시원해진다. 아.. 감기구나.. 휴가 첫날 감기라니… 이번에도 완벽한 휴가가 되겠네. 곧이어 페리가 도착하고 트레일러를 달고 다닌 탓에 늦게 탑승했더니 이미 선내식당에는 길게 줄이 서있다. (그리고 그 줄은 쉽게 줄지 않는다. 패스트 푸드 레스토랑이라 할지라도 서양식 아침을 주문할 땐 이것 저것 추가하고 빼고 하는 등, 주문 과정이 점심 식사 주문보다 장황하기 때문이다) 델타에서 밴쿠버 섬으로 가는 항해 시간은 약 2시간 남짓. 하지만 줄 서고 밥 먹고 하는데 1시간 반을 써버린다. 이럴줄 알았으면 미리 한 숨 자고 나서 밥을 먹을 걸 그랬다.

15분 정도 꿀잠을 자고 나서 다시 운전대를 잡는다. 밴쿠버 섬 듀크 포인트 터미널에서 토피노까지 200km 남짓.  하지만 악명높은 4번 국도 탓에 한 3시간 정도 걸릴 예정이다. 포트 알버니를 지나치자 회전이 가파르고 낙차가 큰 도로가 슬슬 튀어 나온다. 거기에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이쿠.. 그래도 지난번 사고의 경험도 있고 하니 엉금엉금 기어 가 보면서, 군데군데 금룡반점이나 써프정션처럼 예전 여행의 추억이 담겨진 곳을 보고 반가와 하기도 한다.

마침내 도착한 그린포인트 캠핑장. RV 캠핑을 하다보면 캠핑장 입구에서 반드시 물을 채우게 되는데 이것도 제법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캠핑장에 따라서 수압이 센 곳도 있고 골든이어즈 처럼 한번 물을 채우는데 30분 가량 걸리는 곳도 있다. 입구에 도착하니 관리요원이 아주 심드렁한 얼굴로 며칠 전에 근처에서 곰 두 마리가 발견되었으니 캠프 사이트를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라고 한다. 어느 캠핑장에 가도 저 놈의 곰 두 마리는 항상 레퍼토리구나. 정말로 곰이 항상 두 마리씩 다니는 건지 아니면 연방정부나 주정부 차원에서 캠퍼들에게 경고하는 시나리오가 하달되는 건지 알 수가없지만.. 결국 캠핑일정 내내 비가 하도 와서 트레일러 밖에는 의자 조차 꺼내놓지 못하는 상황이긴 했다.

토피노엔 Pacific Rim 이라고 해서 트래킹 코스로 가득찬 국립공원 구역이 있는데, 롱비치 해변 중간에 Green Point 라고 하는 캠핑장도 만들어 두었다. 해안까지 접근이 쉽고 (그래도 다른 롱비치 주차장보단 진입로가 길어서 서퍼들에겐 인기가 별로 없다), 화장실 시설이 완전 신삥이고.. 국립공원이니 당근 전기 들어오고.. 주립공원에 비해 예약비나 숙박비가 싸고…등등 아주 쾌적한 캠핑장인데 예약하기가 좀 힘들다. 그래서 보통 직장 상황은 깡그리 무시한 채, 연초에 캠핑 계획을 미리 잡아 두는 그런 경우가 생긴다. 이번엔 뒤늦게 예약을 걸어두느라 35번 사이트에선 오늘 하룻 밤만 신세지기로 했다. 캠핑장에 도착하니 비가 잠시 개었지만, 어짜피 밤새 비가 올 예정이고, 하루만 있다가 옮길 터이니 비차양 같은 건 포기하고 간단하게 트레일러만 설치하기로 한다.

당초엔 트레일러 설치 후 일단 눈 좀 붙일 요량이었지만, 막상 잠깐이나마 비가 멎고나니 이때다 싶어 계획해둔 트레일러 정비를 시작한다. 캠핑 트레일러도 결국 살림인지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데, 우리 같은 경우 평소엔 지하주차장에 주차해 두기 때문에 집에서는 관리가 어렵고, 이렇게 한번 나와야지 뭔가를 할 수 있는게 있다. 먼저 지난 2년간 열심히 일을 해준 정수기 필터부터 교체하고, 그리고.. CH741 열쇠… 북미에서 만든 RV의 70퍼센트 이상이 같은 사물함 열쇠를 사용한다니 믿어지는가? 말하자면 내 사물함 열쇠로 다른 사람 RV의 사물함을 쉽게 열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열쇠야 그럼.. 쇳대만도 못한 거지.. 참.. 나.. 만일 당신의 사물함 열쇠에 CH741이라고 쓰여 있으면 당신도 잠재적 도난 피해자 당첨!  암튼 이 사실을 알고 당장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무려 수십군데에서 CH741 열쇠 교체용 실린더 키트를 판매하고 있었다. 겸사겸사 나온 김에 트레일러의 모든 사물함 열쇠 실린더를 교체했고.. 이러다 보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잠도 잘 못자고, 어젯밤에 이발도 하고… 새벽부터 반바지 차림으로 설쳐 댔더니 여전히 몸이 으실으실 춥고 머리가 아파왔다. 이럴땐 왠지 뜨끈한 국물이 땡긴다. 그래서 오늘 식당은 라면을 주종목으로 하는 일식당 Kuma. 다른 관광지 식당들에 비해 가격도 착하고 나름 정통 일식의 맛을 볼 수 있어서 동네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재수 좋게도 대기줄 서지 않고도 쉽게 갈 수 있었다. 4시까지 해피아워라면서 저녁메뉴는 4시 이후에나 주문 받을 수 있단다. 어쨌건 먼저 뜨끈하게 데운 사케를 해피아워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 추위에 떨었었는데 뜨거운 술이 들어가니 속이 확 풀어지는 걸 느낀다. 치킨 카라아게 역시 달콤한 유자향이 있는 소금으로 간을 해서 상당히 맛이 있었다. 행복한 표정으로 음식을 즐기고 있자니 금방 저녁 시간이 되었고 곧이어 관서풍의 오코노미야키와 샬롯 피클을 곁들인 로컬 참치 타르타르가 나왔다. 오코노미야키의 경우 (당연하게도)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거의 깍뚝썰기한 양배추와 함께 두툼하게 나와서 아주 신선한 경험이었다. 물론 맛도 좋았고.. 여기에 참치 타르타르를 바게트에 얹어 꾸역꾸역 먹다 보니 당초 계획이었던 라면을 먹을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 비오고 으실으실한 날엔 뜨끈한 라면 국물인데..

캠핑장으로 돌아오기 전에 술도 좀 깰 겸해서 식당 근처 동네를 돌아다녀 본다. 여기가 말하자면 토피노의 다운타운인 셈인데.. 정작 선착장 주변으로는 십여년 전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후줄근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몇 블록 지나서 이래저래 새로운 식당이나 상업지구들이 생겨나 이제 제법 관광지스러워 보이긴한다. 배 타고 나가는 온천투어, 해상 사파리 투어 같은 것도 문의 해보고, 아…저기 가봤었지, 오.. 저 식당 그대로 있네 등등 회상에 잠겨 보다가 캠핑장으로 돌아오니 아직 날이 밝다.

하늘은 아직 잔뜩 찌푸려 있어서 노을을 보긴 어렵겠지만.. 뭐 그래도 한번..이란 식으로 해변에 내려가 보았는데.. 오오오.. 오히려 이렇게 구름 낀 하늘이 갯벌에 반사되는 풍경이 굉장히 근사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유우니 소금 호수가 이런 모습 아니었던가.. 여기에 꽉 찬 구름 틈 사이에 붉은 노을 빛이 삐죽 나오자 갯벌도 덩달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하하. 역시 캐나다 바다를 무시하는게 아니었어. 멕시코, 카리브해가 다 무어람. 우린 정말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있는 거였어.. 이런 자뻑에 잠긴 채로 해변을 서성이며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있었다.

여기 그린 포인트 캠핑장의 또 하나 자랑거리는 바로 화장실. 예전에 워낙 구식 시설이라 해변을 찾은 서퍼들의 원성이 자자 했었다는데, 지난번 왔을때 부터 스테인레스 재질의 신삥 화장실 – 샤워실이 번쩍거리며 웅모를 뽐내고 있었다. 뜨끈한 물도 콸콸 나오고.. ㅎㅎ. 캠핑장 화장실에 다이슨 손 건조기가 있는 것도 사치의 극치..ㅋㅋ. 아.. 감기 기운이.. 모든 피로가.. 몸에서 달아나는 게 느껴진다. 뜨거운 샤워를 하면서 몸을 순환하는 모든 종류의 체액이 덩달아 뜨거워 지는 걸 느낀다. 이렇게 돌아오니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진다. 모닥불 피우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고 오늘은 일찍 쉬기로 한다. 전기 캠핑장에서는 굳이 트레일러에 있는 가스 퍼니스를 사용하지 않고 (S선배에게 선물받은) 전기 난로를 쓸 수 있어서 여러 모로 이득이다. 후두둑후두둑 빗줄기가 거세게 트레일러 지붕을 때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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