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째
어젯밤 꿈에선, 오랫동안 주차를 해 두었던 회사차가 시동이 안걸려 고생을 하다가 깨었다. 하아아아아아.. 내일 돌아가는 구나.. 급우울해져서,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다. 시차는 희한하게 역으로 적응되면서 6시 전에 꼬박꼬박 눈이 떠진다. 밴쿠버 시간으로 새벽 3시인데..ㅋ 뭐 어떻게 되겠지. 어제 나도 술을 제법.. 그것도 다양하게 섞어서 마셨는데 머리가 별로 안 아픈 거 보면, 여기 술이 좋은 건지.. 아님 공기가 좋은 건지.. 것도 아님 이렇게 놀고 마실 팔자인 건지. 아내는 마치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멀쩡하게 잘 돌아다닌다. (그래도 당분간 술을 안마시겠단다) 아내도 놀고 마실 팔자인갑다. 복권이 되야지 머..
일찌감치 조식뷔페식당으로 나섰다. 오믈렛 만들어주는 테이블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Omar도 아직 출근 전으로 보인다. 창가 테이블을 잡아 앉는다. 오늘도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분다. 북미에선 햄버거나 피자 처럼 기름기가 많은 음식으로 해장을 한다더니.. 우리가 딱 그짝이다. 오믈렛과 베이컨으로 해장을 한다. 의외로 입에 들어간다. 커피가 맛있어서 그런가?
오늘은 요가 수업에 가보자고 한다. 그 때까지 라운지 풀장에서 쉬기로 한다. 이때가 아침 8시.. 벌써 풀장 주변 오두막은 다 맡아 두었다. 그나마 하나 남은 입구쪽 오두막 침대에 자리를 잡는다. (참고로 이렇게 미리 수건이나 물병으로 리저브해두는 것은 여기서 원칙적으로 금지 사항이다) 근데 맡아둔 오두막에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9시 반까지 정작 사람들은 코빼기도 안보인다.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모처럼 휴가와서까지 생존 경쟁을 하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이게 뭐 그리 중요한 거라고.. 참 나..
깜빡 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니 10시 반이다. 그 사이에도 고양이들이 몇 번 왔다 간 것 같은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아이구 다리야.. 어제 잠깐 운동했다고 곳곳에 뭉친 근육들이 비명을 지른다. 얼씨구.. 걸음을 옮기는데 약간 저는 분위기이다. 참나 정말 저질 체력이다. 그래도 수업 할 때는 곧잘 따라했었는데.
어제 필라테스 수업을 했던 강사, Maya가 요가도 했는데, 오늘 수업은 그래도 비교적 쉬웠다. 그냥 몸을 쫙쫙 찢기만 하면 되더만. 한시간 정도 몸을 찢고 나니 뭉쳤던 근육이 좀 풀리나… 싶었는데 일어서니 다시 땡긴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참가자가 어제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Sunwing –Nexus 사무실에 들러 내일 공항으로 데려다 줄 버스 시간을 확인한다. 하아아아아. 내일 돌아가는구나. 며칠간 아무 생각없이 지내니 좋았는데… ㅋ, 이래 놓고 막상 또 출근하지 말라는 일이 생기면 슬퍼지겠지. 어짜피 휴가라는 건 노동의 부산물이니까.. 컨시어지를 만나서 내일 짐을 맡겨둘 곳이나, 다른 일정에 관한 정보를 받는다. 마음이 착잡하다. 착잡한 건 착잡한 거고.. 일단 점심은 먹으러 가자.
막 12시가 지나서 그런지, 식당은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은데 홀에는 사람들이 북적댄다. 파스타 스테이션에는 버너 하나가 고장나서 요리사 한명이 파스타에, 철판 구이 요리, 그리고 버너 수리까지 하느라 정신없다. 그래도 뭐, 어짜피 식당 손님들은 죄다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고, 시간은 철철 남아도는 사람들이다. 밥 먹기 위해 기다리는 거 외에는 딱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맞은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아저씨는 아.. 배가 부른데.. 두 번은 좀 많은 것 같아.. 하면서 배를 문지르더니, 그 뒤로도 두 번을 더 접시에 채우고 맛있게 먹는다. 휴가다. 먹고 자고 쉬고 놀고 외엔 딱히 할 일이 없다. 이 날들이 그리워지겠지. Omar가 서빙해주는 음료를 좀 더 마시고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르지만 그 때쯤이면 왠지 저 친구는 이 곳에 없을 것 같다. 있더라도 주임 완장정도는 차고 있겠지.
계속 아쉬워 식당 테이블에 앉아 있고 싶었지만.. 테이블에 작은 거미들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돼지 고기 조각이 어금나 사이에 끼었는데.. 성가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는 걸로.. 오는 길에 라운지 풀장에 들러 고양이들한데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밖도 좋지만.. 뭐, 또 숙소도 좋다. 시원하고.. 바람도 없고.. 인터넷도 되고.. 침대에 누워 또 깜빡 잠이 든다. 아.. 그래도 얼마 안남았으니, 카리브해 바닷바람이라도 맞으러 나서야겠지 싶어서 또 뭉기적 뭉기적 엉덩이를 뗀다. 해변엔 아직 바람이 거세고 여전히 빨간 깃발이 꽂혀 있다. 햇살도 드문드문 비추고 가끔 빗방울도 흩뿌린다. 그래도 인간들은 좋단다. 춤을 추고 배구를 하고 풋볼을 한다. 며칠 전 열매를 쳐낸 코코넛 나무에 새롭게 작은 열매들이 맺혀간다. 엄청난 생명력이구나. 또 졸음이 온다. 물론 간 때문이다. 내 간도 코코넛 나무처럼 재생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을 뜨자 4시가 넘었다. 오늘 저녁은 일식-철판구이인데 9시에 예약이 잡혔다. 아마 리조트 a la carte 식당 중에선 가장 인기가 높은 것 같다. 그래서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 룸서비스를 이용해서 간단한 요기를 하기로 한다. 플래티넘 멤버는 룸서비스를 24시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인터넷 리뷰를 보니 피자는 악명이 높고, 클럽하우스 샌드위치와 나초를 먹기로 한다.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니 35분에서 40분 정도 걸릴 거라던데, 20분도 안되서 도착을 했다. 샌드위치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나초는 살사와 과콰몰, 치즈 (정확히는 cheesewiz)를 미리 뿌려 놓아서 금새 눅눅해졌다. 게다가 Cheesewiz라니… 암튼, 간만에 숙소에 앉아 스낵과 맥주를 먹으며 ‘썰전’과 ‘그것이 알고싶다’를 연속으로 보고 나서, 각자 인터넷 서핑의 족쇄에 묶인다. 밖에는 쿵짝쿵짝 테크노 음악이 그치질 않는다.
8시 반쯤 되자 슬슬 채비를 하고 나선다. 나서는 김에 이 테크노 음악의 진원지를 잠깐 살펴 보기로 한다. 해변가에서 흘러 나오는 것 같은데.. 무슨 파티를 하나…. 했더니, 헐, 결혼식이었다. 그것도 별로 없는 하객 몇이 의자에 앉아서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테크노라니.. 신부가 도망을 갔을지도.. 등등 무책임한 추측만 난무한 채로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이 있는 메인빌딩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극장 쪽이 시끌벅쩍해서 잠깐 둘러봤더니 ‘알라딘’ 뮤지컬 공연을 하고 있었다. ㅎㅎ. 그래도 실제 애니메이션 주인공 들과 비교적 닮은 편이라 (‘그리스’보다 한 500배 정도 더) 보기 나쁘지 않다. 군무 역시 화려하다. 잠시 훔쳐보다가 시간이 되어 식당 ‘Miso’로 향했다. 헐.. 식당 정면에 있는 메뉴판은 엊그제 먹었던 가짜 타이요리 메뉴판이 그래도 붙어있다. 도대체 이 식당은 정체가 무엇인가? 리셉션한테 예약 티켓을 줬더니 자연스럽게 철판요리를 하는 곳으로 안내한다.
아… 그런 거였구나. 메인 리셉션을 중심으로 왼쪽은 일식 오른쪽은 타이퓨전을 제공한다. 하지만 일식 쪽에는 딱히 메뉴가 없다. 일식 쪽엔 테이블이 한 여섯개, 그리고 철판요리 부스가 여섯개가 있고, 각 철판요리 부스엔 의자가 12개 놓여져 있다. 스시 등을 먹는 건 예약이나 그냥 워크인으로도 쉬울지 몰라도, 철판요리의 경우 워크인을 하면 12명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만일 Miso를 예약하고 싶다면 그 세 가지 중 뭘로 예약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얘길해야 한다. 아니면.. 그냥 타이를 먹게 될지도.. 전에 만났던 캘거리에서 온 콜린과 크리스털도 그냥 스시를 먹은 것이다. 그리고는 철판요리 부스 때문에 매우 시끄러웠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아.. 복잡하기 짝이 없다.
밤 9시 15분 예약인데, 우리 부스에서는 9시 반쯤 요리쇼가 시작했다. 늦은 시간이라 다른 팀들도 어느정도 전작들이 있어보인다. 하긴 어느정도 취기가 있어야 호응도도 좋아지고, 그래야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입장에서도 신이 난다. 포크와 나이프를 퍼커션처럼 연주한다든지, 불쇼를 한다든지, 포크를 사용해 음식을 투석기 처럼 던져서 손님들 입에 넣어준다든지, 계란을 살짝 깨서 철판 위에 그림을 그린다든지.. 뭐 이런 일련의 쇼 구성은 전형적이었지만, 결정적으로 음식이 별로 맛이 없었다. 생선, 닭, 소고기 등 모든 고기류의 육즙이 상호 뒤섞이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간장과 맛술, 조미료로 만든 양념을 모든 재료에 넣어서 재료의 식감을 즐기기 불편했다. 보통 다른 철판구이 집에선 육즙이 섞이는 걸 방지하는 차원에서라도 생고기를 강한 불에 굽고, 소금, 후추만으로 간을 하던데.. 당연히 소금, 후추 그라인더로도 쇼를 할 수도 있고… 그래도 뭐. 퍼포먼스는 재미있었던 걸로…
식당 밖으로 나오니 이랫층 바에선 줌바 댄스 파티를 하고 있었다. 전에 봤던 잘생긴 라티노 줌바 강사 청년을 비롯해서 몇몇 직원들이 나와서 춤을 추며 바람을 잡고, 그 뒤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술 취한 아저씨들이) 따라서 추고 있다.
떼거지로 같은 동작을 하는 모습이 허슬춤을 추는 군중들 같다. 저 사람들은 우떻게 저래 엉덩이가 잘 돌아간다냐.. 한참을 보다가 슬금슬금 숙소 방향으로 돌아 온다. 오다가 라운지 풀장에 잠시 들른다. 아까 식당에서 나올때 생선을 좀 남겨서 싸왔는데, 고양이들한테 줄 생각이다. 어라.. 근데 고양이들이 안보인다. 쥐 소리도 내 보고, 여기저기 둘러보기도 했는데 안보인다..이 정도면 냄새가 날텐데.. 하면서 숙소로 돌아 갈 찰나,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어디선가 후다닥 달려 온다.
일단 녀석한테 조금 떼어 주고 다른 고양이들을 찾으러 다녀 본다. 특히 줄무늬 고양이는 나이가 들어 눈도 뿌옇게 되고 행동도 느릿해서 딸기 생각이 많이 나게 했던 놈이다. 주변 정원을 한바퀴 돌고 나니 저쪽에서 웅크리고 있던 녀석을 발견했다. 에고.. 냄새도 못 맡는 모양이구나… 하면서 조각을 하나 떼어주는데.. 녀석이 눈에서 빛을 뿜으며 달려든다. ㅎㅎㅎ 저렇게 전력을 다해서 생존경쟁 의지를 불태우는 것도 녀석에게는 오랜만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다른 검은 고양이까지 포함해서 세 마리가 다 모였다. 어떻게 녀석들이 싸움 안 나게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사방으로 순차적으로 흩뿌려 줬는데, 계획과 달리 몰려 다니면서 하나씩 거덜낸다. 근데.. 우리 할머니 줄무늬 고양이가 절대 안밀린다. 생각보다 빠르기도 하고, 안 보이는 눈으로 잘도 찾아내서 먹는다. 다른 검은 고양이들에 비해 덩치도 작은 데도, 저렇게 열심히 먹는 걸 보니 왠지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렇게 어이 없는 감정이입을 하면서 멕시코 마지막 밤을 보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