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니까, <단적비연수> 원래 제목에는 “수”가 없었다는 거야. 원래는 그냥 <단적비연>이었대……”
내가 아는 한, 그는 영화판 혹은 촬영장에서 돌아다니는 가쉽을 옮기는 걸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영화판에서 일을 하다 보면 여러 배우나 셀럽 감독에 대한 품평, 가쉽 등이 돌기 마련인데, 그는 들을 때는 ‘허허’하며 같이 웃다가도, 그런 얘길 다른 곳에 옮기는 걸 질색했다. 같이 일을 할 때는 주로 새로 나온 만화책이나 소설책에 대해 얘기를 했고, (그보다 서로 앞다투어 돈 떨어져서 출근을 못하겠다는 엄살을 피웠지만) 어제 아침에 퇴근하다가 버스 안에서 번뜩 떠올랐다는 시나리오 아이템을 얘기하곤 했었다.
나는 그와 새로운 아이템 얘기를 하는 걸 좋아했다. 단 한 문장으로 만들어 놓고 보면 종종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는 아이템도, 이런저런 군살을 붙이다 보면 제법 근사해졌다. 대한민국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본 사람 중 하나로 알려졌던 그는, 내 아이디어와 비슷한 장면이 어떤 영화에서 먼저 인상 깊게 쓰였었는지 여과를 해주곤 했었다. 그렇게 얘길 하다 보면, 대충 20초 정도 길이의 피칭이 만들어졌다. 그와 만든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툭 던졌을 때 “어? 그거 죽이는데?”라는 반응을 듣을 때엔, 입술이 우쭐거리는 듯이 치켜 올라가기도 했다.
영화 일을 그만 두고도, 글을 쓰는 걸 그만 두고도, 그와는 가끔 만남을 이어갔다. 하지만, 서로 너무나 달라진 상황 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어딘지 모르게 서먹해졌다. 생계를 위해 넥타이를 매고 다녀야 했던 내 새 명함 속 이름 앞에 달려있던 수많은 수식어를 보고 그는 질려 했다. 그와는 여전히 영화에 대해서 얘길 했었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금세 소재가 고갈되곤 했다. 그래서 같이 일했던 그 짧은 기간 동안의 추억을 곱씹고 곱씹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결국 일 년에 단 세 번을 만나도 그 세 번의 만남 동안 예전에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어렵게 잡은 기회 덕택에, 그가 흥행 감독의 반열에 오른 후에는 더욱 만나는 일이 적어졌다. 결코 그의 성공을 질투하거나 내 처지를 비관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단지 그냥…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재미 없어졌다. 그의 관심사와 내 관심사 간의 간극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것만 확인되었다. 종종 길고 긴 침묵, 왠지 숨이 턱턱 막히고 목젖으로 마른 침이 넘어가는 침묵이 그 간극을 채워야 했다. 그러고는 또 옛날 얘기……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른 촬영장에서 있었던 어느 노회한 여배우의 가쉽을 전했다. 자기도 건너 건너 들은 얘기를… 그 얘기를 듣자마자 ‘아.. 이 사람도 노력하고 있구나… 남 얘기하는 걸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이, 나와 대화를 억지로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구나.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분한 마음에, 이마까지 빨개졌던 것 같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재빨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과거 인연을 이어나가기 위해 최대한 예의를 지키려는 그 모습이, 내게 그렇게까지 치욕적으로 느껴질 줄 몰랐다. 이게 열등감이라면 열등감인 것이겠지. 하지만, 다음번에 연락할 때에는, 내 작품을 읽어 달라고 부탁할 때가 될 거야…라고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