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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토피노 4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 급한 화장실의 부름 때문에 4시에 깼다. 밤새 트레일러 천정을 두들기던 빗줄기는 조금이라도 잦아들 줄을 모른다. 날씨 예보를 보았더니 9시까지는 계속 이 모양일듯. 어쩔 수 없이 위아래 비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간단한 거야 나무 뒤에 실례해서 빗물에 씻겨 내려보낸다 하더라도, 어제 하루 종일 버터의 향연을 겪었더니 뱃속도 부글부글 소리를 낸다. 우비에 우산을 들고 라이트를 비춰가면서 가더라도,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온몸이 젖어가는 걸 느낀다. 다음에 캠핑 사이트를 예약할땐 반드시 화장실 가까운 곳으로 정하리라 또 다짐을 한다.

아내 역시 밤새 두들기는 빗소리에 잠을 설친 모양. 계속 드럼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일단 잘 수 있는 만큼 더 자 보자고 하면서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어제 전기난로가 고장이 나서 축축함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전기장판 위 침낭 속으로 들어가니 이 빗소리도 아늑하게 느껴진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점심을 먹으러 나서 본다. 오늘 가 볼 곳은 토피노 타운에 있는 Sobo라는 레스토랑으로 첫날 갔던 Kuma와 함께 이 지역에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식당이라 한다. 뜨끈한 국물이 땡기던 차에 이 집에서 가장 인기 좋다는 해물 차우더와 폴랜터 Polenta 튀김 (옥수수 가루를 빚어서  튀겨 만든 도넛), 로컬 버섯 피자 (우오오오옷. 왠만한 피자집 피자보다 맛있다. 로컬 버섯이라더니, 신라면 건더기 스프에 있는 버섯향이 난다), 그리고 타이풍 그릴드 치킨 (기름을 뺀 닭다리를 껍질째 각종 야채와 땅콩 소스와 함께 또띠야에 싸서 먹는 요리였는데.. 타이.. 라기보다는 북경오리 요리느낌이었다)을 주문했다. 요리 하나하나 매우 창의적인 소스와 야채의 조합이 인상적이었고, 하나같이 맛도 좋아서 매우 만족스러운 식사였지만, 당연스럽게도 다 먹진 못하고 나머지를 포장해왔다. 그래도 그 유명하다는 디저트인 키라임파이를 맛보는 건까진 잊지 않았지만..

그 후 다운타운을 산책하면서.. 아내와 ‘이상하다. 그냥 먹고 놀고 있는데 왜 이리 피곤한거지.. ‘하면서 의아해했는데, 이 피로의 정체가 끊임없는 과식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소화 능력이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는데, 이렇게 계속 쳐먹고 있으니 몸의 에너지가 음식소화에 너무 많이 소모되는 것이다. 먹거리 여행도 나이가 젊을때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근데 어릴땐 먹고 싶은 걸 다 사 먹을 돈이 없잖아?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지옥인 거지..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토피노 다운타운 거리를 다녀본다.

그러고 보니, 이 거리가 2016년에 비해서 또 완전히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좀 더 활기차졌다고 할까? 예전에 비해 백인 젊은이들이 확실히 눈에 더 띈다. 그렇다고 원주민들이 완전히 안보이는 건 아닌데.. 뭐라할까… 최근의 스쿼미시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아시안 자본이나 대기업 자본에 밀려서 밴쿠버나 빅토리아 도심에선 밀려났지만, 뭔가 새로운 사업을 해보고 싶은 젊은 사람들 (주로 백인 청년들)에게 기회의 땅이 된 것 처럼 보였다. 게다가 스쿼미시에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암벽등반 코스가 있는 것처럼, 토피노에는 세계적인 서핑 해변이 있다 (이 둘 역시 백인 청년들 중심의 스포츠). 그렇기 때문에 도시를 정비하고, 청년들 대상의 새로운 사업을 융성하면 그만큼 얼마든지 시장이 확대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작용도 뚜렷하게 눈에 보인다. 일단 도시 전체가 차분하지가 않고 붕 뜬 기분이다. 마치 밴프나 레이크 루이스의 어떤 주차장 처럼 보인다. 아직 관광 시즌의 끝물이라서 그런가? 레스토랑마다 방대한 칵테일 메뉴가 있어서 그런가? 그렇다고 트래픽이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예전에 보였던 원주민 부락 중심의 공동체 분위기는 완전히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눈에 띄는 원주민들은 밴쿠버 이스트 헤이스팅스의 그들처럼 카트를 끌고 다닌다던가 대낮부터 취해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고.. 아무튼 이 새로운 모습의 관광 도시에 적응을 못하는 걸로 보인다. 과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취업시장의 침체? 상업 부동산의 폭등? 모르겠다. 어쨌건 이런 도시의 변화를 쉽게 발전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만일 이것이 일상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이라 한다면, 반짝거리는 아이디어와 부푼 꿈을 안고 토피노에 정착한 저 젊은 백인 사업가들 역시 언제 밀려날지 모를 일이다.

쓰잘데기 없는 걱정들을 하면서 산책을 하는 데도 배가 꺼질 줄을 모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토피노 브루어리에 구경을 가봐야지 했는데, 오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그랜빌 아일랜드보다 더 큰 것 같다. 아마도 직접 가 본 마이크로 부루어리 중에서 면적 면으로는 가장 넓은 곳이 아닐까 싶다. 다른 소규모 양조장들 처럼 다이닝 공간이 있어서 펍처럼 사람들이 떠들고, 또 그걸 덮는  음악 소리가 있고 그렇다. 일단 플라이트 (샘플러)로 주문했는데 우리 동네 마이크로 브루어리보다 플라이트 가격이 좋다. 5온스 잔으로 4개가 나오는데 세금 포함 7불, 20온스 글라스로 한가지 맥주만 마셔도 세금포함 7불이니 아주 굿딜인 셈. 게다가 간만에 와이파이가 잡히는 곳에 왔더니 이때구나 싶어 예능프로를 다운 받기 시작하는데, 난데없이 밖에서 장대비가 쏟아진다. 그게 맥주 공장에서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일단 비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와서 산책을 좀 더 하고 캠핑장으로 돌아와 누웠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새로 시작한 예능은 길거리에서 일반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또 퀴즈를 플고 해서 상품도 주고 그러는 거였는데,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힐링 (위로) 마케팅의 전형을 답습한다. 누구나 (20-30대 들이 특히 더) 힘들고 고달픈 세상이지만, 마치 저걸 저렇게 들어주기만 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는 식의 결론은 이제 가증스럽기 까지 하다. 마치 80년대에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하던 캐치프레이즈와 다를 것이 뭐가 있는가? 20여년전 일본 만화에서 노다메가 ‘동정할거면 차라리 현금으로 줘요’라고 대사를 치던 때가 그립다. 

날이 완전히 개어서 해변으로 슬슬 내려가 본다. 아… 오늘도 유우니 소금호수 같은 풍경이구나. 서쪽 하늘엔 아직도 구름이 잔뜩 끼어 멋진 낙조를 보기는 힘들 것 같지만.. 그래도 불그스레한 하늘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갯벌이 아름답다. 어둑해질 때까지 해변에 있다가 사이트로 돌아와 모닥불을 피우며 점심 먹다가 남은 피자와 맥주를 마셨다. 캠핑장에서 산 장작은 여전히 젖어 있어서 이건 장작을 쪼개는 건지 질긴 고기를 뜯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불이 붙었다. 아.. 이번 캠핑은 날씨가 안 도와줘도.. 요리를 안하니 이렇게 쾌적할 수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