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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토피노 2

일요일이다. 원래 어릴 적부터 일요일 마다 새벽같이 눈이 떠지곤 했지만, 지난밤은 음주가 없었던 토요일이어서 더 일찍 눈이 떠진다. 하지만 감기 기운 때문에 몸이 좀 묵지륵한 터라 좀 더 침대 위에서 게으름을 피운다. 그 사이 아내가 일어나서 먼저 화장실에 간다. 밖에선 빗방울 소리가 여전히 들리고… 아내가 돌아오자 마자 빗줄기가 더욱 더 거칠어진다.. 아 쒸.. 좀 적게 올 때 갔다가 올 걸. 일기예보를 보니 9시가 넘어서야 비가 그친다는 정보다. 우산을 쓰고 일단 갔다가 와야겠다 싶다.

애초에 아침에는 간단한 피자 요리를 만들어 먹을 계획이었으나 비가 너무 거칠게 내리는 관계로 가스 바베큐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그릭 요구르트 베이스의 아보카도, 토마토, 아르굴라로 만든 야채롤. 보통 캠핑을 할 땐, 조용한 숲에서 재즈를 들으면서 핸드 그라이더로 원두를 갈고, 주전자로 끓는 물을 조심스럽게 부어서 장인의 손길로 한땀한땀 만든 드립커피를 마시면서 우와… 난 오늘 정말 한가하구나..라는 자족감에 취한 아침을 시작하는데, 이번 캠핑은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컨셉이라 아예 집에서 네스프레소 기계를 가지고 왔다. 부아아앙 하고 10초만에 만들어진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첨가한 아메리카노도 핸드드립 커피만큼 향이 좋았다. 어느새 빗줄기도 천천히 약해지고.. 스피커에선 브라질리언 웨딩송이 흐르면서,  창문밖 비가 막 그친 숲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자니 이 상황이 무척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캠핑장 산책을 할겸, 오늘부터 사흘간 신세를 질 44번 사이트가 비었는지 구경을 갔다. 국립공원 캠퍼가 BC 주립공원 캠퍼와 다른 점이, (워낙 외지에서 많이들 와서) 길 가다가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잘 안한다는 점만을 알고 있었는데, 캠핑 사이트 철수도 일찍일찍 한다는 점도 달랐다. 아마도 마지막 날 이동일정이 주립공원에서 캠핑하는 동네 주민들에 비해서 더 빡빡해서 그런 거겠지. 아무튼 44번 자리가 빈 걸 확인하고 나서 우리도 슬슬 짐 챙겨 트레일러를 옮긴다. 35번에 비해 44번은 전체적으로 협소하고, 진입로도 좁고, 화장실에서 먼데다가, 국도변과 가까와서 차들 지나가는 소리가 잘 들린다는 많은 단점이 있었으나, 우리가 처음 캠핑장을 예약할 때만 해도 이 사이트만 비어있었으니,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린포인트 해변엔 쉽게 갈 수 있으니 불만도 없다. 말 나온 김에 천천히 내려가서 맑은 날의 해변을 걸어 본다. 의자를 가지고 내려가 밀물이 들어올 때 그 위에 앉아있어 보고 싶다는 소원도 이루어 보고.. 어쩌면 이렇게 해변이 텅 비었나.. 완전 개인 해변을 전세낸 듯 싶다.

새 사이트에 자리를 잡자 날이 서서히 개기 시작하고,  점심 먹을 식당 검색을 해보다가 일단 유클렐레로 출발하기로 한다. 그린 포인트 캠핑장은 정확히 토피노 타운과 유클렐레 타운 사이 정가운데 쯤 위치해 있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든 간에 차로 20킬로는 달려야 한다. 토피노는 워낙 롱비치가 서핑의 천국으로 유명한데다가 퍼시픽림 국립공원 덕을 봐서 (캐나다 원주민 거주 지역을 뒤로 한채) 오랫동안 관광 도시로 성장해왔지만, 유클렐레는 거기에 비해 신규 이주자들의 거주지라든가 어업, 낚시 관광 등의 산업이 형성 되어 있는 동네다. 당연히 물가도 유클렐레가 더 싸고, 각종 쇼핑타운도 비교적 많은 편. 하지만 토피노의 명성에 기대려 하는 탓인지, 아니면 단지 유클렐레라는 지명보다 토피노라는 지명이 입에 착 달라붙어서 그런건지, 유클렐레에 있는 신흥 비즈니스 – 앙조장, 디자인 하우스 등 – 역시 토피노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가려고 했던 Raven Lady라는 굴튀김 전문 푸드트럭이 여름시즌을 마치고 닫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후보지를 물색하다가 유클렐레 남쪽 해안에 있는 Black Rock Resort 에 있는 Fetch 레스토랑이라는 곳에 가보기로 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기왕이면 경치 좋은 곳에서 먹어야지.. 리조트는 유클렐레의  Wild Pacific Trail 근처에 있고 주상절리대 해안가 위에 위치해 있었는데, 레스토랑은 바로 그 최전방에 있어서 아주 훌륭한 경치를 함께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피쉬엔칩스와 함께 마신 스타우트와 라거 맥주는 각각 최상의 온도로 서빙되어 인상적이었다. 또한 홍합 와인찜 역시 정갈하게 손질된 홍합이 나와 기분이 좋았다. (그런뎨.. 그런데.. 파티오 테이블에는 모기가 너무 많았다. 처음 아내가 모기한테 물렸다고 할 때만 해도.. 캠핑 오면 모기한테 좀 물리고 그러는 거지 머..하고 너그러웠는데, 내 다리에 여섯방 이상 물리자, 식사 내내  보이는 족족 잡아죽였다)

예전 2006년에 놀러왔을 때만 해도 밴쿠버 레스토랑이나 식도락가들에게 가장 관심사는 유기농이었는데, 최근 5,6년 사이에 관심사가 Sustainability (지속가능성)와 로컬푸드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지구온난화가 가속되면서 사람들이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 것일텐데, 나 하나 건강하게 먹는 식품에서 전체 지구 환경에 영향을 덜 주는 식품을 선호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토피노나 유클렐레에서 잘 나가는 식당에서는 로컬 식자재를 사용한다든지 (근해에서 잡은 참치 등등), 자사 홈페이지에는 해변에서 미역을 따는 셰프의 사진을 올려 둔다든지 하는 홍보에 한창이다. 뭐 어차피 다 유행이고 마케팅이겠지만 이런 걸 보면 결국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씩 좋게 만들어 나간다는 생각도 든다.

식사를 마치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주상절리대 위에서 사진도 좀 찍어 보고, 타운 건너편 반대쪽 해안 (선착장) 까지 걷기로 한다. 로컬 아티스트 디자인 샵 등 새로 생긴 비즈니스를 구경하다가 fishful thinking 이라는 생선가게에 들렀는데… 오.. 근해에서 낚시로 잡았다는 참치가 무지 싸다. 비록 냉동이긴 해도.. 저 정도 크기의 참치라면 밴쿠버에 가면 원양에서 잡은 걸 두배 넘는 가격에 팔고 있다. 일단 참치를 얼른 집고 나니, 가게 주인 청년이 조개 관자도 회로 먹을 수 있는 품질이라고 귀뜸한다. 이렇게 저녁 찬거리와 안주거리를 잔뜩 사들고 천천히 항구 – 선착장 주변을 산책하다가 캠핑장으로 돌아 온다. 

오늘밤은 비가 안올 듯 싶어서 돌아오는 길에 캠핑장 입구에서 장작 4 묶음을 사 들고 왔다. 이곳은 자스퍼 국립공원 와피티 캠핑장처럼 캠프 파이어 퍼밋을 하루하루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립공원 처럼 땔감을 판매한다. 1뭉치 7불, 3뭉치 20불, 4뭉치 25불. 그리고 타지역에서 가지고 온 장작을 사용하는 건 절대 엄금이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전염병 때문일 것이다. 2011년에 처음 밴프 국립공원 터미널 캠핑장이나 자스퍼 국립공원 위슬러 캠핑장에 갔을땐, 캠핑장 사용료에 캠프 파이어 및 장작까지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의 오류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큰 덩치의 나무 덩어리를 실어 날랐고, 작게 쪼개기 위해서 커다란 도끼도 따로 장만을 했었다. 근데 올해 2019년에 갔던 자스퍼 국립공원 와피티 캠핑장에선 하루하루 캠프 파이어 퍼밋을 구입해야 했다 (하루 8불). 대신 그날밤 장작은 무제한으로 가져다가 땔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선 또 캠프 파이어 퍼밋 필요없이 장작을 구매해서 모닥불을 필 수 있다니.. 왜 같은 국립 공원이면서 이렇게 다들 다른 방식으로 운용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런 운용권은 각 캠핑장 매니저의 직권으로 결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2016년에 왔을 땐, 이 캠핑장에선 아예 장작이 없다고 했었으니, 토피노 지역이 록키 지역 국립공원보다 벌목량이 적어서 그런 것일 지도 모르겠다…. 라는 쓸데 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너무나 순진하게 어이구 나무가 보기보다 묵직하네.. 하는 생각 따위를 하며 장작을 들고 왔는데.. 살다살다 이렇게 젖은 장작은 처음이다.. 모닥불 피우기 시작하면서 한시간 반동안 별 고생을 다 하다가 결국엔 성공을 하긴 했지만, 이런 나무를 돈 받고 팔면 안되는 거 아닌가, 양심적으로?.

활활 타는 장작을 보고 있자니 술 생각이 났고, 불 피우기 직전까지 점심을 너무 든든히 먹어 저녁을 먹지 말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나, 참치와 조개 관자가 있는데 맹술만 심심하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개 관자는 알루미늄 호일 석쇠에, 참치는 기다란 꼬챙이 세 개를 끼워 애벌구이를 했는데 생각보다 제법 근사한 타타키 요리가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괜찮은 참치를 그 가격에 사다니.. 어떻게 좀 더 사서 퀄리티를 유지한 채 집으로 가져갈 방법이 있는지 한참을 갑론을박하면서 늦은 저녁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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