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생활의 발견 (2002-2007)

blog 2002 ~ 2007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국민학교 입학 전이 아니었을까? 어쨌건, 당장 내일 모레 학부형이 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혁명공약’과 ‘유신선언’을 줄줄 외우고 다니셨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가, 입학 전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웠던 것은 그리 별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극장에 가서는 애국가에서 꼬박꼬박 기립해서 숙연함을 다졌으며(내 기억에는 대학 신입생 때까지 그랬었던 것 같다), 어느 가을 날, 붉게 물든 노을 하에서 국기하강식을 하는 것을 보며, 그 장엄함에 눈물을 그렁그렁 떨구던 사춘기를 보낸 것 같기도 하다. (기억이 잘 안 나는 것까지는 참, 어떻게 봐줄 만 한데.. 때론 조작도 해내니 큰일이다. 어쨌건.. 저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릴 적, 재미있게 읽었던 책 중에 하나는 바로 만화잡지 ‘보물섬’. 안그래도 공부는 안하고 만화만 보던 아들에게, 단지 ‘육영’재단이라는 브랜드 만으로 강한 신뢰를 보내면서 매달 사주셨던 아버지 덕택에.. 신문수, 이향원, 박동파, 고유성, 윤승운, 이상무와 같은 걸출한 중견 작가들과 소년중앙 이후에 계속 만날 수 있었으며, 이현세, 김수정, 장태산과 같은 당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던 작가들을 눈여겨 보기도 했고, 둘리, 독고탁, 까치, 등과 같은 시대의 케릭터들과 교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육영재단이어서 였을까, 아니면 신군부의 도서심의가 더 가혹해서였을까.. 모든 만화의 주된 내용은 ‘정의사회구현’과 ‘나라에 충성, 부모엔 효도’, 그리고 ‘협동과 준법정신’을 십계명처럼 떠받드는 형편이었고, 나 역시 그런 세뇌공작에서 자유롭지 못하였기에(뭐.. 심지어는 당시 아동용으로 번역되었던 무수한 세계의 명작들도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장발장’이나, ‘괴도 루팡’, ‘수호지’조차도……) 그 오랜 시절 동안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을 채 살아올 수 있었다.

뭐.. 그 충성심이 서서히 옅어져 가면서, 나는 나라를 사랑했건만 나라는 나 보다 돈 많은 사람들을 좋아했던 사실을 깨닫게 된 경위에 대해선 수차례 언급한 바 있으니 그만하기로 하고..

오는 22일에 캐나다 시민권 시험을 치르게 된다. 말하자면 캐나다 국적을 얻게 되는 것인데, 한국처럼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의 국적을 이미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한국 국적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민을 선택한 애초부터 각오한 일이라서 뭐 그지 혼란스럽거나 주저되지는 않는다. 단지, 그릇된 짝사랑이었지만 여하튼 20년 동안이나 한국이라는 사회에 가져왔던 연심을, 단칼에 스윽 베어내려고 하니 조금 꿀꿀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고 하더니..쩝)

사실, 캐나다 사회에서는 영주권자와 시민권자의 권리 차이가 투표권 정도 밖에 없기 때문에, 단지 캐나다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는 굳이 시민권을 얻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만일 두 국적 중 하나 만을 택해야 했을 때 당연히도 캐나다 국적이 나에게 더 선호대상이 되는 이유는, 우선 이 나라가 이중국적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지금은 캐나다에 살지만 (우리 성격에) 이후 어디 어느 곳에서 또 살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고, 마누라 잔소리도 듣기 싫어하는 내가, 단 한 가지의 국적만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으름장에 은근히 부아가 낫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시민권 시험 준비를 하다 보니까.. 젠장, 국가에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생각해보니 당연한 일 아닌가? 인터넷 쇼핑몰 하나 회원 가입하는 데에도 약정에 동의해야 하는데..). 50페이지가 넘는 시민권 안내 책자에는 캐나다 역사 및 지리, 정치제도가 상세히 나와있지만, 결국은 ‘캐나다 최고’ 혹은 ‘캐나다 만세’로 좁혀진다. 그리고 이렇게 잘난 나라의 ‘시민(여왕이 통치하는 식민지 국가이니 ‘신민’이 맞는 표현인가?)’으로 살기 위해서 뭘 지켜야 하고, 뭘 따라야 하는지를 외워서 시험을 봐야 한다. 그리고 시험에 통과 되어 시민권(신민권)을 부여 받을 때 ‘영국 여왕’에 대한 맹세를 해야 한다니.. 아 정말, 미국과 덩달아서 세계의 침략전쟁이란 전쟁은 다 자행하고 있는 나라의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한다니 벌써 기분이 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