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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종 차별

내가 이민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널 포함해서,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던 건 바로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이었지. 난, 겉으로는 짐짓 고마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 걱정 말라고 자신 있게 말했었지만, 내가 실제로 자신이 있었던 건 차별을 당하지 않을 자신이 아니라, 차별을 당해도 크게 상처를 받지 않을 자신이었어. 사실,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30년간 살고 자라오면서 끊임없이 겪어 온 차별들 – 가정형편에 대한 차별, 교사에게 촌지를 주지 않아서 겪은 차별, 나이 어리다고 받는 차별, 선후배 관계에 대한 차별, 외모에 대한 차별, 학력, 학벌에 따른 차별, 자동차 배기량에 따른 차별 등 – 에 비하면, 인종차별은 그다지 새롭지도 두렵지도 않다고 봐야 하지 않냐?

한국도 차별에 대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라였잖아. 그래서, 굳이 타국으로 나갈 때 인종차별에 대해서 걱정한다면, 그건 단지 부분적이나마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가 절대 피해자의 위치로 전락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았거든. 단지, 너랑, 그 외 그런 걱정을 해준 친구들, 우리 모두, 정말이지 개털 흙수저로 자랐었는데, 지난 수십 년간 살아오면서 너희들도 나만큼 차별 때문에 고생했을 텐데, 도대체 왜 그리 새삼스럽게 인종차별을 두려워했었는지는 아직도 자 모르겠어.

사람 사는 사회에서 차별이란 게 과연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 사람들이나 사회 문화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고, 그것으로 사회에서 우월하거나 열등한 위치로 나뉘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상 어쩌면 차별이란 건 없을 수가 없다고 생각해. 또한 반대로, 타인의 지위에 대한 열등감이나 다른 능력에 대한 두려움 역시 아주 심각한 차별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 밴쿠버 사회에서 비싼 주택이나 자동차를 소유하는 아시안 이민자에 대한 인종차별은, 사실 영화 엑스맨 (X-Men)에서 초능력 돌연변이들에 대한 차별이 박탈감과 두려움에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딱히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우리가 왜 차별을 금지해야 하는 걸까? 서구사회에서 차별금지법이 상급법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소수자 인권 보호를 떠나서, 이미 역사를 통틀어 마녀사냥이나 유태인 학살 등의 차별행위가 얼마나 큰 비극을 이끌 수 있는지 확인해왔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우리 사피엔스라는 종이 형편없이 허약한 체력에도 불구하고 지구상 생태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사회 안에서 혹은 사회끼리의 협동 때문일 텐데, 차별행위는 이런 협동이라는 생존 전략에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지.

어쨌든, 캐나다에, 밴쿠버에 인종차별이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나 스스로도 종종 그런 상황을 겪어오기도 했어. 그럼 그게, 캐나다 시민권을 포기할 만큼 지독한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선 대답하기가 좀 어려운데, 나나 아내 모두 캐나다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지 않았고 (너도 알다시피, 어느 나라나 호르몬은 넘쳐나지만 실전 인생의 무서움을 경험하지 못해 본 중고등 학생들이 가장 잔인하잖냐), 그렇다고 현재 사회생활을 한다고 해서 유리천장을 느낄 만큼 고위직으로의 진입을 시도해 본 것도 아니거든.

그런데, 우리가 심하게 겪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는 문제잖아. 예를 들어, 우리는 밴쿠버 도착 첫날부터 다른 나라에서 와서 각종 에스닉 푸드를 만들어 먹고 사는 이민자들의 아파트에 살면서, 김치찌개, 부대찌개 등을 아무 주저함 없이 끓여 먹었지만, 주변에 친하게 지내는 다른 이민자 분들 중에는, 자녀가 학교 친구들에게 김치 냄새 난다고 놀림을 받아서, 그 뒤로는 10년이 넘도록 집에서 김치 찌개를 못 먹었다는 얘기를 하기도 하거든.  

귀여운 차별

그 아이들의 입장에선 안타깝기 짝이 없는 상황이지만, 그리고 나 역시,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변에 친구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때도 있었으니 아예 공감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 저런 차별 행위는 귀여운 수준이라고 생각해. “나한테서 김치 냄새 난다고? ㅋㅋㅋ 냄새 나는 게 실정법을 어기는 게 아닌 이상 네가 잘 참아 봐”라고 말하면 그만이니까 말이지.

많은 한국 이민자들에겐 개인주의가 아직 어색하고 패거리 문화에 끼지 못한 채 아싸로 사는 걸 왕왕 두려워하지만, 그런 패거리 문화가 자기 인생에 얼마나 도움을 주었느냐 한번 살펴보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금방 알게 되지.

비슷한 귀여운 차별 사례로는 내가 예전에 L 마트에서 일할 때 일이 있는데, 영어도 더듬더듬 잘 못하고 얼굴도 어려 보이다 보니까, 같은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백인 고등학생들한테 좀 얕보인 적이 있었나 봐. 혹은 걔네들이 나랑 친해지려고 장난을 걸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여기 백인 고등학생들도 알파독과 같은 덩치 큰 아이를 중심으로 몰려다니면서 짓궂은 장난을 치곤 했는데, 뭐, 아무래도 직장 내 장난이니까 범죄나 그런 건 아니었고, 또 아저씨의 눈으로 보자니 귀여워 보이기만 했지. 그래도 영어 스트레스를 받는 고달픈 이민자 생활 중이라서 그들과 쉽게 어울리지는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휴게실에서 소파에서 길게 누워 자고 있는데, 그 무리들이 와서 놀리면서 또 낄낄거리더라구 (웃기는 건, 이곳 호르몬 왕성한 젊은 백인 남성들에게 가장 경멸의 대상이자 두려운 대상은 남성 동성애자인지 몰라도, 이들이 장난으로 사람들을 놀릴 때 남성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호칭을 사용하더라. 근데 이 호칭은 상대를 욕할 때도 쓰이겠지만, 한국에서의 ‘병신새끼 ㅋㅋㅋ’처럼 친한 남성 친구끼리 장난으로도 쓰이더라구. 이런 걸 보면 이곳에서는 동성애 차별이, 한국에서는 장애인 차별이 가장 고착화되어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어). 가만히 누워서 이 나이에 얘네들 장난을 받아줘야 하나.. 받아 주면 어떤 식으로 받아 줘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우리 고등학교 때처럼 받아주기로 결심하고,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80년대로 돌아가서, 예전 추억을 불살랐던 것 같아

근데, 내 나름대로의 장난이 낯설었는지, 아니면 그 후에 내 나이가 알려져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 뒤로는 나와 같이 장난을 치는 일이 없어졌어. 그리고, 난 여전히 고독한 이민자로 휴게실에서 낮잠을 자게 되었지. 뭐.. 결론은 그들 패거리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회사 생활이 더 어려워지거나 하는 건 없었다는 거지.

깡패 같은 차별

이런 거 말고도 살면서 종종 마주쳤던 건 깡패 같은 차별이 있어. 이렇게 내 맘대로 식의 명칭을 붙인 건 이런 조류의 차별 행위가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게 많고 대부분 외관상 약자로 보이는 여성이나 아동,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야.

피해자가 여성과 유색인종인 경우가 많아서 성차별 범죄나 인종차별 범죄 범주에 집어넣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이건 그저 전형적인, 약자 대상의 졸렬한 폭력 범죄이고, 당연히 가해자들도 당당하지 못한 경우도 많아서 생각지도 못한 반격을 당하면 금방 꼬리를 내리는 특징도 있지.

또, 다른 특징으로는 가해자들이 이후 인종차별 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달릴 뒷감당을 할 걱정이 없는 지위에 있거나, 아예 하류층 / 극빈층들이 많은 편이야.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막상 대응을 하려다가 그들의 꼬락서니 보고 나면 이내 급격히 전투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예전에 한 번은 다운타운을 걷다가 (아내와 싸웠는지 기분이 좀 안 좋은 상태에서) 내 한국 말투를 따라서 흉내 내는 거지를 만났는데…  아… 한여름 밴쿠버 다운타운 한복판에서 거지와 큰소리로 욕지거리 하면서 싸우고 있었다니… 아내는 나를 말리다가 너무 창피해서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 역시 잠시 후 극심한 현타가 온 적이 있었어.

나야 저런 상황을 한국에서도 자라면서 종종 겪어서 그런지, 막상 피해를 입어도 그리 데미지가 크지 않고, 어쩔 때는 서울 밤거리에서 취객을 상대하는 것 마냥 일일이 대응하기 그냥 지겹기도 하고, 또 불필요한 난투극을 피할 수 있을 정도만큼 허세를 부리는 것에도 능숙해졌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비열한 폭력범죄의 대상이 대개 약한 여성이 되고 있는 판국이야.

특히, 아내는 저런 폭력적인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팬데믹 초기에 아시안에 대한 혐오가 극한으로 치솟을 때에는 아내 혼자 밖으로 외출하기도 무서운 상황이 되었었어. “와.. 어떻게 밴쿠버에서 여자 혼자 동네 산책하기가 어려워졌나..” 하고 개탄하기도 했었지. 결국 여기에 대해선 (사회적 약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강력한 법 집행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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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당선되고, 백인 우월주의가 팽창해서 캐나다까지 영향을 미칠 무렵, 밴쿠버 어느 단체 (WCAI Canada /CAP (World Coalition Against Islam / Cultural Action Party of Canada) 라는 단체명을 사용했었는데, 이민자들 때문에 (백인들의) 캐나다 문화가 망가지고, 집값이 올라가고, 범죄가 많아지고, 실업률이 올라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지)에서 ‘이민자 반대 집회 (Anti-Immigrant Rally)’를 열겠다고 집회신고를 하고 다른 백인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일이 있었어. 이 사실이 밝혀지니까 수많은 밴쿠버 사람들이 경악을 하면서, 그 집회 바로 앞에서 인종차별 반대 맞불 집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지.

결과적으론, 인종차별 행위가 혹시라도 나올지 모를 ‘이민자 반대 집회’ 주변엔 경찰 병력이 배치되기도 했었고, 다른 한쪽에서 개최된 인종차별 반대 맞불 집회에 수백 배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상대 집회를 강력하게 성토하는 바람에 (5명 정도 체포되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별 사고 없이 백인 집회는 조기에 철수하게 되었었다.

뭐.. 우리에겐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이긴 했었는데, 사실 이 사건 만으로는 밴쿠버에선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라고 단언하기 어렵다고 봐. 일단 자기 삶이 괴로운 거지나 깡패 같은 이들은 저런 집회에 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 귀찮았을 거고, 인종차별 반대 집회를 주도하거나 참여했던 백인들도, 어떤 면에서는 자신들도 차별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테니 말이야. 

구조적 차별

혹자는 저러한 깡패 같은 차별을 ‘개별적 인종차별 (Individual Racism)’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구조적 인종차별 (Systemic Racism, Institutional Racism)’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쓰는 말일 거야. 그럼 ‘구조적 인종차별’은 뭐냐 하면 말이야. 누군가가 말하길, 어느 흑인이 백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이사 갔더니, 누군가 집에 돌을 던지고, 가족이 납치당하고 린치 당하고.. 뭐 그런 일을 개별적 인종차별이라고 한다면, 흑인들은 아예 백인들 동네에서 살 꿈도 못 꾸고 평생 슬럼가에서 살면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채 삶을 마치는 것을 구조적 인종차별이라고 한다고 해. 처음에는 이렇게 미국 사회 내에서 흑인 인구가 겪게 되는 삶에 대한 구조적 성찰로 출발했었는데, 점차 범주가 넓어지면서 인종에 대한 편견과 같은 사람들의 의식 구조도 포함되었고, 이후 구조적 성차별 (Systemic Sexism)과 같이 다른 종류의 차별에 대해서도 구조적인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 같아..

이런 구조적 차별이란 개념은 사실, 북미 사회에서도 세대에 따라 생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서, 얼마 전에 캐나다 어느 정치인이, 자신은 자라면서 유색인종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고, 거기엔 어떤 차별이나 따돌림도 없었으며, 그 유색인종 친구들도 지금 모두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캐나다에는 구조적 차별이란 없다고 했다가, 사회에 크게 공분을 일으켜서 결국 사과하고 공직을 물러선 일도 있어. 이렇듯이 구조적인 차별 상황을 하나하나 파악하기란, 막상 자신이 피해자의 위치에 서보지 않는 한 너무나 어려운 일인 것 같아.

얼마 전, 영화 <조커>로 남우주연상을 탄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어느 시상식에서 할리우드 영화산업 내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해 언급을 했었는데, 나 역시 ‘할리우드’, ‘영화산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왠지 백인 남성이 열심히 카메라를 돌리거나 메가폰을 잡고 디렉팅을 하는 상상이 저절로 되어 깜짝 놀란 적이 있었어. 물론 현존하는 훌륭한 흑인 감독도 있고,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탄 사건도 있었지만, 이들이 할리우드가 다양성을 포용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겠지.

나 역시, 처음 냉동 트레이드를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 비슷한 반응을 들었던 적이 있어. 오히려 배관공이나 전기공에는 동양인들이 좀 있었는데, 냉동 쪽은 그야말로 백인 일색이었거든 (밴쿠버에는 흑인 인구가 아주 적은 편이야). 이후 여러 회사와 학교를 전전하면서 몇몇 동양인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나마 이민 1.5 세대나 2세대였고, 동양계 이민 1세대 중에서 냉동 트레이드를 시작하는 사람은 한동안 나 밖에 없었던 것 같아. 그래도 지금은 많이 보이는 것 같지만 말이야.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는 ‘엇, 저 동양인이 여기 웬일이지? 수학을 잘해서 들어왔나?’ 하는 분위기였고, 나중에 수업과정을 곧잘 따라가자 ‘아니, 저 친구는 하는 폼새가 동양인 같지 않은데?’ 이런 반응을 받았었지. 이런 반응에 좀 비위가 상한 것도 있었고, 이후에 언급하겠지만, 이민자라는 이유로 다른 급우들에 비해 금전적 혜택을 받은 것도 있고 해서 좀 더 독하게 공부했었던 것 같다. 하다 보니 성적도 좋게 나와서 나중에는 마치 산타에게 인정받은 루돌프 사슴과 같은 입장이 되기도 했었고.

오히려 현장에 나가서 설치를 하거나 수리 서비스를 할 때엔 내 피부 색깔에 대한 편견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이건 어쩌면, 내가 상대하던 주 고객들 – 맥도널드 매장 매니저, 편의점 매니저 등 – 역시 유색인종 이민자들이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실제 업무현장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편견이 있었는데, 바로 어려 보이는 수리 기사는 경험이 없고 실수가 많을 거라는 선입견이었지. “뭐라고? 캐나다에서도 나이 차별을?” 하며 깜짝 놀랄 일이지만, 사실 여러 곳에서 존재하고 특히 트레이드 업계에서는 아주 만연해있는 편이야. 따라서 저런 편견의 피해를 한번이라도 받았던 서비스 기사들의 경우 백인이건 동양인이건 간에 수염을 기르고 다니게 되더라.  배관공이 직업인 슈퍼마리오가 왜 콧수염을 기르고 다녔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어.

하지만, 광역 밴쿠버 지역 냉동/공조 트레이드엔 아직 여성이 없어. 예전에 한 명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현재 내가 아는 한, 좀 이름있는 회사에 다니는 여성 기사는 없더라구. 도대체 왜 그럴까?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솔직히 나보다 근력이 좋은 여성들이 차고 넘칠 텐데 말이지. 물론 그런 조건을 가진 여성들에게 냉동/공조 트레이드 직업은 허접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경찰이 되지… 뭐 이런 생각일지도 모르겠어.

덩치 큰 백인의 전유물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냉동 / 공조 트레이드에서는 몸체가 작거나 유연한 사람들에게 훨씬 유리한 상황이 많거든. 그리고 또, 고장 수리 / 설치 업무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도 꼼꼼한 성격이 아주 중요한 건데도 불구하고, 특정 집단에 남성 인구가 지배적이라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 이렇게 성비 균형이 무너지거나 다양성이 결핍된다면, 사실 (안전사고 관리나, 제어기기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조응할 수가 없게 된다는 뜻이니까. 쉽게 말해 다양성을 잃은 직종은 도태되고 만다는 거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BC 노동청이나 산업인력 관리공단에서도, 이런 종류의 트레이드에 여성이나 이민자들이 유입되게끔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것 같아. 뭐… 그래 봤자, 결국 금전적 지원을 해주는 것이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 기초과정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었지. 같이 수업을 듣는 급우 중에는 정말 돈이 없어서 교재를 살 수 없었던 백인 결손 가정 출신 아이도 있어서, 단지 유색인종 이민 1세대라는 이유 만으로 교재비와 학비 모두 지원받고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게 좀 미안하게 느껴졌던 적도 있어.

하지만, 내 공부를 도와줬던 정부 지원금은 내가 잘해서 상으로 받은 것도 아니고, 그가 잘못해서 벌로 못 받은 것도 아닌 거였어. 그냥 단지 특정 산업의 생존을 위해 다양성을 도모하기 위한 정부 기관 정책이었던 것이었고, 나는 마침 운이 좋았던 것뿐이었지.

이렇듯, 시스템 내의 문화적 다양성 담보를 위해서, 다시 말해 구조적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선, 정부 정책이 개입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많은 경우, (대학 합격이라든지, 취직과 같은) 어떤 기회를 얻는 것이 개개인에게는 노력에 대한 댓가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그 기회의 분배라는 게, 대개 그 학교나 회사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면이 있잖아. 그러다 보니, 그 기회를 얻거나 잃는 이유가 각자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과는 상관없는 상황이 많이 벌어지지 (같은 이유로 취직에 성공하고 말고 역시, 개개 지원자들의 개별 능력보다는 당시 그 회사의 상황이나 정책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요즘 들어 세계적으로 공정성이나 역차별 논란이 있기도 하고.

결손 가정 출신이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얻은 백인 학생 대신, 성적이 낮더라도 흑인 학생에게 하버드 입학 허가를 주는 것이 공정한가? 절대로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대학 입장에서 봤을 때는 캠퍼스의 문화적 다양성을 담보하기 위해, 나아가 하버드 졸업생들이 국가 정책을 좌우하는 관료가 되었을 때, 다문화 국가인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일일 수는 있다는 거야.

2021년 동경 올림픽에서 트랜스젠더 역도 선수가 참가했는데, 과연 이 선수의 올림픽 참가는 공정한가? 아니라면, 육상 경기 대부분의 메달리스트는 역대적으로 흑인이 많은데, 그렇다면 흑인의 올림픽 참여는 공정한가?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적극적으로 이민을 받는 (그래서 흑인 인구가 존재하는) 다민족 국가와 한국이나 일본처럼 단일민족 국가 간의 경쟁은 공정한가? 흑인 선수도 북미, 유럽처럼 선진국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메달을 휩쓰는데 비해 아프리카 지역의 선수들은 저조한 성적을 내는데, 그렇다면 국가적 경제 규모에 따라서 출전 선수를 제한시켜야 하는가? 이렇듯 나라간 운동 성적을 겨루는 올림픽 경기에서도 공정성을 따지자면 끝이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돼.

마찬가지로, 어떤 사회나 조직에 있어서 문화적 다양성을 담보하기 위한 정책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공정’ 한 결과와 적절한 균형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해.

여기선 그러는 거 아냐

구조적 차별은 개별적 차별과 달리 사건화 되기도 쉽지 않고, 직접 겪는 피해자조차도 ‘이건 원래 그런 거야’ 하면서 딱히 차별로 인식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은밀한 성격을 띠는 것 같더라. 하지만 구조적 성차별이나 인종차별과 달리, 이민자 입장에서 봤을 때 먼저 자리 잡은 자의 텃세와 같은 차별의식 또한 캐나다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거든. 그리고 본격적인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고.

사실 이 텃세와 같은 ‘은근한 차별’은 앞서 말했듯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어서, 서울에서 이십 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귀농한 사람들이 마주치는 시골마을의 텃세만큼 지독한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규 이민자로 처음 밴쿠버에 자리를 잡는 동안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관습과 불문율 역시 이런 은근한 차별에 속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런 텃세가 종종 친절한 충고의 모습을 띠고 있어서 차별행위의 가해자나 피해자 양자 모두 처음엔 차별로 못 느낀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겠지.

2006년, L 마트에 입사하고 정규직 대우를 받게 되자 우린 한인타운 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구입하기로 했어. 그런데, 아내가 아직 비정규직이었고, 나 역시 수입이 그다지 큰 편이 아니어서 시중 은행으로부터 모기지를 얻는데 꽤나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올림픽을 앞두고 밴쿠버 주택시장이 과열 분위기를 보이던 때였는데,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우리는 한번 오른 주택 시장 가격이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하지만 많은 밴쿠버 사람들은 ‘이러다가 올림픽 끝나면 다시 돌아오겠지..’하며 낙관 중이었던 것 같아. 그러던 중, B 섬에서부터 가깝게 지냈고, 이후로도 계속 우리 부부의 영어 공부를 도와줬던 S 할머니께서, 우리가 모기지를 얻는데 고생하는 걸 보고 한마디 하시더라구. “얘들아, 캐나다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집을 일찍 사지 않아…”

S 할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한번 치솟은 집값이 다시 정상화되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밴쿠버 주택시장 상황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아주 큰 사회문제가 되어 버렸지. 그리고 그 뒤로 S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할머닌 “야. 너희들 그때 집 정말 잘 샀다. 너무 스마트한 결정 이었어”라고 얘기를 하곤 하셔. 사실 인터넷이 발명된 20세기 후반부터, 세상은 정말이지 예측불허 방향으로, 그것도 초고속으로 변화하는데, 상대방에 비해 좀 더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판단하려 하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 같아. 하지만, 여기까지는 워낙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우리에게 좋은 의미에서 충고를 해준 거라 하더라도……

밴쿠버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집회를 매달 하고 있었는데, 딱히 뭐 커다란 선전활동을 하는 건 아니었고, 해외 교민 사회에서도 세월호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 정도를 유가족들에게 전달하고 응원하는 모임 같은 거였어. 그러던 어느 여름 날, 항상 집회를 하던 자리를 못 잡고, 길 건너편으로 와서 집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근처에서 핫도그 포장마차를 하던 중동계 사람이 와서 막 항의를 하는 거야. 우리가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서 자신의 비즈니스에 손해를 끼치고 있다면서 말이지. 그러더니 한다는 말이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캐나다에선 그런 식으로 집회를 하지 않아 May be, you people didn’t know that, but we don’t do that way in Canada.”

경찰에 정식으로 신고하고 하는 집회에 한국 사람만 있다고 해서 그렇게 얕잡아 보고 얘기하는 그도 그였지만 (그리고 You People 이라는 표현은 아주 위중한 인종차별 용어거든), 그 순간, 0.5초 동안이나마, “야. 딱 봐도 너도 이민자인데 어디 와서 갑질이야.”라고 생각했던 나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네. 아무튼, 그 ‘딱 봐도 이민자’였던 핫도그 포장마차 아저씨는 그런 표현을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민자들끼리 그렇게 텃세를 부리는 모습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던 기억이 있어 (결국 로컬 비즈니스를 응원하는 차원에서 집회 대형을 조금 뒤로 물리는 걸로 합의했었다).

이렇게 ‘캐나다에선 그러는 거 아냐’로 대표되는 차별은 사실 아주 많은 곳에서 발견돼. 우리가 이민 비자를 받고 캐나다 시민권을 따면서, ‘영국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캐나다 법규 준수 및 캐나다 문화를 존중 하겠다고 서약했지만, 캐나다 문화를 존중하겠다는 것이 기존의 관습이나 기득권 질서를 그대로 따르겠다는 뜻이 아니거든 (그리고 캐나다 이민 정책도 이민자들의 각국 문화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거든).

물론 대부분의 관습이라는 것들이 재미있기도 하고 또 존중할 만한 것도 많지만, 자기 자신들이 광속도로 달라지는 세상에 못 쫓아가고 적응을 못하는 상황을, 신규 이민자들이 캐나다 문화를 망치고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지.

굳이 이민자에 대한 불평이 아니더라도, 공립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내의 경우 최근에 관리직으로 승직을 해서 본교 캠퍼스로 옮겼는데, 그곳에도 몇 십 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부하 직원들이 있고, 그들에게 번번이 ‘여기 본교 캠퍼스에서는 그런 식으로 일하는 거 아냐’라는 얘기를 듣는다고 해. 그들은 어쩌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은 몇 십 년째 그대로인데, 지방 캠퍼스에서 아시안이 한 명 관리자로 오고 나서부터 일하기 불편해 졌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입에서 “Go back to your country”라는 말이 언제 나올지는 모를 일인 거지.

밴쿠버 시에서 커머셜 드라이브 지역은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비즈니스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유명하고, 또 밴쿠버에서 가장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한번은 이곳에서 <소호의 마르크스 (Marx in Soho)>라는 연극을 상연한 적이 있어.

역사학자 하워드 진 (Howard Zinn) 원작의 이 연극은 백여 년 전에 타계한 마르크스가 저승의 행정착오로 예전 런던 소호가 아닌 현대 뉴욕 소호로 돌아오게 되지만, 자본주의가 굳건히 살아있고 빈부격차가 극심해져 있는 걸 목도하고 절망한다는 내용으로, 설정부터 너무 마음에 들어 영어로 상연하는 연극임에도 보러 가기로 덜컥 마음을 먹었었지. 근데… 갔더니 극장에는 정말 백인 노인네들로 가득 차있었고, 이 연극이 아니더라도 워낙에 이 동네 고인 물들인지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시끌시끌하더라.

연극 시작 전, 오프닝 쇼로 당시 미국의 대 이란 봉쇄 정책과 그를 추종하는 캐나다 정부에 대해서 짧은 강연이 있었는데, 청중 대부분이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당시 캐나다 보수당 정권에 대해서 반감이 있었는지, 대부분 강연자에게 강력한 동의를 표하고 있었어. 그러던 중, 어디선가 자신을 이란에서 온 난민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일어서서, 현재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정권의 인권 파괴 만행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이렇게 책상에 앉아서 미국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민주주의 붕괴를 안 겪어봐서 하는 얘기라고 비판하는 거야.

예상치 못했던 Hackling (토론, 강연 중 난입하는 일) 때문에 분위기는 금세 난장판이 되었는데, 심지어는 몇몇 청중들이 그 이란계 난민을 향해 “이 강연이 싫다면 여기서 나가라”라고 까지 얘기하더라. 순간 ‘강연이 싫으면 나가야 한다면서, 왜 자기들은 보수당 정권이 십 년 동안 집권한 캐나다를 안 떠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떠들썩한 분위기에 숟가락 얻는 게 싫어서 (그보다 허접한 영어로 조목조목 따지려고 보니 자신이 없어서) 입 다물고 있었다.

결국 연극을 끝까지 다 보긴 했지만, 바로 한 시간 전에 난민을 향해 그런 차별적 발언을 하고도 연극이 끝나고 커튼콜을 할 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시작하는 <인터내셔널가>를 합창하는 노인네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해지더라.

차별에 대한 대응

먼저 이 ‘차별 (discrimination)’ 이라는 건 캐나다 사회에서 아주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단어이기 때문에, 사실 이렇게 글로 남기기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야. 특히 캐나다는 인권법 안에 ‘차별금지’가 명시되어 있고, 한편으로는 최근 들어 과거 미대륙 점령 시 원주민 상대의 (가톨릭 기숙학교 등의) 끔찍한 범죄행각이 차례차례 밝혀지고 있어서 더 그래. 또 최근 전 세계적인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 (PC Political Correctness> 유행 덕에 캐나다 내에선 구조적 차별에 대한 문제가 정치권이나 사회 각 분야에서 화두가 되는 상황이어서, 이럴 때 차별을 언급한다는 건 종종 양자 간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거지.

귀여운 차별이나 깡패 같은 차별에 대한 대응은 오히려 쉬운 편이야. 누가 봐도 명백한 차별행위거나 폭력행위 이기 때문에 맞서거나 도망가면 되거든. 그게 안되더라도 공권력이나 관리 감독기관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떻게든 해결되는 경우가 많고 말이지. 또, 이 모든 게 귀찮더라도, 사실 그 순간만 어떻게 넘긴다면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구조적 차별은 여러 가지로 대응이 골치 아픈 경우가 많아.

예를 들어, 내가 L 마트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마침 한국인 고객이 와서 한국말로 도와주고 있었어. 그런데, 주변의 다른 고객이 그게 귀에 거슬려서 인상을 썼는지, 아니면 부서 매니저한테 가서 직접 컴플레인을 했는지 그랬나 보더라구.

L 마트 회사의 공식 규정은 다문화 존중 주의라서, 필요에 따라서 매장에서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를 써서 고객을 도와주는 걸 권장하고 있고, 타인을 무시하거나 타 문화를 배격하는 고객은 거부할 수 있는 (실제로 전화에 대고 내 영어를 조롱한 고객은 전사 차원에서 입장이 불가 된 적이 있었어) 원칙이 있지만, 뭐 그런 방침이야 현실적으로는 매출 상황이나, 직원들 사기나.. 뭐 그런 걸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집행되는 법이겠지.

그 당시 부서 매니저와 내 관계는 거의 친구처럼 친해서 농담이나 어려운 부탁도 쉽게 쉽게 할 수 있는 사이였는데, 그래서였는지 매니저가 나에게 매장에서 한국말을 쓰는 걸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더라. 나로서는 그냥 알았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었는데, 그날따라 까칠해져서, “너 그거 지금 한 말, L 마트 공식 입장이냐?”라고 되물었고, 순간 분위기가 아주 서먹해 지면서, 얼굴이 시뻘개진 매니저가 그만두자고 해버리 더라구. 이게 무슨 싸움이었다면 ‘이겼다’ 하고 자축할 상황일지 몰라도, 그동안 친했던 관계가 한 순간에 틀어지는 거였어 이후 그 매니저가 다른 매장으로 전근 하기 전까지, 한번 서먹해진 사이는 계속되더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걸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시기인 것은 맞지만, 충분하고 지속적인 계몽과 합의과정이 없이, 지금은 좀 징벌에 대한 공포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상황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있거든. 이럴 경우, 사람들의 차별적인 행동을 어떻게든 조심스럽게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마음속에서는 자신과 상대방 사이에 놓인 깊고 깊은 골을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 때문에, 소수자 (minority)로 사는 입장에서도 이 상황이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건 조심할 수밖에 없어지더라.

최근 한국사회에서 많은 미투가 있었고, 초기에는 “그렇게 힘들었으면 당했을 당시에 얘기했어야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제 와서 일을 키우느냐?”라는 의혹이 많았었고,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물론, 차별행위나 성추행에 대해 쉽게 쉽게 경고를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실수를 했든, 확신을 가지고 가해를 했든지 간에 그 가해자가 쿨하게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면서 하하호호 웃으면서, 화목하게 사태가 정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세상이 그렇게 쉽게 쉽게 돌아가지 않잖아.

그렇게 성추행이나 성차별, 나와 같이 인종차별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행동에 대해 경고를 하려면, 종종 주변 인간관계를 다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은 것 같더라. 군대 시절에 구타 관련해서 소원수리를 쓰거나 헌병대에 신고를 했다가 그 부대가 작살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민감한 사건의 방아쇠를 당기기 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진심

예전에 다운타운 거리에서 일을 보는 도중, 어떤 백인이 다가와 어딘가를 물어오는 거야. 마침 잘 아는 곳이어서 이렇게 저렇게 답변을 해주고 나니, 그 백인이 아주 예의 바르게 목례를 하면서 “씨예씨예”라고 감사를 하더라구. 뭐, 사실 한류 덕택에 한국식 엑센트가 널리 알려지기 전에는 중국인으로 종종 오해를 받은 적이 있던 터라, 웃으면서 “어? 나 중국어 못하는데 ㅋㅋ”라고 했더니, 정색을 하면서 이번엔 또 연신 사과를 하더라구.

그 사람이 아시안에 대한 어떤 스테레오 타이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감사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말실수 한 것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같이 웃으며 헤어졌어. 개인적으로도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고.

사실, 인종차별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은 상대방의 악의를 느끼는가 아닌가가 아닐까 생각해. 말해놓고 보니 피해자의 눈물이 가장 명백한 증거라고 하는 것처럼 뜬구름 잡는 얘기로 들리기도 하네. 사실, 내가 악의를 못 느꼈다고 해서 인종차별적 행동을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애매하지. 그리고 캐나다에서 차별행위 (Discrimination) 가 법적 규제 대상인 범죄행위라는 걸 고려했을 때, 이렇게 피해자의 반응에 따라서만 유/무죄 여부를 판단 하는 건 아주 위험할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마치 우리가 같은 말을 해도 어떤 건 농담처럼 들리고 어떤 건 공격으로 들리는 상황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차별을 당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내가 느끼는 상대방의 악의 여부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개인적으로 아직도 이민생활 중 가장 기분 나빴던 차별적인 경험은 오히려 같은 한국 이민자에게 받았었어. 한국에 있을 때부터 안면이 있던 사이여서 각자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데, 내가 슈퍼마켓에 취직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식사를 하는 자리를 가졌었거든. 그러면서 근황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아… 참.. 한국에선 예술 하던 양반인데, 여기서는 이렇게 컴퓨터나 고치고 있으니……”라며 내 처지를 안타까워하는데, 그 말을 듣는 즉시 엄청난 모멸감을 느꼈다는 기억이 있어.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악의가 전혀 없이 내 신세를 진정으로 걱정하고 아쉬워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그건 사실, 많은 걸 포기한 채 이민을 결정한 나의 선택을 무시하는 발언이었고, 현지 기업에 취직하기 위한 나의 구직활동 노력을 폄하하는 발언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선택했던 ‘컴퓨터 수리기사’라는 직업을 멸시하는 발언 이라고 느껴졌었고 말이지.

뭐. 그렇다고 버럭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공손하게라도) 밝혔어야 했다고 봐. 당시 그에게 악의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의 말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해 터놓고 얘기를 했어야 했다는 거지. 아무튼, 꼭 인종차별이 아니고 다른 식의 차별이라도 상대방이 의도하든 아니든 간에 그의 발언에서 구린내를 느끼는 경우가 존재하더라.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지만.

아내의 옛 (원어민) 직장 동료 중에 D 군은 자기 원칙이 아주 뚜렷한 사람이야. 윤리적 채식주의자에다가 BC 주 환경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기도 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기도 하고, 시장/금융 중심 경제 시스템에 대해서도 아주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가장 최근까지도 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니지 않기도 했었지, 공익재단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만을 벌고 있고 나머지 시간엔 글을 쓰는데 전념하는 친구야.

아무튼 어느 날, 우리 둘 중 누구 생일이었나? 해서 같이 만나서 노는데, 선물로 <스크래블 게임 (Scrabble : 영어 단어를 조합해서 맞추는 퍼즐게임)>을 가지고 와서는 그걸 같이 하자는 거였다. 순간, ‘이건 날 멕이는 건가?’ 하는 감정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동시에 예전에 읽었던 ‘타케이코 이노누에’의 만화 <리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덩치 큰 말썽꾸러기 ‘노미야’가 휠체어 농구를 하는 장애인 ‘키요하루’를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갑자기 ‘키요하루’에게 일대일 승부하자고 해서 극중 긴장감을 일으키거든. 그러더니, 난데없이 자기는 휠체어 농구는 초보니까 핸디캡을 주는 셈 치고 ‘키요하루’의 프로 선수용 휠체어를 빌려달라고 요청하지.

이 시퀀스가 시작할 때는, 어떤 독자라도 장애인 스포츠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노미야’가 일대일 시합을 제안할 때 어느 정도 불쾌함을 느끼게 되지만, ‘노미야’의 핸디캡 발언으로, 진정 장애인을 차별하는 건 누구였는지 두 번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휠체어 농구는, 장애인 경기가 아니라 그냥 또 다른 스포츠였던거지.

그래서 결국 D 군과 같이 스크래블 게임을 하게 되었고, 핸디캡으로 우리 집에 있던 콘사이스 사전에 있는 단어만 쓰는 것으로 제한을 두었었어. 그래도 D 군이 이겼던 걸로 기억하지만, 생각보다 종반까지 비등비등하게 갔었던 걸로 기억해. 아무리 영어 단어를 가지고 하는 게임이지만, 게임의 속성을 이해하는 게 승부에도 영향을 줬던 거지.

아무튼 이 일화를 아내의 또 다른 (원어민) 동료였던 S 군에게 얘길 했더니, “너희들한테 스크래블을 하자고 했단 말이야?”하면서, 마치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과 같은 표정을 짓더라. 과연 누가 더 차별적인 행동을 했던 걸까?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누가 더 차별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적어도 나는 그때, 두 친구 모두에게서 우정을 느꼈고, 각자로부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중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너랑 친구들이 다같이 환송회를 해준 날이 있었잖아? 그 날, H 형이 나를 붙잡고 그러더라. “왜 스스로 ‘인종차별’을 감수하고 그런 나라로 가려고 해? 난 절대로 이해가 안 된다” 하면서 말이야. 전형적인 86세대로 학생운동 현장에서 종종 선봉에 섰던 그가, IMF가 터지고 정권이 바뀌고 나자 예전의 인맥을 활용해서 벤처기업을 운영할 때부터, 나는 사실 무척 못마땅했었거든. 자신의 과거 운동 경력을 팔아서 현재의 기득권을 다지는 (차별을 덜 받을 자리로 오르려고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데, 그런 얘기까지 듣게 되니까…  “아.. 정말… 형 같은 사람이 바로 내가 한국을 떠나는 이유예요” 라고 못된 말을 한마디 해주고 싶더라. 결국  그냥, “형은 절대 이해를 못하실 거예요”라고 알쏭달쏭한 말만 남기고 자리를 일어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