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소매업종에서 일을 했을 때 얘기입니다. 거기서 오랫동안 일을 해 온 (보통 백인 베이비 부머 세대) 동료 직원들은 끊임없이 좋았던 옛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는 했어요. “예전에는 회사 연말 회의를 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했는데…”, “예전에는 판매 보너스 만으로도 월세를 다 낼 수 있었는데…” 하고 말이죠. 그럴 때마다 저는 “그때, 랩탑 컴퓨터 한 대가 얼마였는데? 3천 불? 지금은 3백 불이야.” 하면서 김 빠지는 얘길 하곤 했지만요. 그도 그럴 듯이… (무척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그 당시 제 입장에선, 그렇게 (완벽한 영어로) 끊임없이 불평만하던 동료들의 업무능력이 무척 못마땅했었거든요.
매장에 손님들이 가득 차고, 계산대에 사람들 줄이 길게 늘어서도, 그냥 아랑곳없이 자기가 친한 손님과 주구장창 수다만 늘어놓는다든지 (본인은 한 명에게 최고의 고객 서비스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 49명의 고객은 다른 동료들이 떠맡아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새로운 컴퓨터 기술에 대해 전혀 받아들일 생각을 안 하고 번번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말이죠. (역시나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래서 같이 일하던 아시아계 이민자 동료들과 같이 종종 인종차별적 험담을 하고는 했죠. “역시 백인들은 게을러…ㅋㅋㅋ…” 뭐 이런 식으로 말이죠.
얼마 전 어느 방송에서 공무원의 장단점이 나온 적 있지 않나요? “장점 – 내가 안 짤린다. 단점 – 저 새끼도 안 짤린다.” 이런 식으로요. 근데, 이건 비단 공무원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농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일을 하다 보면 동료들 때문에 답답한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죠. 왜 안 그렇겠어요? 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저 마다, 업무 진행이, 회사 전체가, 혹은 전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말이죠. 일반 사기업 직장인들 사이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어요. 회사 생활의 3대 미스터리라는 건데, “첫째, 저 새끼는 어째서 아직 안 짤린 거지? 둘째, 이 회사는 어떻게 아직 안 망한 거지? 셋째, 나는 왜 안 짤리고 있는 거지?”
‘최규석’ 작가의 <송곳> 명대사 중 하나인 “모두가 같은 무게를 견딜 수는 없다.” 라는 말을 되새기고 되새기면서 일을 한다 하더라도, 막상 동료들 중에 업무 스타일이 유독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참아 넘기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일의 진행 결과에 따라서 내가 떠맡아야 할 업무 강도라든지, 내가 얻는 평가나 인센티브가 달라지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죠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사정이 어떻든 간에 말이죠). 그리고 단지 각기 다른 업무 능력이나 스타일을 떠나서, 게으르거나 업무를 고의적으로 방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 관리자가 와서 업무에 뒤쳐지는 직원을 언급하면서, “회사 실적 악화로 인해 인원감축을 할 예정인데, 원래 17명이 하던 일을 16명이 감당하게 되면 일주일에 3시간 정도 야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원감축에 찬성한다면 150만 원의 특별 보너스를 주겠다.” 라고 제안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일을 위한 시간 (Two days, One night, 2014)
제작 / 배급 : Les Films du Fleuve, Radio Télévision Belge Francophone (RTBF), Belgacom
감독 : 장 피에르 다르덴 / 뤽 다르덴 (Jean-Pierre Dardenne, Luc Dardenne)
각본 : 장 피에르 다르덴 / 뤽 다르덴 (Jean-Pierre Dardenne, Luc Dardenne)
출연 : 마리옹 코티아르, 파브리지오 론지오네
*** 이후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전 좀 잘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먼저, ‘딸랑 150만 원에 이제껏 같이 일해 온 동료를 팔아? 그것도 우울증 투병 때문에 생활이 힘든 동료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것도 뭐, 생계가 엄청나게 곤란해서 당장 150만 원이 반드시 필요해서 그런 사람들도 많지 않아요. 새 남친과 동거에 들어가니 가구와 가전제품을 새로 사야 한다든지 (150만 원으로?), 집 인테리어를 바꾸기 위해서라든지.. 뭐 주로 그런 이유로 나와요. 물론 개개인에게 필요한 금전 지출의 합리성을 제 임의의 잣대로 평가질 할 수는 없겠죠. 또, 개인주의를 더 중요시하는 유럽 사회니까, 타인의 실직 여부보다는 당장 내 주머니 속의 150만 원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그래도, 투병 중인 동료를 팔기에는 금액이 너무 작지 않나요?
그보다도, ‘동료의 정리해고와 보너스 150만 원,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상황에 어째서 모두가 침묵하는가’하는 의문도 당연히 따랐죠. 산드라와 다른 직장동료들 간의 대화에서 “양자택일을 요구한 건 내가 아니야!”, “나도 아니야!”라는 언쟁이 있기는 했지만, 누구나 다 알지 않나요? 누가 그 양자택일 아이디어를 냈는지? 심지어 사장이 자기 입으로 말했잖아요. 작업반장에게 “직원들이 원하는 것이 보너스인지 산드라인지 알아보라”라고 했다고. 제 상식으로는, 만일 저렇게 쉽게 동료와 돈을 비교해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사장이 있다면, 당장 머리끈 매고, 어깨 맞대고, 피켓 들고, 뭐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거든요. 근데, 영화는 1박 2일간 직장 동료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자기를 위한 투표를 설득하는 산드라만을 진득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전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산드라가 애초부터 말썽 직원이었다면 어떨까? 병을 핑계로 매번 납기 일정 코 앞에서 병가를 내고, 혹은 일이 쌓여있는데 중간에 조퇴를 하고, 대화라도 좀 할라치면 계속 불평만 늘어놓고, 콱 죽어버리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동정하지 말라고 하고, 일 하다가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갑자기 휴게실에 처박혀 계속 울고… 뭐 이런 설정 말이죠 (제 주변 동료가 이렇다는 얘긴 절대 아닙니닷!).
물론, 동료들은 산드라가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뭐, ‘잘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죠. 그녀의 우울증이 얼마나 위중했는지,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사실 본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암튼 이런 상황이라서 동료들이 보너스건 뭐건 간에, 산드라와 같이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면, 그러면 좀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만일 이런 경우라면, 그리고 관리자가 앞서 언급했던 저런 제안을 한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구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신체에 영향을 끼치는 질병에 비해 정신 활동에 장애를 주는 질병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건 국가 대표 축구팀이 예선을 통과하지 못할 때마다 ‘정신력’을 운운하는 한국뿐만 아니라, 서구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작년에 캐나다 BC 주 수상은, 코로나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와 펜타닐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약물중독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바람에 엄청난 스캔들이 된 적이 있어요 (곧바로 사과하긴 했습니다. https://www.cbc.ca/news/canada/british-columbia/john-horgan-apologizes-for-comments-about-b-c-s-overdose-crisis-1.5653803). 앞서 말한 저 전제 (산드라가 말썽 직원이라는)에서 있어서도, 만일 산드라의 업무능력 저하가 신체장애에 의한 것이었다면 또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 몰라요. 대부분의 동정심은 시각적 자극에 더 많이 의존하니까요. 반면에 산드라의 우울증 같은 경우는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의지박약’ 정도로 생각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라면, 게다가 본인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다수결 투표에서라면, 14대 2로 산드라보다 보너스가 선택되었던 건 말이 되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라면요? 물론 꽁돈은 좋죠. 근데 야근을 워낙 싫어해서 의리의 사나이 코스프레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걸 떠나서, 이런 의문을 가질게 될 것 같아요. 노동자들의 근태를 평가하는 건 고용주가 할 일인데, 백번 양보해서 만일 고용주가 직원 근태 파악을 세세하게 할 여력이 없다면 응당한 급여를 지불하고 중간 관리자에게 위임해서 할 일인데 말이죠. 왜 같은 동료 노동자에게 평가질을 하게 만드는 거죠? 그렇다고 관리자 급여를 주는 것도 아니면서 말예요. 하지만 사실, 요즘 이런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심지어 몇몇 고객 서비스 관련 업종에서는, 고객들에게 직원들의 근태를 평가해달라고 별점과 같은 설문조사를 보냅니다. 물론, 고객들에게 회사 관리자의 일을 맡기면서 응당한 급여를 지불하거나 하는 일은 없어요. 그냥 ‘고객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는 명분만 쌓는 거죠. 잘해야 상품권 당첨 기회를 미끼로 하고 말이죠.
한 노동자의 근무태도가 주변 동료는 물론 사회 전체로부터 평가받는 세상. 어쩌다가 우린 이런 세상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일단 언젠가부터, 게으름이나 능력 부족, 노오력 부족에 대해 죄악시하는 가치관이 도입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징어 게임>에서 역설했듯이, 약자에 대한 한국 전통 배려 문화인 ‘깍두기’ 문화가 사라지고, ‘쫄리면 뒈지시던가’ 문화가 팽배하게 되었구요. 능력과 노력에 걸맞은 공정한 보상만이 사회정의라고 생각하는 건 영화의 배경인 2014년 벨기에도 마찬가지라서, 극 중 동료인 이본의 아들(이름은 모르겠습니다)은 산드라에게 150만 원 보너스는 (산드라가 병가를 내고 쉬는 동안) 자신들이 열심히 일한 대가라고 “그걸 왜 당신에게 줘?!” 하며 따지듯이 얘기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이 정당하고 공정하게 평가받는 일은 사회경제학적으로 중요합니다. 자신의 노력이 그에 걸맞은 성과로 당연히 이어지길 기대하는 건 좀 잔혹한 일이긴 하지만, 가능하면 그게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구요. 하지만, 노력한 사람들이나 능력 있는 사람들이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능력 없거나 노력 안 한 사람들이 대신 징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이상합니다. 아파서 일에 못 나오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안 좋고,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원래 게으른 사람이라는 이유로, 일터에서 쫓겨나거나 자신의 생존권을 위협받는 사회는 좀 아니지 않나요?
게다가, 산드라가 해직을 당하는 이유는 정확히 따지자면 그녀의 생산력이나 근태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중간 관리자에게 직원 관리를 맡기는 사장 입장에서 산드라의 근태에 관심이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영화 말미에서 사장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16명으로도 충분히 돌아가는 공장에 17명은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죠. 그게 자동화 덕분인지, 잔업 덕분인지, 수주물량 저조 탓인지는 몰라도 말이죠. 다시 말하자면, 저임금 국가와 경쟁이 더 치열해지거나 공장 자동화 설비가 늘어난다면, 언제든지 새로운 인원감축이 생길 수 있다는 얘기가 될 겁니다. 지금은 산드라의 의자가 빠졌지만, 언젠가는 내 의자가 빠질 수 있는, (공지영 작가의 표현대로) 그런 거대한 의자 놀이가 이 사회 전체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산드라의 근태나 생산성에 대한 불만 때문에 보너스를 대신 선택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 아닌가요? 그녀를 향했던 손가락이 언제든지 나에게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사실, 이런 일로 사장의 도덕성만을 비난할 수는 없겠죠. 17명 인건비가 16명 인건비 + 잔업수당으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고용주의 수익이 엄청나게 늘어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장 말대로 아시아 국가 기업과 경쟁하느라 회사 재정상태가 악화된 상태가 맞을 수도 있고요 (물론 그걸 경영혁신이나 새로운 시장 발굴이 아니라 인건비 감축만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건 참 안이하긴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사실 전 세계, 특히 서구 선진국 제조업 분야가 모두 가지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지구 반대편 나라에 있는 회사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기업주들에게만 무조건 책임을 지우는 일은 가혹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기업들의 무차별적인 가격 경쟁이 불가피하다면, 그래서 고용의 탄력성이라는 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적어도 노동자들의 생계, 생산력, 가정, 교육 그리고 존엄성 정도는 국가에서 책임져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납세자잖아요.
40년대에서 70년대까지 세계 경제를 주도했던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는 70년대 중반부터의 1,2차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 그리고 저하된 자본의 이익때문에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이 들어서면서 계층별 소득이 양극화되고, 일반 노동자 가정의 구매력과 생활수준이 낮아지게 된 거죠. 또, 노동자들의 저하된 구매력에 맞춘 저가시장을 만들기 위해서, 서구 대기업 들은 아시아권 나라에 저비용 생산기지를 앞다퉈 건설했던 거구요. 본격적인 가격경쟁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업의 판매 수익은 줄어들고, 동시에 기업들의 고용비용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다시, 예전 소매업종에서 일을 했을 때 얘기로 돌아가자면, 베이비 부머들 입장에선 예전에 10명이 같이 했던 일을 지금은 4명이 하게 된 셈인거죠.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제품을 취급하고, 개인용 컴퓨터 제품의 변화도 매일매일 바뀌어 공부할 것도 많은데 말이죠. 결국,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강도가 높아진 상태에서, ‘일을 잘한다’, ‘생산력이 높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수준도 엄청나게 달라진 셈이에요. 지금의 나는 산드라의 근태와 생산력에 불평을 하고 있지만, 기업이 기대하는 노동자들의 생산력 수준은 또 언제 바뀌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도 됩니다. 내가 그 변화에서 낙오한다면, 언젠가 동료 직원들은 나와 150만 원 중 양자택일을 요구받게 될지도 모르죠. 그런데도, 한가하게 150만 원 보너스 탄 돈으로 쇼핑계획이나 세울 시간인가요?
그동안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담담하게 비추는 영화를 만들어 온 다르덴 형제는 “영화가 착취당하는 사람을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도 없고, 프로파간다(선동·선전)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약자 편에 서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감독은 관객에게 어떤 해법이나 방향을 제시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실제 일어날 법한 일들을 묵묵히 보여주기만 할 뿐이죠.
하지만, 산드라에 대한 동료들의 지지가 개인 간의 신뢰나 우정, 은혜에 대한 보답 등에만 기대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현실적이지만, 그만큼 답답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말미에서 산드라가 “남을 해고시키고 내가 복직할 수는 없어요.” 라며 사장의 제안을 거절하는 장면 역시, 마치 ‘남을 위해 희생하는 착한 산드라‘라는 식으로 오독되기 쉽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고용안정이 이루어지는 의자놀이 시스템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장면같은 게 하나 나와줬다면 좋았을텐데… 하는건 저만의 기대였을까요? 사실 연대라는 건 사람들 간의 친분을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보다 철저하게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적 이익에 기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시) ‘최규석‘ 작가의 <송곳>에서 나왔듯이, 연대란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켜내는 일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서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나와 업무 스타일이 안 맞는 사람들과도 여전히 연대를 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P.S. : 산드라에게,
직장동료간에 대립이 생기고, 그들 가족 내에서도 다툼이 생기고 하는 건 당신 탓이 아니예요.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의견이 있고, 때때로 타인의 의견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일이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3자의 문제 때문에 가족이 결별하거나, 직장을 그만두는 일은 거의 없죠.
아마도 오늘도 직장동료들은 또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같이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이본은 아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산드라,
너무 염려말고 당신의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일을 멈추지 말기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