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참 신기한 집단입니다. 사실 동일한 공간에서 거주하기 때문에 생기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제외하고는, 딱히 구성원을 묶고 있는 어떤 결속력도 무의미해 보입니다. 물론 출산과 양육이라는 과정이 있죠. 대부분의 포유류는 자식을 출산하고 나면 그들이 홀로 독립할 때까지 부양을 하게 됩니다. 직립보행 덕에 수태 기간이 짧아진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엔 아이가 태어나고 스스로 걷고 먹이를 먹을 떄까지 다른 포유류에 비해 더 장시간의 산후관리가 필요하다고 해요. 그리고 양육과정에 있어서도, 먹이를 나눠주고 거주지를 만들고, 외부의 공격이나 혹독한 자연으로부터 자식들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가정에서는 ‘사회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인성교육’도 이루어집니다.
이때, 부모는 ‘보호자’이자 ‘멘토’로서 역할을 하는데요, 사실.. 누군가의 멘토가 된다는 건,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저절로 자격이나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죠.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과 함께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단지 멘티가 아니라 피부양자인 자식의 입장에서 보는 부모는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죠. 부모가 실제로 어떤 모습을 보이든 간에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식이 성장하고 사회화를 통해 시야가 넓어지면서 자기 부모에 대한 환상이 깨지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빠’가 ‘까’로 돌변하는 건 일순간이듯이, 부모에 대한 신앙은 하루아침에 경멸로 바뀌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친구 같은 아빠’, ‘친구 같은 엄마’가 되고 싶어하지만, ‘보호자’이자 ‘멘토’가 친구 같은 사이가 되기는 사실 정말 힘들죠. 말을 걸면 걸수록 상처만 주고받는 시점이 오면, 가족 간에는 커다란 벽만 존재하게 됩니다.
자식을 보육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수준부터 합당한 보육으로 인정받고, 어디까지 양육의무를 방기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유명 브랜드의 롱패딩을 자식에게 사주지 못하면 양육의무 방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는 돈 버느라 바빠서 자식과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고 해서 양육의무 방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가족관계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화감독들이 가족이라는 집단을 재정의하기 위한 영화를 만들고 있죠. 대표적으로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츠’같은 감독이 있겠네요.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 (2006)’ 역시,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 (Little Miss Sunshine, 2006)
제작 : 빅 비치 필름즈 (Big Beach Films), 서치라이트 픽처스 (Fox Seachlights Pictures)
배급 : 서치라이트 픽처스 (Fox Seachlights Pictures)
감독 : 조너던 데이턴 (Jonathan Dayton), 밸러리 패리스 (Valerie Faris)
각본 : 마이클 안트 (Michael Arndt)
주연 : 그렉 키니어, 스티브 캐럴, 토니 콜렛, 폴 다노, 앨런 아킨, 애비개일 브래슬린
영화 속 ‘리처드 (그렉 키니어 분)’는 세상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승리 철학이 담긴 책도 출판해서 팔려고 하죠. 정작 자신은 재정적으로 위기 상태고, 부인 ‘셰릴 (토니 콜렛 분)’ 과는 이혼 직전에, 아들 ‘드웨인 (폴 다노 분)’과는 대화가 단절된 상태입니다. 딱 봐도 위태위태한 이 가정에, 연인과의 결별로 자살을 기도했던 셰릴의 동생 ‘프랭크 (스티브 캐럴 분)’와 마약 복용 때문에 양로원에서 쫓겨난 리처드의 아버지 ‘에드윈 (앨런 아킨 분)’까지 결합합니다. 붕괴 직전의 이 가정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와 여러모로 닮아있습니다. 언제 퍼질지 모르고, (차를 움직이게 하는) 클러치가 고장이 났다는 점에서 그렇죠. 그래서인지 영화내내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합심해서 버스를 미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지는데요, 마치, <지지고 볶고 싸울 때 싸우더라도, 때가 되면 모두가 힘을 모아 밀어야 하는 집단>이 바로 가족이라는 걸 말해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니체를 숭상하고, 항공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묵언수행과 함께 스스로 단련하는 드웨인은 리처드와 다른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 바보 같은 가족으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죠. 그가 항공학교에 가려는 이유는 기숙사에 살 수 있기 때문도 있지만, 리처드가 주장하듯이 수많은 경쟁 끝에 승자와 패자로 북적이는 이 사회에서 벗어나, 광활한 창공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줫같은 미인대회의 연속’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죠.
여동생을 잃어버렸을 때조차 철저히 지켜내던 그의 묵언수행은, 결정적인 절망에 봉착하는 순간, 세상을 향해 내뱉는 욕지거리와 함께 깨지게 됩니다. 어쩌면 그의 묵언은 자기 단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단절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스스로 봉인해둬 왔던 것일테죠. 그가 묵언을 깼다고 해서 세상과 곧바로 화해할 수 있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소통이라는 건 그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게 비록 욕지거리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물론, 그렇게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하더라도 영화 속에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절망하고, 욕을 내뱉고, 세상에 저주를 퍼부은 다음에도 버스는 밀어야 했습니다. 저에게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 중에서 최고의 장면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연장자 가족 구성원이 연하의 구성원에게 멘토 역할을 하는 장면이 없는 건 아닙니다. 아쉽게도 영화에서 옥에 티처럼 보이는 장면이죠. 에드윈이 손녀 ‘올리브 (애비개일 브래슬린)’에게 “질 것이 두려워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진짜 패자(loser)야”라고 한다든지, 프랭크가 드웨인에게 프루스트를 인용하면서 “지나고 나면, 나를 힘들게 했던 날들이 내 최고의 나날들이었다. 그날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라고 조언하는 건, 마치 리처드가 “승자와 패자의 차이점이 뭔질 아니? 승자는 절대 포기를 안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철이 덜 든 것처럼 보이는 말썽꾸러기 연장자가 가끔 툭 던지는 말이 사실은 인생의 진리였다’는 도식은 헐리우드 영화나 시트콤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는 장치이기는 합니다. 최근에는 영화 ‘미나리 (2020)’에서 윤여정 씨가 그 역할을 했었죠. 물론, 여기선 딱히 관객들에게 교훈을 주려는게 주목적인 것으로는 보이진 않아요. 그냥 그 상황에서 그 장면에 잘 녹아드는 대사를 집어넣으려고 한 것이겠죠. 뒷감당을 생각 안하는 말썽꾸러기 에드윈이나, (자칭) 전미 최고의 프루스트 연구자인 프랭크가 각각 할만한 대사이긴 합니다만, 그렇더라 하더라도, 이런 격언 한마디로 긴장이나 갈등이 해소되는 연출은 영화 전체 분위기에 좀 안맞는 장면으로 보이긴 하더군요.
리처드라는 캐릭터는 여러 가지로 제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아버지께선 당신이 젊으셨을 때 출판사 세일즈를 하셨는데요, 7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하던 이른바 <월부장수>라고 불리던 ‘방문판매’를 하셨다고 합니다. 덕분에 저희 집에는 제가 어릴 적부터 무척이나 책이 많았어요. 특히, 리처드가 썼을 법한 ‘승자를 위한 107가지 법칙’, ‘1분 만에 상대를 매혹시키는 대화의 기술’ 등, 당신 스스로 관심이 많았던 영업, 대인관계, 처세술에 관한 책들은 전집으로 몇 질이나 있을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성공에 관한 책들이 책장에 가득했지만, 애초부터 유복하지 않았던 집안형편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져서 이사를 몇 번이나 다녀야 했었네요. 그럼에도, 그 책들은 마치 부적처럼 책장에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삶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아직 아버지의 청춘에 대해 같이 뒤돌아볼 여유는 없었을 때, 사실 전, 그런 책들이 집에 꽂혀 있는 것을 고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이 전쟁터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일어서서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을 역설하는 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혹은, 패자가 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공포감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는 책의 의도를 역겹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고요.
이렇듯이 아이러니하게도, 화해와 소통으로 이 사회가 운영되어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던 저는, 정작 아버지와, 그리고 당신의 세계와는 화해와 소통의 가능성을 접어두었습니다. 걍팍한 제 고집은 오히려 대결과 승부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던 거였죠. 어쩌면 너무나 얇디 얇아서 금세 깨지기 쉬운 저만의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버지와의 소통을 닫고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건 아버지 쪽도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군대에 갈 무렵 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고된 훈련에 대한 불안이나, 20대의 메인 이벤트를 그냥 날려버리는 것에 대한 불만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장 두려웠던 건, 저 자신이 어떤 인간으로 변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거였죠. 2년 반 동안 끊임없이 고취될 적개심과 전투욕, 그리고 공고한 계급질서에 대한 교육이 절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무척 무서웠습니다. 그런 공포심이 스며들면 들수록, 전 제 가치관을 간직할 수 있도록 강한 정신무장을 원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선택한 방법은 옛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하는 거였어요. 특히 사기열전을 읽어가면서 피바람나는 춘추전국 시대 속에서 자기 사상을 지켜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우스운 것은.. 그런 열국지, 사기, 십팔사략 등을 읽고 있는 동안 내가 크게 영향받은 순간들은, 상황을 판단하고, 목숨을 보전하고, 사람을 설득하는 이른바 고대의 처세술 등이었거든요. 그렇게도 질색을 했던 처세술과 승부에 관한 지식들을 중국 고대사를 통해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거죠. 그러면서 한편으로 들었던 생각은, 아버지께서 그 처세술 책들을 사 모았을 때, 당신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버지도 역시, 두려우셨던 거였습니다. 맨손으로 사회에 뛰어들어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던 것을, 자칫 당신의 가정을, 당신의 세계를, 정글같은 사회생활 속에서 잃게 되지 않을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