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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굳은 살 (2)

녀석을 처음 만난 건 고3 봄이었다.

좋은 대학에 입학만 하면 인생에 꽃길이 깔리던 시절. 3년의 고생이 평생을 보장한다던 시절. 연애도 낭만도, 심지어 사춘기도 일단 대학에 들어가서 마음껏 하라고 하는 충고가 받아들여지던 시절.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의 본분은 대학입학이라고 다들 믿고 있던 시절에, 녀석은 고3이 되어서 전학을 왔다. 이 시절 고등학교 3학년에 전학을 한다는 건 이전 학교에서 대박 사고 쳤다는 걸 스스로 밝히는 셈이었지만, 당시 우리가 다니던 학교는 나름 그 지방에서 대학 보내는 공장 같은 시스템과 명문대 입학률로 냄새 깨나 풍기던 학교였기 때문에, 좋은 대학 가려고 전학 왔다는 녀석의 말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처진 눈과 서글서글한 인상, 그리고 웃을 때마다 잔뜩 잡히는 눈가 주름 때문에 녀석이 ‘하회탈’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기까지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별명을 빨리 얻은 만큼 순식간에 반 아이들 속에 깊이 파고 들어왔다. 우리는 당시 녀석의 남도 사투리를 듣는 것만 해도 깔깔거리면서 대화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나이였기 때문에,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녀석의 구수한 말투가 나로서는 부럽기도 했다. 좋은 대학에 가보겠다고 우정 고3이 되어서 이과반으로 전학을 온 놈이, 국어와 사회는 항상 만점을 받고 수학은 반타작을 겨우 하는 수포자였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뭣보다 우리 모두는 녀석의 천방지축 자유로운 상상력을 좋아했다. 어느 여름밤,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 학교 앞 문방구에서 죠스바를 하나씩 사서 입에 물고 더위를 식히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참을 묵묵하게 죠스바를 쭉쭉 빨던 녀석은 느닷없이 “야. 이그… 그 닮지 않았나..? 거무튀튀하고 울퉁불퉁한 거이…” 하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주변에 다른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평소에도 눈치 안 보고 지 하고 싶은 말 다하는 놈이었던 지라 우리는 서둘러 녀석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는데, “그거 있잖아… 그거… 광개토대왕비!!” 라고 말을 마무리 하는 바람에…… 그 여름밤에 우리 모두 “아이 씨바.. 미친 새끼… 크하하하하핫” 하며 기절하듯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리고, 녀석과 나는, 이과생이면서도 문학과 영화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렇게 캐릭터가 겹쳤던 터라 녀석에게 조금 경쟁심을 느끼거나 초조해한 적도 있긴 했지만, 동시에 같은 취미를 나누고 있는 친구를 만난 즐거움도 있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를 외우고 다니고, 헤세와 니체를 읽고 나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녀석에게 지지 않으려고, 이해도 잘 가지 않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밑줄 쳐 가면서 읽거나 구절을 암기하곤 했었다.

<마지막 황제>와 <태양의 제국><개 같은 내 인생>을 보고 나서 고급 예술 영화를 즐기는 영화 애호가인 척 행동을 했던 나로서는, <첩혈쌍웅>을 본 후 주윤발과 이수현의 의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녀석의 자유로운 생각에 내심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또래 아이들 역시 누가 허세를 부리고 누가 진심으로 영화를 즐겼는지 금방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녀석에게 습관처럼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아이들에게 녀석이 나보다 영화를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영화에 대해 더 박식한 걸로 보이는 게 싫었던 건지, 아니면 녀석에게 내 허세가 들키는 것이 더 두려웠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해 여름은 방북(訪北)에, 현대중공업 식칼테러에, 전교조 결성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력고사까지 150일 정도 남겨둔 고3으로서 여름방학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빠질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등굣길에서 졸업한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인사하던 중에 그들이 나눠주던 참교육 / 전교조 전단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생각 없이 전단을 들고 교실로 들어가던 중 자율학습을 감독하던 3학년 주임 선생과 마주쳤는데, 다짜고짜 그 전단을 받았는지 물어보더니, 나보고 교무실로 올라가서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당시 3학년 주임 선생의 별명은 싸이코였는데, 삐쩍 마른 체형에 정리되지 않고 부스스한 머리, 허름한 옷차림, 그리고 아주 빙글빙글 도는 돋보기안경 속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희번덕하는 눈빛과 함께 가끔 보이는 서늘한 웃음이 소름 끼쳤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기다란 당구 큐대를 항상 들고 다니기는 했지만, 학생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존댓말을 쓰(려고 노력하)는 교사였고, 무엇보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학생들이 시험을 잘 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걸 자기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해줬기 때문에, 그만큼 학생들도 잘 따랐던 걸로 기억이 난다. 지구과학을 가르치던 교사였지만 본인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영어, 수학 문제집을 푸는 걸 독려하기도 했고, 어느 기말고사 같은 경우는 학생들이 지구과학시험 준비로 시간 낭비하지 않도록 답을 미리 가르쳐 주기도 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야간 자율학습 감독과 같은 것도, 다른 교사들이 한 달에 한번 돌아가면서 했다고 하면, 그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늦게까지 남아서 학교를 순찰하고는 했었다. 다시 말해, 자기 개인 생활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학생들의 입시 관리에 헌신하는 타입의 교사였다. 나 역시 그가 학생들의 미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잘 알았고 그의 헌신도 존중하고 있었기에 뭐라 대들고 싶지 않았고, 그 역시 내가 별생각 없이 전단을 받았던 걸 알고 있었는지 간단한 경위서 수준의 반성문만 쓰게 하고 교실로 돌려보냈다.

교실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나를 마치 갓 석방된 양심수처럼 떠받들어 주었다. 대학입시에 전념하며 수학의 정석과 성문종합영어만 들고 파던 범생이들이었지만, 그래도 데모하는 형이나 누나들이 사회를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왠지 모르게 민주투사하면 좀 뽀대가 나보였을 것이다. 우리가 살던 권위주의 사회의 금기를 깨고, 체포나 감옥살이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들이 퍽 멋져 보였고, 그런 뽀대 나는 삶에 대한 동경이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냥, 등굣길에 아는 졸업생 선배 한 명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우리 반을 대표하는 민주투사가 되어있었고, 나 역시 그걸 굳이 물리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느끼고 싶었고, 뭣보다 이 사건으로 녀석에게 더 인정받고 싶어 했다. 녀석의 수준에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이 녀석에게 닿았는지, 그 뒤로 교실에서, 학교 소각장에서, 녀석의 집에서, 나는 녀석과 같이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당시 대학입시 중심의 교육 현실은 물론이고, 80년 광주와 전두환 정권88년 올림픽과 상계동 철거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녀석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매일 신문을 읽고 뉴스를 봤고, “박노해”의 시를 읽었고, 해직된 전교조 선생들과 만났다. 그리고 내가 사회를 최대한 삐딱하게 보면 볼수록, 녀석이 나를 더 인정해주는 느낌을 받아서 좋았다.


고교 마지막 여름은 그렇게 끝이 났고, 2학기를 위한 형식적인 반장 선출이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 반장이 하는 일이라고는 보통 교무실의 메신저 역할이 다였다. 전달사항 전달하고, 건의사항 보고하고, 유인물 나눠주거나 걷고, 청소상태 보고하고 등등, 권력은 쥐뿔도 없고 잡다구리 한 일만 떠맡는 거라서 결코 인기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입시가 백여 일 남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어서 누구 하나 선뜻 그 성가신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아닌 누군가가 얼른 나서 줘서 형식적인 반장 선거가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라도 해볼까..?’라고 생각을 하던 도중……

불현듯 녀석이 일어나 자기가 해보겠다고 했다. 워낙 모나지 않은 성격이어서 아무에게도 미움 받는 일이 없었기에, 딱히 큰 반발 없이 선거는 그걸로 그렇게 끝날 줄만 알았다. 곧이어 형식적이나마 공약 발표가 있었는데, 갑자기 녀석이 진지한 얼굴을 하더니 이름만 ‘자율’인 자율학습을 폐지하고, 원하는 사람만 남아서 공부하는 진정한 자율학습 시스템을 건의하겠다고 나왔다. 형식적인 반장선거를 남일처럼 생각하고 시큰둥해하면서 문제집만 풀고 있던 아이들도 녀석의 언변에 차츰 감화되었고, 결국 만장일치와 기립박수와 함께 녀석은 고3 2학기 반장으로 당선되었다. 녀석을 좋아하는 동시에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나 조차도, 이 날 만큼은 순수하게 녀석의 당선을 기뻐할 수 있었다.

이튿날 저녁, 자율학습 감독관은 싸이코였다. 평소에 학생들을 존중하면서 대하는 그의 태도로 봤을 때, 그리고 3학년 주임이라는 그의 직책으로 봤을 때, 싸이코와 직접 얘기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방과 후 자율학습이 진짜 학생들의 “자율”에 맡겨지더라도 대부분의 반 학생들이 남아서 공부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 그 보다, 실제로 학교 측에서 자율학습을 자율적으로 하게 해 줄 거라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아이들은 왠지 모르게 웅성웅성 흥분해 있었다. 어쩌면 그런 작은 일들에 소리 내는 게 고교 교육의 일원으로서 최소한 존엄성을 지키는 거라고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순찰 중인 싸이코가 우리 반 교실이 있던 층의 복도로 지나가는 것이 보이자, 아이들의 응원을 받으며 녀석은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어서, 욕지거리 섞인 싸이코의 고함 소리와 몽둥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이코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녀석의 머리통을 때리고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압도적인 폭력에 대한 공포… 우리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싸이코는 모든 걸 가졌고, 우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왜 때리는 건데요. 말로 하이소. 말로!” 녀석이 반발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우리는 나가서 녀석을 도와주기는커녕, 차마 교실 밖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냥 시선은 책상 위 문제집을 응시한 채, 침만 삼키고 있었다. 체감상,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어서, 문이 벌컥 열리면서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싸이코가 들어왔다. 큐대를 들고 있던 팔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셰키들이! 정신이 나갔어! 니들이, 이 따위, 썩어빠진 생각을 하고도, 대학을 갈 수 있을 것 같앳!”

숨을 거칠게 내쉬던 싸이코는 이후 더 이상 고함을 치지는 않았다. 싸이코와는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계속 책상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우리의 모습이, 그에게 불쌍하게 보였을지 아니면 비굴하고 역겹게만 보였을지 모르겠다. 단지 교실을 떠나기 전에,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발… 정신들 좀 차리세요. 예? 지금 세상이 어지럽다고… 학생들이 그렇게 선동에 휘말리기나 하고… 그러면 되겠어요?”

녀석이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지만, 우린 누구 하나 녀석을 위로하려 들 수 없었다. 같이 싸우지 않고 녀석에게 총알받이 역할을 하게 한 미안함. 싸이코에게 위압감을 느껴 고개도 쳐들지 못했던 굴욕감 등이 혼동이 되어서, 나에게 과연 녀석을 위로할 자격이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내가 과연, 이런 자잘한 폭력에도 쉽게 굴종해버린 새끼가, 하나의 인격체로서 내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어설픈 민주투사 흉내를 내면서, 시답잖은 입방정을 떨어왔던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껍데기 뿐인 비겁한 가짜 새끼……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녀석이 제일 좋아하던 시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