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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굳은 살 (5)

“오… 어쩐 일이야? 어, 미안한데 잠깐만… 아냐 아냐, 잠깐만, 잠깐이면 돼… 여기… 어… 그래. 어, 미안. 그래. 어쩐 일이야? 아, 그럼. 난 잘 들어갔지… 너흰? 응? 야이 씨… 니가 갑자기 둘이서 할 말있다면서 3차에서 둘이 나갔었잖아, 기억 안 나? 야이…. 너 별로 안마시는 것 같던데, 뭐 그렇게 순식간에 맛이 갔어? 아냐, 아냐… 그냥 니가 걜 끌고 나갔었어…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응… 그 새끼 전화 번호? 너네 같은 고등학교 출신 아니었어? 뭐, 내가 문자로 찍어줄게. 야, 근데 너 언제 들어가냐? 응. 그래. 다음에 들어올 때도 연락 좀 해. 아니, 그게 아니라, 너 가기 전에 우리끼리 한번 더 보자. 그래. 지은이도 너 보고 싶어 해… 진짜야….. 우리 집에 와서 저녁 먹자. 아냐… 전혀 안 바빠. 야, 그냥 학원은 학기 초에 원래 다 그래… 아이 미친 새끼 ㅋㅋㅋㅋ. 야 그러지 말고… 암튼 알았고. 야, 나 지금 나가봐야 하거든? 내가 다시 연락할게. 그래, 그래, 꼭 보자.”


과거 대학사회에서의 대부분 신입생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처음 써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바짝 얼어있었다. 써클이라는 작은 조직 내에서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고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싶던 마음도 컸지만, 처음에는 실제로 전혀 처음 보는 장비를 들고 처음 듣는 용어를 써가며 일을 척척 해내는 선배들이 무척 커 보였던 것 같다. 또, 살벌한 진압 경찰들과 맞서 싸우면서 집회와 시위를 이어나가는 선배들의 모습에서 무슨 이름없는 독립투사의 모습이 투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투철한 모습 때문에, 그만큼 선배들과는 처음에 쉽게 친해질 수 없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겨우 한 살 두 살 차이였지만, 현실 사회의 모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어려운 단어 투성이로 엮어낸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후 정세 토론을 하고, 최루탄과 화염병이 맞부딪히는 전쟁같은 시위현장에 서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선배들의 모습에서,  존경심을 느끼기도, 또 그만큼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선배는 명석함이나 결단력에 있어서 매우 돋보였다. 외모부터 당시 전노협의 단병호 위원장과 닮아 누가 봐도 20대로 보이지 않았어서 그의 권유에는 거절할 수 없는 어떤 힘 같은 것도 있었다.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집게 손가락 신경을 스스로 끊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나중에 알고보니 ’86 아시안 게임 ‘양영자’, ‘현정화’의 열풍이 불 때 탁구를 배우러 다녔는데 백핸드 스매싱을 먹이다가 탁구대에 손이 부딪히는 바람에 손가락 인대가 손상되었고, 치료할 때를 놓쳐 그 뒤로는 제대로 움직이게 않게 되었다고 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야전 상의 같은 외투를 입고 다니면서 시위현장에 귀신처럼 나타나서 사람들의 탈출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어렵기만 했던 K 선배와 급하게 친하게 된 계기는 8월에 있던 어느 집회에서 였다. 교내 집회를 마치고 교문 앞 가두 시위를 나섰던 선배가 얼마 후 심한 화상을 입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써클실로 돌아왔다. 제대로 고정되지 않았던 화염병의 심지가 신나와 함께 빠져나오면서 어깨서부터 손끝까지 불이 붙었던 것이었다. 불화살이 되어 파쇼의 심장에 꽂히겠다고 함성을 지르던 선배들도 막상 상황이 닥치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되어 있었다. 고통으로 얼굴이 백짓장이 되고 땀을 심하게 흘리는 선배를 끌고 일단 법대 후문 쪽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하지만, 나 역시 어디에 가야할 지를 알지 못해 무조건 가까운 병원이라고 찾아 들어간 곳은 내과였다. 마음이 너무 급한 나머지, 화상에 내과에 가야할지 외과에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그 내과에서 진료를 보던 의사가 화상치료를 해주면서 물어왔다. 물에 데인 건지, 불에 데인 건지 알아야지 정확한 처치를 할 수 있다고……

지금은 과거 민주화 운동 참여 경력이 훈장처럼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학생운동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던 문화였다. 대학 내에서만 영웅 놀이를 하고 있었지, 시위와 진압이 횡행하던 종로, 동대문, 혜화동, 시청, 신촌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 대중교통 마비로 불편을 겪는 시민들, 그리고 운동권 학생들의 가족들 모두 학생운동에 반대하고 있었다.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다양하고 첨예한 규제를 겪는 고3 시절을 막 마친 신입생들이 대학에 들어 오자마자 학생운동을 선택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냥 처음 몇 년간은 조금이라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뭔가 권력이 금지된 걸 하고 있다는 배덕감, 그리고 폭력 행위에 대한 죄책감이 혼동된 채, 선배들 손에 끌려 시위에 나가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 보니 1학년인 나로서는 의사에게 불이 붙은 신나에 데었다는 얘기를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할 수 밖에 없었고, 치료를 받는 K 선배 역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 그렇게 커 보였던 K 선배가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는 중학생처럼 보였다. 그런 상황을 같이 겪었던 것 때문인지, 그 이후부터 K 선배와 나는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고, 늦은 밤까지 토론하거나 마신 후에는 그의 자췻방에 종종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리고, 투철하다 못해 걍팍했던 그의 태도도 점차 귀엽게 느껴졌었다.

그래서인지, 재벌 중심 경제 구조와 부의 세습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한국형 천민 자본주의를 그렇게도 질색하던 K 선배가,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바뀐 입시 시스템에 맞춰 논술학원을 시작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 나는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학교 다닐 때부터 자잘한 일에 자존심 굽히는 것에 대해 전혀 괘념치 않았던 그가, 억척스러운 학부모들과 매일같이 전쟁을 해야 하는 살벌한 사교육 시장에서도 잘 버텨나갈 수 있을거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몇 년이 지나자 그는, 대형 학원 프랜차이즈 들이 난립한 강남에서도 꾸준하게 살아남으면서 많은 지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80년대의 이른바 전직 운동권들이 사회에 진입할 때 선호하던 업종이 소규모 출판사나 언론사였다면, 활자 문화가 사람들에게 더이상 감흥을 주지 못하는 세상이 되면서부터는, 단기 알바가 되었던 자신의 경력으로 결심을 했던 간에 많은 사람들이 사교육계로 뛰어들었다.  

과거에 학교에서 활동을 같이 했던 많은 사람들이 K 선배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IMF 이후 바뀐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던 많은 선후배 들에게 K 선배는 급전을 융통해준다거나, 학원에 단기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여러가지로 직간접적인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녀석 역시 K 선배와 같이 일하고 있었다. 예전 학교 다닐 때도 느꼈었지만, 그는 마치 가족을 이끌고 거친 풍파를 헤쳐나가는 가장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써클 선후배 누군가에게 생기는 어떤 문제든지 그에게는 이미 해답이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몸소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에도, 이민생활이 힘들어지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자기가 책임지고 목에 풀칠은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던 그였다. 나로서는 그가 그렇게 까지 가장의 역할을 하려고 드는 모습이, 마치 자신이 선택한 입시학원 사업이 생계곤란에 의한 긴급피난이라는 유권해석을 받으려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애초에 그가 입시학원을 시작한다고 해서 내가 어떤 불평을 할 리가 없었다. 동구권과 사회주의의 몰락에도 쳔연덕스럽게 자신의 이념에 대해 고집을 피우던 사람들이 IMF를 기회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걸 이미 많이 봐왔던 탓이다. 동구권의 몰락이 현실 사회주의의 대안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게 만들어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면, IMF는 그 연구를 이어나갈 밥줄을 끊어버린 셈이었다. 그들이 굴복해 나가는 상황보다, 과거 그들의 투쟁이라는 것들이 든든한 부모의 재정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더 놀랐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들을 비난할 자격도 그럴 능력도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사실, 사교육에 종사한다는 게, 우리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했었던 대학생 과외와 본질적으로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차이점이라면 있었다. 적어도 과외를 할 때는 자녀의 불안한 미래를 저당잡은 채 학부모를 협박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까.  


나를 만날 때마다 번번히 내 이민 생활에 대해서 묻던 K 선배는, 아마 이번에도 나에게 일자리를 제안할 요량일 것이다. 녀석의 번호를 전해 준 K 선배의 문자에는, 출국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서 밥을 먹자라는 얘기가 본인의 자세한 일정과 함께 담겨있었다. 이전에 한번 받았던 제안을 어정쩡하게 거절한 것 때문에 미련이 남은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이들의 불안한 미래를 미끼로 부모들에게 공포를 주입하면서 돈을 버는… 말하자면, 유괴범 같은 것”으로 사교육 시장을 일축했을 때, 내게 좀처럼 화내는 법이 없던 그가 버럭한 적이 있었다.

“똥통을 청소하려고 하는데 몸에 똥물이 튀거나 똥냄새가 배는 걸 무서워하면 어떻게 하냐? 그건 순결한 것도 순진한 것도 아무것도 아냐. 그냥 자기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하는 이기심이지. 아니면 비겁함이거나.”

과거 학생들이 노동현장에 투신을 할 때, 현장 노동자들의 전근대적 상하관계 문화에 대해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던 얘기를 이렇게 앞뒤 안맞게 써먹는 걸 보면, 그가 찔린 곳이 어지간히 아픈 곳이었나 보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똥”은 어떤 것이고 그가 한다는 “청소”는 뭘 말 하는가? 하며 따지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와의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간 쌓아 온 친분을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현재 청소를 하려고 하고 있다는 자가당착에서 벗어나길 진심으로 바랬다. 적어도 부끄러움을 가지는 사람이길 진심으로 바랬다. 이번에 또 그를 만나게 되면, 어쩐지 그와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끝장을 볼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다 보니 K 선배에게 받은 녀석의 전화번호 숫자 하나하나가 흔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전화기에 번호 입력을 마치자, 녀석의 이름이 자동으로 화면에 떴다. 내가 모르는 새 녀석의 번호가 전화기에 이미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어젯밤 녀석과의 기억이 떠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