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에도 몇 차례 해프닝은 있었지만, 녀석과 나는 별문제 없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같이 어울려 놀다 보니 그랬던 건지 성적도 그냥저냥 비슷비슷했고, 녀석의 부모님과 내 부모님의 선호 학교도 일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같은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다만, 녀석은 저조한 수학 성적을 극복할 수가 없어서 막판에 (국어 II를 시험 봐야 하는) 문과를 지원해서 시험을 봤는데, 그 이전 어떤 모의고사 성적보다 높은 점수를 받고 사회학과에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자연계열과 인문계열 캠퍼스가 멀리 떨어져 있던 학교였기 때문에, 녀석과 내가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란 써클 (동아리) 활동밖에 없었다. 당시 전통있는 대학 써클들이란 과거 학교 측에 등록할 때 학술적 목적을 가진 것처럼 꾸몄던 바람에 주로 “~ 연구회”와 같은 이름을 택했고 그걸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까놓고 보면 내용물이 전혀 다른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신입부원들이 종종 실망을 하고 일주일 안에 그만두는 일이 잦았다. 예를 들어, “향토 문화 연구회”의 경우 알고 보면 특정 지방 향우회인 경우도 있었고, 학교마다 꼭 하나 씩 있던“현대 철학 연구회”의 경우 두말할 것도 없이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곳이기도 했다.
녀석과 내가 선택했던 “영상 예술 연구회”의 경우 말하자면 ‘영화 써클’이었는데, 이름 만으로는 고상한 학술 모임이었지만 내부에서는‘영화는 초당 24 프레임을 쏘는 혁명의 무기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었고, 그런 반면에 부원 한 사람 한 사람은 ‘유덕화‘와‘장학우’, ‘스필버그’와 ‘리들리 스콧’의 영화 및 당시 유행이었던‘컬트영화’를 몰래 흠모하고 있었다. 아직 대학교 영화 써클 안에서는 헐리우드-상업 영화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경직된 분위기의 시대였던 것이다. 밤에는 같은 부원 하숙방에서 미국 블록버스터 영화 비디오를 잔뜩 빌려다 보거나, <터미네이터>의 속편 시나리오 구상에 대해서 의논하다가도, 학교에 와서는 제3세계 영화나 남미의 혁명영화 등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했다.
써클에 같이 가입할 때에도, ‘타르코프스키’와 ‘큐브릭’ 영화를 외워 가서 허세를 부리던 나와는 달리, ‘좋아하는 영화’에 <첩혈쌍웅>을 적고 있었던 녀석의 당당함에 또 한 번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당당함과 여유로움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였던 터라서 녀석은 금방 선배들의 기대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그 당시 한국 대학교에서 공통적으로 그랬듯이) 사회학과를 다닌다는 이유 만으로 녀석은 써클 모임이 있을 때마다 사회를 봐야 했는데, (비록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키는 등의 단순한 임무였지만) 구수한 사투리 덕분이었는지 녀석이 사회를 볼 때마다 사람들이 무척이나 즐거워했어서 입부한 지 얼마 안 되어 단숨에 차기 집행부의 일원으로 추천받게 되었다.
4월 말이 되고 각 과마다 중간고사 일정이 잡혔지만 녀석과 나는 여전히 써클활동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 해 봄에는 연초부터 시작된 3당 야합 분쇄, 전노협 출범,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 투쟁 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동시에 KBS에서 공영방송사 최초로 장기파업을 진행하느라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하지만 대학 영화써클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최초의 노동자 영화가 직배 형태로 대학가에서 상영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파업전야>였다. 당시 공안정국은 영화 상영을 저지하기 위해 상영장으로 들어와 필름과 영사기를 강탈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제작사 “장산곶매”와 당시 배급을 주도했던 “공투위 (<파업전야> 탄압 분쇄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대학교 영화 써클들에게 상영을 지켜내는 사수대 역할을 부탁하기도 했었다.
갓 입학한 신입생인 나로서는 각목을 들고 밤에 규찰을 서는 일이 무서워서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피하고만 있었지만, 녀석이 눈을 반짝거리고 나서는 바람에 이에 질세라 나도 같이 나서게 되었다. 사실 ‘노학연대 (勞學連帶)’와 같은 거창한 대의명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학생들이 아니라 사회에서 실제로 뭔가를 만들고 있는 어른들과 같이 일을 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점이 기뻤다. 영화 아카데미 출신, 혹은 다른 학교 영화과 졸업생들이 모여서 새로운 형태의 독립영화를 만들었고, 새로운 형태의 독립 배급을 최초로 시작하는 그 현장에 같이 서있다는 사실도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언제나처럼 녀석의 뒤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벚꽃 잎이 바닥에 깔린 지 오래되었지만, 4월의 밤은 여전히 쌀쌀했다. 규찰을 서는 도중 누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사각 뺑끼통에 매점 쓰레기를 태워서 몸을 녹이고 있자니, 녀석과 바로 몇 달 전까지 많은 얘기를 나눴던 고등학교 소각장 정경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예상대로 녀석은 대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같은 지역,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비슷비슷하게 사는 아이들이 모여 다니던 중, 고등학교와 달리, 전국 각지에서 모인 대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라온 환경이나 사는 형편이 모두 달랐다. 넉넉한 부모가 주는 용돈을 받아서 맘 편하게 학생운동을 할 수 있었던 학생들과,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하고, 시간을 쪼개 과외 알바를 하고, 대기업 취업을 일찍부터 준비를 하던 학생들 중, 그 누가 더 옳은 길을 걷고 있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입으로는 파쇼 타도와 민주화를 외치면서 행동으로는 엄격한 선후배 간의 예의를 요구하고, 입으로는 독점자본의 폐해에 분노하면서 속으로는 대기업 취업을 강렬히 원하는 대학생들의 태도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사회 부조리에 대해서 분노하려면 일단 대학에 가고 나서 하라는 얘기를 귀가 헐도록 듣고 자랐는데, 막상 대학에 오니 그 사회 부조리에 참여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자기모순을 맨 정신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고, 우리는 곧잘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셔야 했다. 법적으로는 술을 마셔도 되는 나이가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른이 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마… 성인이 됐으면 경제적으로도 독립을 해야 카는 거니까네… 난 대기업 취업준비 하는 선배들이 나쁘게만 보이진 않아. 먹고는 살아야 카니까. 마.. 지들 나름대로 사정이라 카는 것도 있을 거고… 먹고살려고 카는 거니까, 이념을 잠시 접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아. 그러니까, 이념은 접어도… 근데, 염치는 접으면 안 되는 거 같아. 자기가 갖고 있는 이념이 달라지는 건, 아주 나쁘게 말하더라도 그냥 변절이라 카겠지만, 염치를 버리는 건… 그걸 인간이라 캐도 되는기가?”
이 말을 듣고, 나는 녀석이 조만간 학교를 떠나게 될 것이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여름이 되면서 주변에 휴학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대개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사회 현실의 모순에 대응할 수 있는 한계 때문에 괴로워 하며 선택하던 휴학이었다. 1~2년 정도 학업에 공백이 있더라도 이후 취업과정에서 큰 불이익을 받지 않았던 시대였다. 특히 남학생들의 경우 군휴학 (군복무를 위한 휴학)이라는 좋은 핑곗거리도 있었다. 녀석 역시 휴학계를 냈다. 처음에는 자퇴 원서를 냈었지만, 학과장의 사려 깊은 설득 끝에 입대 준비를 위한 휴학으로 처리가 되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써클에서 녀석을 볼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다. 단지 너머 너머로 녀석이 학교 근처 신문 보급소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한다느니, 학회 사람들 몇 명과 같이 자취를 시작했다는 얘기만 들었다. 나와 한 마디 상의하지 않고 휴학을 결정한 녀석에게 나는 묘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동시에 고 3 때 싸이코의 폭력을 그냥 방관만 했던 기억 때문에, 녀석에게는 내가 상담 상대도 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자괴감도 있었다.
한 학기 대학생활을 하고 났더니 대충 사람들이 갈라지는 모양새가 눈에 보였다. 사회문제에 고민하더라도 폭력시위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폭력시위 전과로 인해서 자기 경력에 불이익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야학 교사 일을 시작했다. 한국 사회 시스템을 더 적극적이고 더 총체적으로 바꾸고 싶거나, 정치계로 진출을 원했던 사람들은 총학생회 집행부로 진출을 해서 학생운동을 이끄는 일을 했다.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박쥐 같은 학생 신분을 버리고, 실제 노동자나 농민의 삶으로 다시 시작하려던 사람들, 혹은 전업 활동가가 되길 원하는 사람들은 공장 투신과 농투신을 선택했다.
써클에서 녀석이 빠진 빈자리는 내가 메워야 했다. 마침 선배들의 군입대나 휴학이 이상하게 맞물려 돌아가서 그 해 여름 제작 워크숍은 1학년이었던 내가 주관을 했어야 했는데, 예상대로 아주 엉망으로 흘러가다가 아무런 작품도 만들지 못한 채 끝나게 되었다. 그냥 좋은 사람들이랑 같이 모여 영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과 영화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일로 밥벌이를 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같이 공존했던 대학 영화 써클의 한계였다. 그리고 그런 각각 사람들의 요구를 제대로 중재하지 못했던 1학년생이었던 나의 한계였다.
기존에도 있었던 두 그룹 간의 경계가, 미덥지 않은 연출자가 이끌었던 여름 워크숍을 계기로 확연한 골이 생겼다. 나로서는 내 무능력 때문에 써클이 분열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무척 괴로웠지만, 사람들의 신뢰를 다시 얻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어이없게도 더욱더 허세를 부리는 것이었다. “사사방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이나 다른 어려운 정치경제학 책, 혹은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 모더니즘’ 책들을 끼고 다니고, 나도 잘 모르는 사람의 인용이나 전문용어를 써가면서 얘기를 했다. 그리고 다른 정파에 대해 조롱하거나 능멸하는 발언을 수시로 함으로써, 써클 내부 선배들에게 더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 부끄럽지만 지식의 소매상들이 판을 치던 시대이자, 그 책의 몇몇 단어들을 명품처럼 몸에 걸치며 허영을 즐기던 소비자가 넘치던 시대였다. 지금처럼 타 그룹을 앞장서서 혐오하는 방식으로 자기 그룹 내에서 인기를 끄는 저속한 행동이 횡행하기도 했다.
9월이 되면서 서울 시내 몇몇 대학교 총학생회에서는 북한 영화를 상영하는 이벤트를 개최했다. 대부분의 대학 영화써클들은 그 시점에 북한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에 그다지 명분을 찾지 못해서 총학생회가 주관하는 행사에 협조를 하지 않고 있었고, 우리 써클도 마찬가지로 써클 자체에서 주관하는 제3세계 영화제 준비에만 몰두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녀석의 어머니한테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사이에 누군가가 예전 녀석이 쓰던 방에 몰래 들어와서 녀석의 일기장이며 앨범 등을 죄다 끄집어 내 보고 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녀석의 아버지께서 가출한 아들이 보고 싶어 몰래 아들 방에서 앨범을 꺼내 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베란다 쪽으로 누군가가 달아난 흔적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경찰에 연락했다고 한다.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때였기 때문에 아들에게 연락을 할 방법이 없어서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하셨던 거였지만, 나 역시 녀석을 마지막으로 본지 이미 몇 달이 지난 후라서, 과 학회 쪽으로 알아보겠다는 말만 전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공안기관에서 영장 없이 몰래 수색을 하려고 한 정황이었지만, 어머니께는 도난품이 없어서 경찰 수사는 진행되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렸다.
사회학과 학회에서도 녀석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그들 역시 녀석의 성향으로 봤을 때 북한 영화 상영과 연루된 것은 아닐 거라고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냥, 공안기관에서 헛다리 짚은 거라고 일축했다. 며칠 후, 녀석이 집에 연락을 했고 잘 지낸다는 안부를 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 역시 오랜만에 녀석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 당시 대학가에선 거의 매달 이슈가 있었고 그 이슈에 걸맞은 행사를 하곤 했다. 4월에는 ‘4.19 의거’, 5월에는‘5.18 항쟁’, 6월엔 ‘6.10 항쟁’, 8월에는 ‘범민족대회’, 10월에는 ‘민중대회’가 있었고, 11월이 다가오자 ‘전국 노동자 대회’를 준비했다. 그 해에는 연초에 “전노협 (전국 노동조합 협의회)”이 어렵게 결성되었던 데다가, 마침 전태일 열사 20주기와 겹쳐져서 서울에 위치한 K 대학에서 대형 집회를 준비하던 차였다. 때문에 “대영연 (대학 영화서클 연합)” 차원에서 “뉴스팀 (노동자 뉴스단)“과 결합하여 집회 전체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를 공동 제작한다는 기획이 있었다.
‘뉴스팀’에서는‘대영연’ 쪽 촬영팀이 (전태일 열사의 생전 행적과 관련 깊은) ‘청계 피복 노동조합’의 행사장 진입을 도우며 같이 촬영을 하기를 원했고, 내가 카메라맨으로 선정이 되어, 전날 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단합대회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 심야에 행사장으로 진입하는 것까지 동반 취재를 했다. 어두운 청계천 거리를 지나 노조 사무실로 찾아 들어갔던 어색한 시간은 금세 지나갔고, 생각보다 쉽게 노조원들과 어울리면서 같이 게임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촬영을 했다. 그러고 나서는 몇 그룹씩 나눈 후 시간에 맞추어 행사장이었던 K 대학으로 몰래 들어갔다.
대회장 원천봉쇄를 선언했던 경찰의 기세와는 달리, 걱정했던 것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애초에 집회신고를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제출하여 혼선을 줘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행사장으로 준비된 K 대학 총학생회장이 당시 ‘서총련 (서울지역 총학생회 연합)’의장이어서 행사 전에 관할 경찰서와 미리 조율을 마쳤다는 후문이었다. 당시 대학 총학생회 간부들은 관할 지역 경찰서 간부들과 어느 정도 ‘현실 정치 행위‘를 즐기고 있었다.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을 정도의 정보를 서로 나누면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던 것이다. 총학생회 입장에서는 경찰과 시위 대열 행진에 대해 같이 상의를 하고 가두시위 계획을 해서 피해를 줄이려고 했고, 체포 / 구속되는 학생들의 행방을 파악하는 데에도 관할 경찰과의 관계 유지가 중요했다. 경찰 입장에서도 민주화 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동감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관할서의 체면치례를 할 수 있는 학생운동 정보가 꾸준히 필요하긴 했다. 그리고 총학생회 출신들이 정치권 진출이 많아지고 있어서, 굳이 악연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이 당시 이런 대형 집회를 하는 행사장에는 주최 측의 골치를 썩이는 불청객들이 있었는데, 바로 “사노맹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연맹)”이었다. 1989년 ‘지역별·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가 주최한 서울대 집회에서에 첫 등장해 자신들을 알리던 ‘사노맹’은 그 뒤로도 여러 행사에서 주최 측과 협의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 구호를 외치거나 유인물을 돌리곤 했었다. 이 당시 학생 운동이나 노동 운동의 경우, “군부 정권 타도”, “국가보안법 폐지”, “집회, 시위의 자유”등을 주장하거나, 좀 더 깊게 들어가더라도 “노동자를 위한 정당 설립” 정도였었는데, 갑자기‘사노맹’ 회원들이 나타나서 “노동자 계급 중심의 무장봉기”를 주장하곤 했으니… 굳이 공안기관의 강제진압에 빌미를 주는 행위라서가 아니더라도, 행사에 참여한 다른 참석자들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했어서 주최 측 입장에서는 여간 괴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뒤로는 “시대착오적인 몽상가 집단”, “책상물림 먹물들만 모여 노동현장과 괴리된 일을 꾸미는 집단”, “남의 집회 와서 깽판 놓는 훼방꾼” 이라고 욕을 하긴 했었지만, 엄연하게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는 단체였던 터라서 그들을 홀대하거나 강제로 구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방송을 통해서 ‘사노맹’은 주최 측과 관련이 없다는 걸 밝힐 뿐이었다.
이 해 ‘노동자 대회’에도 어김없이 ‘사노맹’ 회원들이 나타났다. 그것도 대회가 한창 진행되던 도중에 연단 중앙 앞으로 나와서 ‘국회 해산’, ‘임시정부 수립‘이라고 쓰여진 현수막을 내걸었다. 전국적 규모의 큰 집회여서 방송사 기자들도 제각기 카메라를 들고 나와 서있었는데, 그들과 몸싸움을 하면서 카메라 자리다툼을 하고 있던 나는, 주최 측에 의해서 현수막이 철거되고 강제 해산되던 ‘사노맹’회원 중에서 녀석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번에도 작년처럼, 강제로 끌려나가는 녀석의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게 6개월 만에 만난 녀석의 모습이었고 그걸 마지막으로 다시 몇 년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지난 번처럼 가슴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때는, 이것이 나의 성장인지, 아니면 녀석과의 결별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마음에 굳은살이 배겨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