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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2 – 결국 영어인 것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감사

그렇다… 결국 영어인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이민을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 번도 영어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는 내 영어실력을 모르고 이민을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맨 땅에 헤딩’에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있었고, ‘뭐 어떻게 되겠지’라는 대책없는 게으름이 내 영어실력에 대한 두려움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결국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민 온지 2년 6개월.. 그 동안 정말이지 맨 땅에 헤딩하면서 익혀온 영어 만으로 현지에서 친구들도 만들고 현지 회사에 취직까지 했으니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한국 이민자들이 의사소통의 한계를 미리 깨닫고 (돈 있는 사람들은)처음부터 교민 상대의 장사를 시작한다든지 (없는 사람들은)한인 비즈니스에 취직해서 간단한 의사표현 영어만 가지고도 훌륭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굳이 ‘도전’이랍시고 현지회사에 알몸으로 들어가서 버티려고 하는 것이 (용기인지 무식함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1년 임대계약 보증금도 포기하고 섬으로 들어갔을 때를 생각하면 무지무지 발전한 모습이다. 물론 가족과 친구들, 사회 경력들을 포기하고 (교육시킬 애들도 없는데) 아내와 딸기와 달랑 셋이서 이곳으로 올 결심을 했던 것은.. 뭐 좀 덜 신경쓰면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네 슈퍼에서 술을 나르든 야채를 나르든, 정직하게 노동하고 정직하게 세금 내고도 왠지 속은 느낌을 안 받는 나라에서, 아무 신경 안 쓰고 어물쩡거리며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큰 웅지가 있었을리 만무하고, 이역만리에서 이름을 날려보겠다거나 하는 것은 아예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골치아프게 살 거 였으면 도대체 왜 이민을 오겠냐는 말이지, 굳이 문자를 써보자면 ‘안빈낙도’랄까? 그래서 이민 오기 전에 미리 제안 받았던 일자리는 교민 대상의 한국 방송 비디오 샵 관리였었는데,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뭐 영어를 신경쓸 이유가 있나? 내가 좋아하는 AV기기들과 하루종일 씨름하면서, 좀 더 나은 화질을 만들어내는 것을 궁리하는게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좀 쉽게 가자.. 싶은 것은 정말 쉽게 걸리지가 않았다. 아내가 좋아하는 애견 관련 비즈니스를 시작해보았지만, 그 것 역시 쉽게 굴러가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애니메이션 관련 직종에 무진장 구직활동을 해보았지만 이곳에서 아무 인맥도 학력도, 보여줄 단편 하나 없는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리 만무하였다. 물론 소규모 한인 비즈니스에 지원을 안했던 것도 아니다. 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컴퓨터 매장에 지원을 했을 때에도.. (이민온지 얼마 안되어서 영어실력을 검증할 수 없다는) 희한한 이유로 거절당했고, 이 건설경기가 좋은 시절에 그 흔한 페인트공 하나 되지가 않았다. 공장 라인에 들어가 납땜을 하는 일자리가 나긴 했었지만, 마침 번역일을 하고 있었던 때라서 시기가 엇갈렸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계속 취직이 안되자, 어떻게든 이미 벌려놓은 비즈니스를 이용해 먹자해서 시작한 것이 애견의류 수입 / 제조사업이었는데, 이곳의 소비기준과 동양인의 소비기준은 정말 차이가 컸다는 경험만을 남기고 접어야했다. (물론 그 때 그 옷을 딸기가 잘 입고 있고, 또 교제활동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으니.. 게다가 미싱도 잘 쓰고 있으니 아예 손해본 것은 아니다) 결국 부부가 아름다운 섬에서 같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우연히 잡았고 이제야 모든게 시작이구나 싶었다.

섬은… 정말 좋았다. 고용주로부터 신뢰를 받고(조금 편애를 받는 느낌이어서 불편하긴 했지만), 일도 처음엔 몸이 좀 버거웠지만 금방 적응이 되었으며, 둘이서 주6일 일을 하는데다가 집월세가 나가지 않으니 경제적으로도 금방 안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섬의 분위기가, 친절한 섬주민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섬에서 일어나는 범죄라고는 개가 사람을 물었다거나, 애들이 학교 공병(이곳에서는 공병을 모두 환불해주기 때문에 다 돈이다)을 훔쳤다던가 하는 사소한 것들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가능하면 여기서 오래오래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이곳에 집을 사서 계속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섬에 있는 슈퍼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역시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영어였다. 손님들의 100%가 영어사용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한인 비즈니스라 할지라도 영어가 필수적인 것이었다. 아내나 나나 매일매일 영어로 생활을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로 능력을 평가받는 직장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걱정이 안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또 타고난 뻔뻔함이 ‘영어는 문제없습니다’라며 면접때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역시 캥기는 게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건 왠걸.. 직원들 중에서는 그나마 우리가 영어를 잘하는 축에 속했고, 아무리 엉터리 영어를 써도 친절한 섬 주민이나 손님들은 다 이해해 주는 편이었다. 비록 어떤 손님이 ‘알러브’를 찾아서 애정고백인줄 착각한 적도 있고(몇몇 사람들은 올리브를 알러브라고 발음한다), ‘샐몬치즈'(샌드위치의 발음)를 찾기위해 냉장고를 뒤진 적도 있지만, 슈퍼에서 일하다 보니 이 나라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단어들을 좀 더 많이 익히게 되어서 점점 불편함은 없어져갔다. 예를 들어, 이 나라 담배이름들은 무진장 길며, 그걸 손님들은 무척 빨리 말하는데, 한 예로 ‘벤슨엔헤지스마일드울트라슬림원헌드레드’라는 담배를 달라고 하면 아무리 영어박사가 와도 처음에는 못 알아듣을 수 밖에 없지만 차츰차츰 생활을 하면서 그런 것을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동물이 참으로 간사한 것이어서, 1년 가까이 일을 하게 되자 섬에서 나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편했지만… 왠지 계속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깨닫게 해준 것은 직장 동료들이었는데, 우리야 좋다고 섬으로 들어갔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름대로 모두 사연이 있었다. 용기나 자신감, 깡다구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20대 파파보이부터 시작해서, 노름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섬으로 들어오고도 정신을 못차려서 카지노에 가기 위해 돈을 빌리는 사람들, 목사라고 사기치고 다니면서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는데 어떻게 평민들이 자신에게 함부로 구는지 이해를 못하는 왕자병 아저씨, 원칙이나 공평무사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하는 경영진 등등.. 그런 동료들을 보고 있자니, 여기서 5년 이상 있으면 나라고 그런 사람들이 안되라는 보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40대가 되어서 까지 이 일을 계속 하면 바로 저 모습이 될 것만 같았다. 가장 불안한 것은 지금 생활에서 더 나아질 전망이 안보인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질 전망이라는 것….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좀 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직위로 올라가는 것이고, 아내에게 있어서는 사무실에서 일하며 주 5일 일하고 휴일에는 쉴 수 있는 직위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섬의 슈퍼에서 일하는 이상.. 최고의 직급은 매니저가 되는 것인데… 그래봐야 주 7일 일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물론 막상 섬에서 나오자니.. 뭐 딱히 정해진 것도 없고 두렵고 막막하긴 마찬가지 였다. 게다가 우리가 그만둔다니 고용주들도 노골적으로 섭섭한 표현을 해서 단호하게 행동하기 힘들었다. 이민 첫해와 같이 구직활동을 시작하려니 짜증도 났다. 달라진 것은??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어떻게든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점. 그거 하나 믿고 과감하게 뛰쳐나왔다. 처음에는 적당한 다음 직장이 잡힐 때까지는 붙어있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 두 달 흐르고 여름이 오면 미안해서라도 절대로 그만 두지 못할 것 같았다. 당장 ‘퓨처샵’이라고 하는 한국의 <하이마트>같은 곳에서 면접을 봤을 때에도 연말은 현직장에서 일해야 한다고 고사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 인맥도 없이 뛰어든 이국땅에서, 특히나 사람을 뽑을 때에는 반드시 이전 직장 고용주에게 확인을 할 정도로 보수적인 캐나다 땅에서, 그런 식으로 가게에 피해를 끼치면서 일을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가게가 가장 한가한 시기에 그만두고 나오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한 때 신뢰하던 사람들이 좋게좋게 헤어지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섬에서 나와 조금 여유있는 시간을 가진 후에 다시 잡은 현지직장… 역시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 중 하나가 다름아닌 영어… 손님들과의 의사소통이야 아쉬우면 내가 알아듣도록 얘기하겠지만, 동료들과의 친목은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영어로 농담을 할 줄도 알아들을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팀웍을 다질 것인가? 그리고 실제로 일을 하고보니 영어로 인한 어려움은 생각보다 더욱 큰 문제였다. 전화통화를 하다가 내 엉터리 영어에 짜증을 내면서 “야! 너 말고 딴 사람 없어?”하고 말하는 손님들도 많고, 아무래도 대기업인 터라 문서작업이 만만치가 않은데, 그걸 모두 영어로 작업하려니 번번히 한계에 부딪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나라는 원래가 개인주의인데다가, 근무시간이 모두들 따로따로 굴러가서 영어를 잘하든 못하든 동료들간에 친목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다. 한국처럼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술을 마실 일도 없고, 뭉칠 일도 없으니 의사소통이 안된다고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도 없다. 이런저런 영어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내가 정성스럽게 고쳐준 컴퓨터를 받아가면서 내 두 손을 꼭 잡고 고맙다고 인사하는 손님들을 보면.. 이 일을 시작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어쩌면 천직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아내와 둘이서 바라왔던 소망이 다 이루어진 셈이다. 안정성을 중시하는 아내는 이 나라에서 그나마 가장 안정적인 공무원 일을 시작했고, 내년쯤 부터는 공부를 시작해서 사무실 책상물림의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 아무리 지금은 힘이 들어도 이렇게 눈 앞에 길이 보이면 힘이 난다. 나 역시 한국에서 동네 친구들 컴퓨터 고쳐주던 이력을 살려 나름대로 안정된 회사의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 일단 여기서 쌓는 경험은 이후 다른 어떤 회사에 가서 일을 하게 되더라도 큰 도움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아내는 내년부터 공부를 준비하겠지만… 막상 직장이 잡힌 나로서는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본격적인 영어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서, 영어에 왠만큼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는 짤리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정말이지..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하느님, 부처님, 12지신,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관운장, 올림푸스의 제우스 휘하의 신들, 알라신, 그리고 머나먼 행성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을 외계인 모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물론 주위에서 우릴 위해 기도해준 가족들 친구들에게도 감사..

두성 (2005-09-15 18:10:19)
축하한다. 글고 아주 식상한 말이지만 노력하면 잘 될 것이다 ^^

딸기아빠 (2005-09-17 13:39:50)
ㅎㅎㅎ 고마워.. 격려지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