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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토피노 7

7시 반쯤 일어났다. 하늘은 아직 흐려있지만 오후엔 맑을 예정이란다. 어제 먹은 김치 덮밥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밤새 속이 편했던 건 물론이고.. (사실 저녁을 일찍 먹고 밤에 아무것도 안먹는 것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아침에도 문자 그대로 쾌통하게 내보냈다. 내 몸이 이렇게나 서구 음식 문화에 적응을 못하는 걸 알게 되어 매우 유감이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이렇게 몸도 마음도 편협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음에도 이렇게 먹거리 여행을 다닐 일이 있다면 반드시 총각김치를 싸들고 다니면서 매일 밤 먹어주리라 다짐한다.

오늘도 이삿날. 늦게까지 휴가 계획이 안 정해졌던 탓에 이번 토피노 캠핑은 일주일간 4개의 사이트를 전전하게 되었는데, 오늘은 마지막 사이트로 이동한다. 66번. 해변으로 가는 진입로 코 앞에 사이트가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린 늦게까지 토피노 다운타운에 있을 예정이라 이렇게 훌륭한 환경조건을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침에 속은 매우 편해졌지만, 그래도 허기는 느낄 수가 없다. 그래 며칠간.. 정말 배 터지도록 쳐먹고 다녔지. 트레일러를 새 사이트로 옮기고, 세팅하고 나서도, 느릿느릿 짐정리를 하다보니 어느새 11시가 되었다. 와.. 정말..  휴일은 어쩌면 이렇게 시간이 잘가는지. 오늘은 3시반에 해상 카약 가이드 투어를 예약해 두었다. 해상 카약이라고 하더라도 저 먼 태평양으로 나가는 건 아니고, 토피노 근방의 섬들을 카약 타고 구경 다니면서 각 섬의 역사에 대해 얘기도 듣고 하는 프로그램이다. 

일단 다운타운으로 나서서 Sobo에서 아점을 먹기로 한다. 지난번 왔을때 메뉴판에서 우동된장국 메뉴를 보고 궁금 했었는데. 오. 아니나 다를까.. 매우 맛있다.  이야… 여기 요리사 정말 잘한다… 하는 감탄사가 다시 나온다. 다시 국물을 어떻게 냈는지 모르겠지만 감칠맛과 염분의 농도를 정확히 맞춘건 물론이고, 중국식 두부를 훈제해 넣어서 가츠오 부시 느낌을 배가했고 여기에 로컬 버섯으로 엑센트를 줬다. 같이 주문해서 마신 아이스티 역시 텁텁한 입맛을 싹 씻어주엇다. 아쉬웠던건.. 우동의 쫄깃함이 나한테는 좀 부족했던 것. 뭐 국수를 직접 만들지 않는한, 쫄깃한 우동국수 재료를 구하기 지리적으로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암튼 이것도 순식간에 국물 한방울까지 흡입. 아내는 해산물 차우더 작은 컵과  ‘킬러피시 타코’ 라는 이집에서 제일 인기 좋은 메뉴를 주문했다. 해산물 차우더는.. 지난번과 같이 명불허전. 킬러피시 타코는 소프트 타코셸을 가볍게 튀겨서 바삭한 식감을 만든 후, 매콤하게 구운 연어살과 각종 과일 (딸기, 포도, 망고 등) 베이스의 살사를 푸짐하게 넣어서 내었는데, 피시타코를 가장한 과일 특선안주와 같은 느낌. 옆에 손님은 터인데 어째서 사워크림이 없냐고 항의 하는 것 같았지만, 유지방은 쳐다도 보기 싫었던 나에겐 아주 완벽한 음식이어서 얼른 한 개 더 주문했다. 아하하하.. 뭔 피시 타코가 이렇게 상큼하니… 맥주가 강하게 고파졌지만 곧 2시간 넘게 카약을 타야 하므로 일단은 자제하고.

화장실에 갔더니 웃기는 낙서가 있다. 아니 낙서라고 하기엔 너무나 진지해서 이게 농담인가… 헷갈리기도. 이곳 화장실에는 화재시 대피를 위해 비상 스트로브 등이 설치되어 있는데, 제품에 따라 마치 방범 카메라 처럼 생긴 것도 있다. 그 아래 누군가가 제대로 된 타이프로 “촬영 영상은 연구 목적으로만 쓰임” 이라고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아.. 이게 농담이 맞겠지? 이런 농담을 걱정없이 하는게 어떻게 보면 부럽기 그지없다. 한국에서는 신문에 나올 일이지만..  

디저트로 생강쿠키까지 주문해서 먹은 후, 이렇게 날씨 좋을 때 동네를 좀 더 돌아다녀 보자하며 나가려고 했는데 웨이트리스를 찾을 수가 없다.  Sobo는 지난번엔 서비스도 아주 좋았었는데, 오늘은 어째 웨이트리스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잡담만 즐기고 테이블엔 관심이 없다. 처음엔.. 이것들이 또 차별하는가.. 싶어서 좀 짜증이 났었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던 할머니 역시 주문을 받으러 올 생각도 안하자 화가 나서 자리를 뜨는 걸 보고.. 차별이 아니라 게으른 일꾼들이군.. 싶었다. 저 할머니는 이제 저렇게 문을 나서선 인터넷에 악평을 올리겠지.  이렇게 고객 서비스업의 경우 서비스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비즈니스를 대표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나라는 각 담당자에게 권한을 많이 주기도 하고, 또 팁문화를 아예 없앨 수 없는 모양이다. 우리야 어차피 시간을 좀 보내고 싶었으니 계산서를 한시간 후에 갖다 줘도 별 불만은 없었지만.. 

카약킹을 하는 동안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싶은데, 왠지 방수팩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여기 저기 아웃도어 스포츠점, 서핑 물품 가게를 돌아다녀 봤으나 딱히 적당한 게 없었는데, 동네 약국(이라고 쓰고 잡화점이라고 읽는다)에 가서 8불짜리 투명 방수백을 찾아냈다.  오케 이제 준비 완료. 이제 시간도 얼추 되었고, 미리 화장실도 가 놓아야 할 것 같아 투어 사무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주 출신 강사 샘이 나와 사람들과 인사를 했고, 이번 투어는 워싱턴 DC에서 온 커플과 캘리포니아에서 온 할머니 둘. 그리고 우리 둘이 참여를 하는 걸로 되었는데, 자신있게 우린 싱글 카약을 탈 거야.. 했다가 나중에 근육통으로 고생을 하게 된다. 

장비를 준비하고. 입수하기 전에 카약 운전법이나 물에 빠졌을때 (capsized) 카약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는 법 등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후 바다로 나섰다. 아.. 또 이렇게 바다에서 카약을 다 타보게 된다. 이전엔 가이드 투어 없이 그냥 우리끼리 카약을 빌려서 근방을 돌아다니는 정도였는데, 이번에 좀 더 나가 섬들 사이를 가로 질러 가게 되었다. 날씨는 왜 이리 또 기가 막힌지.. 

뒤를 돌아보니 아내가 많이 뒤쳐져 있다. 뭐..  급할게 뭐있나. 근방 섬들의 역사나 전설에 대해 샘이 설명하는 걸 못 듣는 거 뿐이지. 기세 좋게 싱글 카약을 탄 것 까진 좋았지만, 그리고 그 자유를 느끼는 것도 좋았지만, 더블 카약을 탄 두 사람이 함께 패들링을 하는 걸 따라 가긴 힘들었나 보다. (심지어 할머니들 한테도 뒤쳐졌다 ㅠㅠ)  투어 가이드 입장에서도 뒤쳐진 사람들을 일일이 기다리는 것도 힘든 일일 테고. 어느 정도 따라 가다가 사진 찍고 그러면서 아내를 기다리고.. 다시 따라가면서 중간쯤 거리를 유지하고 뭐 그런 식으로 싱글 카약킹을 즐겼다. 그리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싱글 카약킹이 될 찬스가 매우 높아 보였다. ㅎㅎ

두시간 반짜리 프로그램이었는데, 뭐.. 오리엔테이션 받고 준비하고 사진찍고 그러다 보면 뭐, 정작 한시간쯤 타려나 싶었는데, 2시간 반 동안 꽉 채워 패들링을 했다. 그나마 군데 군데 사진 찍느라 쉬었던 나랑은 달리 계속 쫒아 다녀야 했던 아내는 그야말로 2시간 반 동안 빡세게 운동만 했을 듯.  사무실이 있는 해변에 도착하니 3시간이 지나있었다. 에구 ㅋㅋㅋ 새파란 초보들이 싱글 탄다고 고집 피우더니 오버타임 시킨 셈이다. 장비 정리하고 반납하고 사무실을 나서자 아내는 .. 우리가 만약에 카약을 산다면, 더블을 사는게 맞는 것 같아라며 단호하게 말한다. 아.. 그러니까 그걸 어따 둘 거냐고 ㅋㅋㅋ

이미 6시반. 신나게 패들질을 했더니 간만에 배가 고파온다. Sobo에 또 가볼까 하다가, 토피노의 명소 중 하나인 ‘타코피노’ 푸드트럭이 7시에 문 닫기 전에 얼른 가보자고 한다. 서퍼들 대상으로 재밌는 타코를 팔던 푸드트럭이 열광적인 인기를 끌어서 10 군데가 넘는 지점을 가진 외식 브랜드로 성장했다는 성공신화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해보니 치렁치렁한 머리와 얼굴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은 젊은 청춘들이 잔뜩 와서 북적대고 있다. 아마도 지점마다 조금씩 메뉴가 다른 것 같은데, 이곳 본점에서는 직접 담근 김치로 만든 ‘김치/돼지고기 그링가’와 ‘참치 타타코’, ‘소고기 부리또’가 유명하단다. 여기에 피시타코와 치킨 부리또까지 포함해서 주문했다. 우리가 거의 맨마지막 줄이었는데, 정말로 7시 딱 되자 문 닫고 폐점 준비를 하더군. 

김치 그링가를 제외하곤, 내용물은 딱히 색다르지 않았는데 (뭐 타코가 다 그렇지만), 일단 타코 한 개의 양이 어마어마 하고, 타코셸의 쫄깃함이 매우 특별했다. 마치 딤섬 만두피처럼 약간 투명한 느낌도 드는 것이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 외에도 전분을 많이 넣어 쫄깃함을 극대화 시킨 듯 하다. 그걸 또 살짝 구워서 타코나 부리또를 만들어서 군데군데 바삭한 맛도 즐길 수가 있다. 역시 트렌드를 따라간다거나 음식솜씨가 좋다거나 하는 것 만으로는 요식업 서바이벌에서 살아남는게 힘이 든다. 뭔가 이렇게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정신없이 먹다보니 이미 해가 질 때가 다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오늘은 날이 좋아서) 오늘 석양이 기가 막힐 거라고 했는데 (그만큼 이 동네에선 맑은 날을 보기 힘든 모양이다. 우리가 왔던 지난 2번의 토피노 여행도 별로 그렇게 날씨가 좋은 날이 없었다), 시간상 우리 캠핑장으로 가서 저녁놀을 즐기긴 어려울 것 같다. 서둘러 캠핑장으로 돌아가다가 일단 롱비치 해변 주차장에 차를 대어 저물어 가는 노을이 비치는 바다를 구경했다.  아.. 아름답다… 주변 지형을 보니, 이 고장 화가들이 수없이 그려온 그림에 나오는, 딱 그 노을이구나. 그 숲에 그 바다고. 저런 장면을, 이 감동을 카메라로 재현해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발악해본다. 정말.. 미칠 것 같은 하늘이라는 표현이 딱 이걸 보고 하는 말이구나. 

캠핑장에 돌아오니 8시부터 극장에서 ‘곰, 늑대, 쿠거(퓨마?) ’라는 쇼를 한단다. 뭐.. 그냥.. 그저그런 다큐멘터리겠거니… 했는데, 국립공원 직원이 나와서 곰, 늑대, 쿠거와 공존하는 법에 대해 실제 사례와 함께 프리젠테이션을 한다… 이이이이야. 국립공원 직원쯤 되려면.. 저렇게 연기력도 풍부해야하는 구나… 싶었다. 결론은.. 야생동물과 공존하려면 절대적으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거. 그리고 캠핑장에 음식 냄새 나는 건 다 치워두라는 것. 그런데 우습게도 우리 사이트로 돌아오자 누군가가 (아마도 다람쥐) 우리 차에 들어와서 칼로리바를 뜯어 먹은 흔적을 발견했다. 그것도 한 두개가 아니라서 대부분의 칼로리바 포장에 구멍이 나있었다. 뭐.. 아내가 꼼꼼하게 합성첨가물 없는 걸로 고른 거라, 다람쥐한테 치명적인 해는 없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이렇게 죄다 파헤쳐 놓은 걸 보니.. 빡쳐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토피노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