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난 언제가 행복했을라나…?
어릴 적에는, 뭐.. 그리 행복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바보짓을 많이 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언뜻언뜻 떠오르는, 엄마와 같이 가는 오후의 시장 나들이…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핫도그 한 개 정도가 가슴에 따뜻하게 떠오른다.
국민학교 1~2 학년 까지는 어머니와 시간을 많이 보냈었던 것 같다. 자전거도 같이 탄 적이 있었던 것도 같고 배드민턴도 쳤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배드민턴에 열중하던 어머닌 다이아 반지를 잃어버리셨는데, 그 이후로 우리 집에서 더 이상 배드민턴은 없었다.
혹시 <우주소년 짱가>를 기억하시는지.. 그리고 <짱가>가 장렬하게 자폭했던 마지막 회가 방영했던 날을 기억들 하시는지… 그날이 ‘어린이날‘이었다. 울보 아들이 못마땅하시던 아버지는 평소에는 울음을 멈출 때까지 (때리면서) 야단을 치시던 분이었는데, 그날 <짱가>의 희생에 눈물을 펑펑 쏟던 나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시키… ‘어린이날‘이라서 참는다. 운 좋은 줄 알아.”
어쨌건.. <짱가>와 <케산>, <코난> 덕택에 한동안 행복했었다.
예전엔 유달리 미국 드라마들을 TV에서 많이 방영해주었었다. 뭐.. 대부분 슈퍼맨들 이야기이거나, 빨갱이들 때려잡는 이야기들이었지만, 국기하강식에 눈물을 머금고 숙연해지던 모범생이었던 나로서는 덕분에 매우 행복했었다. 특히, <6백만불의 사나이>, <소머즈>, <원더우먼>, <A 특공대>, <기동순찰대>, <스카스키와 허치>, <전격 Z 작전>, <슈퍼 특공대>, <오토맨>, <맥가이버>, <에어울프>, <나이트호크> 덕분에 행복했었다.
대학입시 전문 훈련소와 같은 고등학교에서 3년을 보낸 덕택에 학창 시절은 그리 재미있었던 적이 없었다. 대학시절에는 여기저기 뛰어다녔던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열정적으로 이리저리 몰려다닌 적도 있었고, 열정적으로 영화를 보러 다닌 적도 있었다. 2학년 때, 처음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필름이 거리에서 야외상영을 했었던 적이 생각난다. 비가 쏟아지던 날이어서 야외행사가 취소 직전까지 갔었는데, 무리해서 강행했던 것이 운 좋게 호응이 좋았다. 비가 서서히 멎었고 밤거리에 숨죽이며 앉아서 보던 시민들은 마지막엔 벌떡 일어나서 환호해주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었던 순간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 뒤로는 다른 사람이 만든 영화를 보고 있다가도, 습관적으로 관객들의 호응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대학 시절엔 호프집에서 생맥주 날라가면서 번 돈을 빽판 사느라고 많이 썼다. 친구 놈에게 빌려서 들은 음반에 뻑간 이후로는 매번 청계천 <장안레코드>에 들락날락해가면서 빽판을 사모으고 듣곤 했다. 그때도 나름 행복했었던 것 같다.
애니메이션 일을 시작하면서는… 안타깝지만, 내가 만든 작품에서는 행복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정신없이 일에 빠져 있던 바로 그 순간순간만큼은 재미있었을 뿐. 그래도 남들이 만든 거 보면서는 무척이나 많이 행복했었다. 특히.. 2달 만에 <슬램덩크> 다음 권이 나올 즈음이 되면, 마음이 벌써부터 들떠서 서점을 며칠이고 들락날락해가면서 행복해했었다. (뭐 요즘은 인터넷으로 일본 현지 연재를 다 받아 볼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이후 30권, 31권째 연재분이 되어서는 하이텔 만창동에서 대만 네티즌의 협력을 받아 줄거리 연재를 하긴 했다)
결혼하고 나서는 같이 여행을 다녔던 날들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는다. 독신으로 살 때 여행은 마치 <젊은 날의 초상>의 한 장면처럼, 마치 구도자인 양, 뭔가 의미를 찾으려고 긴장하며 다녔었는데, 그런 강박을 버리고 났더니 아주 사소한 경험과 만남도 행복했다. 북미와 유럽으로 배낭여행 다닐 때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을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물론 멋진 경관도 더 많았었고…… 어느 가을 성구미 포구로 훌쩍 여행 갔을 때도 재미있었다. 가는 귀가 먹은 동네 약방 아저씨한테 콘돔 달라고 버럭버럭 소리 질러야 했던 기억도 난다.
정말이지 맨땅에서 시작한 이민 생활이어서, 뭔가 조금씩 벌이가 늘어날수록, 영어 실력이 늘수록, 친구들이 늘어날수록 행복했다. 이삿짐센터에서 처음 일당을 받았을 때도 좋았고, 처음 월급봉투라는 걸 받았을 때도 좋았다. 이런 소유를 바탕으로 하는 행복의 크기는, 결핍의 크기와 그것에 따르는 욕망의 크기에 비례한다. 물론 가지는 게 많아질수록 스트레스 역시 늘어나기도 하지만……
시간여행을 다루는 만화나 영화에서 흔히 “아픈 곳이 없으니까 날아갈 것 같아…” 하는 대사가, 이제 너무 이해가 가는 나이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단 한 군데라도 안 아픈 날이 없었으니 몸에 아픈 곳이 없다는 감정이 어떤 거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가끔, 아주 가끔, 걷거나 뛰는데 허리나 무릎이 아프지 않은 날이 있으면 완전 로또 맞은 행복에 잠긴다. 건강에 감사하게 된다.
설레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설레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심장이 뛰는 건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전철을 잡아 타기 위해 계단을 뛰어오를 때 이외엔 없다. 소년중앙 신간을 기다리고, 슬램덩크 신간을 기다리고, 극장의 빨간 의자에 앉아 스크린에 빛이 꽂히는 순간을 기다릴 때만큼의 설렘을 또 느낄 수가 있을까? 그래서 어른들은 복권을 사는 것인가?
재미도 없고 욕망도 없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배우고 싶은 게 그렇게 많았는데, 더 이상 학습욕구가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정을 주는 것에 겁을 낸다. 하지만 동시에, 그나마 사람들과 어울릴 때가 가장 재미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생각을 나누는 것만이 유일한 재미. 이 딜레마를 극복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된다는 사실은 즐겁다. 십 대 중반부터 자아가 형성된다고 봤을 때, 그 후 40대까지는 자신의 실제 모습과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워너비 상에 대해 혼돈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제껏 내가 혼자 일해야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여럿이 같이 일하는 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제껏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내 얘길 떠들기 좋아하는 관종 꼰대였다.
어차피 세상에는 내 맘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는 걸 안다. 뭔가를 향해 노력을 한다는 건 물론 존경받을 일이지만, 항상 응당한 보상이 따라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자연스럽게 욕심이 줄어든다. 집착도 줄어든다. 직간접적 경험을 통한 지식이 늘어나지만, 그걸 누군가에게 강요한다는 것의 허무함도 같이 알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집착을 버리게 되자, 남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에 대해 신경을 좀 덜 쓰게 되고, 또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도 솔직한 모습을 보이게 되어 편하다. 나 스스로에게 기대를 안 하니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타인에게 기대를 안 하게 되니까 사람들을 천연덕스럽게 무시하는 버릇도 생겼다. 이렇게, 무척 행복한 순간도 줄어들지만, 동시에 마음속 고통도 줄어드는 상황이 생긴다.
좋아했던 걸 건강 때문에 포기하는 일이 많이 생긴다. 건강 때문에 자기 생활에 규칙을 점점 많이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이제, 어디 한 군데 아픈 것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뭔가를 포기하는 것도 너무 당연해진다. 조금 더 비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도, 경제적인 여유 때문이 아니라 먹는 양이 줄어서 보상심리 때문에 그렇다. 식사량은 줄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을 먹이는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만든 요리, 내가 사주는 요리를 상대가 맛나게 먹는 걸 보면 행복하다. 가수 ‘성시경‘의 유튜브 <먹을텐데>를 보고 있다 보면, 그가 계속 “아아, 행복해…” 하며 감탄하는 순간이 있다. 사실 그렇다. 사는 게 뭐 있나? 그의 말마따나 “좋은 사람과 같이 맛난 음식 먹으면 그게 바로 행복인거지.”
똑똑한 사람보다 친절한 사람이 좋아진다. 나도 친절한 사람으로 늙고 싶다. 친절한 사람이 되는 행복을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