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글을 쓰고 싶은데

안됩니다. 안되네요.

왜 안 되는 걸까요?

사는 건 딱히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막 즐겁고 재미나게 사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일매일 우울해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지 않아요. 침대에서 나오면서 첫발을 디딜 때가 좀 위험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누운 채 최대한 몸을 풀어줍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조용히 인터넷 뉴스를 보면서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하루 동안 움직이다가 다치는 걸 예방해줍니다. 중국 노인네들이 모여서 아침에 태극권을 하는 걸 보면 “저게 과연 운동이 되는 걸까?” 하며 신기해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운동을 위한 게 아니라 부상을 줄이기 위한 거라는 걸 압니다.  

뭐, 대박 풍족하거나 여유 넘치는 생활을 하는 건 아니죠. 그냥 여전히 출근을 하면서 2주에 한 번씩 들어오는 봉급날을 기다립니다. 단지 수입이 지출을 못 미쳐서 매일매일 전전긍긍 살지는 않는다는 거죠. 물가가 오르면 오르는 대로 좀 더 아껴가면서 살 수는 있으니까요. 정기적으로 캠핑을 가거나 외식을 할 정도의 여유도 있습니다. 화장실이 딸린 RV나 신형 전기차를 살 정도의 여유는 없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걸로도 충분히 여가를 즐길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매일 전철로 출근하는 것도 나름 속 편하고 말이죠.    

노후대책은 전혀 없지만,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진 않습니다. 아예 각 잡고 걱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테니 애써 외면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뭐, 정말 각 잡고 걱정하려면 ‘러시아의 침공 문제’, ‘전 세계 인플레이션 문제’, ‘전 세계 플랫폼 노동자들의 인권과 안전 문제’, ‘기후온난화 문제’, ‘한국 선거 결과’ 등, 따지고 보면 너무 많으니까요. 그런 문제들에 비하면 제 개인의 노후 대책 문제는… 뭐… 그리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행동을 수반하지 않은 걱정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짜증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고요. 그냥, 별로 우울한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근데 왜… 도대체 왜… 밝고 명랑한 얘기가 안 나오는 걸까요? 별로 뭐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불안한 심정이 없는데 말이죠. 당장 지금 제 ‘작가의 서랍’에 들어 있는 초안들만 보더라도 ‘세계 평화가 꿈인 소년이 원자폭탄을 설계하는 이야기’, ‘실수와 게으름, 무능력이 모두 죄로 인정받는 사회 이야기’, ‘IMF 이후 변화한 한국 사회의 가치관에 적응 못하는 사람 이야기’, ‘1일 1식 하는 사람의 선택 장애’, ‘MBTI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 등… 참 꾸리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건… 성격인가요, 팔자인가요?

아뇨. 사실 꼭 밝고 명랑한 주제일 필요는 없죠. 현실이 시궁창인데 그게 어디 공감을 얻겠습니까? 현실은 현실대로 보이되, 독자들에게, 관객들에게 매력적인 글이나 영화도 얼마든지 많지 않나요? 최근에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제공한 <나의 해방 일지>가 그 대표적인 사례죠. 또 애니메이션 <Wall-E>만 해도 어떤가요? 무분별한 개발과 과잉생산을 통해 멸망한 지구를 떠나서 우주를 헤매는 디스토피아 우주 난민들 이야기임에도 매우 귀엽고 사랑스럽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잖아요? 심지어 엔딩 크레딧 마지막에 지구 멸망의 원흉인 다국적 독점기업인 “BNL (Buy and Large)”의 로고까지 넣는 농담도 해가면서 말이죠 (https://youtu.be/cjtZnpMIRv8).https://www.youtube.com/embed/cjtZnpMIRv8엔딩 크레딧 맨 마지막에 BNL 로고를 넣어서, 마치 이 작품이 BNL의 스폰서를 받아서 만든 것처럼 농담을 하고 있다.

굳이 찰리 채플린의 명언으로 잘 알려진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매우 현실적인 비극을 담고 있지만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쓰거나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근데, 그걸 어떻게 하는 건지 정말 알고 싶다는 거죠. 현재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재미있게, 웃음코드도 넣어가면서, 매력적인 인물도 넣고, 그러면서도 등장인물들의 삶을 조롱하지 않는, 그런 코미디를 쓰는 방법을 말이에요.


그러던 중, 넷플릭스에서 <Love, Death + Robots (러브, 데스, 로봇)>을 우연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었고, 최근에 넷플릭스가 업데이트되면서 ‘추천 작품 자동 재생 (Surprise Me!)’ 기능을 어떻게 비활성화하는 방법이 없더라구요. 그렇게 보다 보니까… 정말이지 엄청난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력에 깜짝 놀라고, 재미없는 내용에 또 한 번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꾸리한 디스토피아 이야기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높은 기술력에 비싼 제작비를 들여서 저렇게 재미없는 이야기를 몇 편이나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걱정이 다 들더라니까요. 제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저라는 사람이… 참… 전형적으로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는 사람인가 봅니다. 도무지, 제 글이 어떻게 밝고 명랑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 고민에 대한 답은 못 찾던 와중에도, 다른 사람이 만든 재미없는 작품은 또 그렇게 평가질, 분석질하게 되더군요. 근데 그러다 보니까, 왜 제 글이 사랑스럽지 못하고 매력이 없는 건지, 제 글이 가지는 약점이 뭔지 어렴풋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먼저 ‘초심자의 자뻑’이 가장 큰 원흉이라고 봅니다. 본인이 보기에 이렇게까지 어렵게 투자를 받아서, 이렇게까지 노력해 가면서 최고의 기술로 최선을 다해 최고 품질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으니까, ‘엘리베이터 잡아주는 아이에게 느끼는 5초 간의 행복’과 같은 이야기는 시시하게 느껴지는 걸 겁니다 (아… 박해영 작가에게 다시 한번 경배를…). 그런 것보다는 ‘인공지능의 반란’이나 ‘우주 식민지 건설’, ‘삶과 죽음의 갈림길’ 같이 스케일 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겠죠. 밝고 명랑한 이야기보다는 암울한 현실과 미래를 다루는 게 더 작가처럼 보이고 말이죠. 마치 학생들 워크숍 작품에서 ‘현대인의 불안심리’ 주제가 인기인 것처럼요.

그렇게 자신의 모든 노력과 기술과, 자본이 들어간 작품이 가지는 존재적 의미를 찾고, 또 그걸 독자나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꼰대질로 이어집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엔 이 정도 퀄리티 작품에 어울리는 이야기니까, 사람들이 진지하게 백프로 받아들여주길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겠어요. 하지만 독자나 관객 입장에서는 내 시간 들여서 영화를 보거나 글을 읽는데 잔소리만 계속 듣고 싶어 하진 않죠. 물론 좋은 글과 영화가 사람들을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 건 맞지만, 그게 꼭 읽거나 보면서 꾸리하거나 불편해져야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초기 홍상수 감독 작품에서 느꼈던 블랙 코미디에서는 불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조적인 쓴웃음도 마구 나왔거든요. 근데, 그렇게 그나마 극장 안에 갇혀서 봐야 하는 영화도 아니고, 작가의 자뻑과 잔소리가 넘쳐나는 인터넷 글이나 스트리밍 영화를 누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계속 보고 있겠냐는 말이죠.

그리고, 제 글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게 암울한 현실이나 미래를 다룬 작품을 보면 기본적으로 화가 많더라구요. 그것도 사실 듣기 싫은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같이 “옳거니!” 공감하면서 통쾌해하는 것도 1~2분이지, 전철에서 옆 사람이 전화로 통화하는 것도 듣기 싫은 경우가 많은데, 계속 그렇게 화만 내고 있는 걸 봐주기는 힘들죠. 아무리 맞는 말을 하고 있더라도 말이에요. <넘버 3> 한 편으로 충무로 기린아로 떠올랐던 송능한 감독의 차기작 <세기말>이 망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영화는 너무나 지당한 말씀을 하고 있는데, 관객들이 그 지당한 말씀 (그것도 다 아는 사실)을 경청하려고 표를 사고 극장에 갇혀서 영화를 보는 건 아니었던 거죠. 그것도 러닝타임 내내 김갑수 배우의 화내는 연기를 보면서 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등장인물에 정이 안 간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였습니다. <Love, Death + Robots (러브, 데스, 로봇)>의 시즌 2 에피소드 중 하나인 <Automated Customer Service (자동 고객 서비스)>에 나왔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나마 좀 귀여운 캐릭터였는데, 그건 등장인물들이 일상에서 쉽게 발견되는 캐릭터고, 인물들의 ‘감정’이 ‘관계’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었겠죠.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등장인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더군요. 특수부대 군인들이나, 행성 탐사 우주인들 모두 괴물이나 로봇과 싸우는 등 익숙한 환경에서 익숙한 고난을 겪고 있을 뿐이지, 그들 하나하나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모르겠더라구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큰 실례가 되겠지만 애초에 제 글에 대한 자아비판 격으로 시작한 글이니까 이것도 자아비판으로 하나로 언급을 하자면, 작가가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가 작품을 통해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나의 해방 일지>에서 매일매일이 불평불만이었던 염기정이나 염창희, 초반 4회까지는 대사량이 열 줄 이내이고, 심지어 유흥업소 종사자 출신으로 밝혀진 구씨까지 모두 다 사랑스러운 캐릭터였던 건, 작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기본적으로 세상 사람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러고 보니, 20대 때 <젊은 날의 초상>에 심취해서 혼자 여행을 다닐 때, 버스 옆 자리 아저씨가 소주와 오징어를 씹으며 늘어놓던 신세타령들을 잘 들어둘 것을 그랬습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능력치가 쌓이고 쌓여서 결국 자기 작품 캐릭터에 조차 관심이 없어진 게 아닐까요? ‘신경쇠약 사회 부적응자 만화가 문하생이 좀비와 싸우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인 하나자와 켄고<아이엠 어 히어로> 전반부에 나왔던 바로 이 장면이, 아직도 제 글이 재미없게 느껴질 때마다 생각납니다.

결국, 제 글이 재미없는 이유는 성격 때문이자 사람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라는 결론이겠네요. 50이 넘었는데… 글 쓰려면 성격에 태도 교정까지 해야 한다니… 참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뭐든지 하나에 익숙해지려면 초반에 고전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냥 기타 배울 때 F 코드 처음 짚는 단계로 들어섰다 생각해야죠.

애초에 시민사회에서 작가가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요? 지식인으로서 ‘인간의 삶과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을 해석하고, 그 결과를 전파함으로써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공헌’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광대로서 ‘인간 삶을 다룬 이야기를 통해 스폰서인 대중에게 즐거움과 공감,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 것인가요? 두 가지 다 일수도, 어쩌면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고 원래 ‘작가의 소명’ 따위는 없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결국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고, 매력적이지 못한 작품이란 어쨌든 간에 저 위에 나열해둔 어떠한 소명도 수행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죠. ‘연극의 4요소’에도 ‘희곡’, ‘배우’, ‘무대’, ‘관객’은 있지만 작가는 포함되지 않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