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굳은 살 (7)

99년 2월 어느 날. 연초부터 온 세계가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 그리고 한편으론 새 천년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나는 새벽부터 녀석의 부모님의 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가고 있었다. 녀석의 특별사면을 마중하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형기를 90% 이상 채웠으니 관행대로라면 가석방이 되었어도 벌써 되었어야 할 일이었지만, 원래 정치범들에게는 가석방이 적용이 안 되는 건지, 아니면 녀석이 수감 중에 또 무슨 사고를 쳤던 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형기를 거의 다 채우고 나서야 사면이 되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과묵하기 짝이 없었던 녀석의 아버지도,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상기된 얼굴로 얘기를 늘어놓으셨다. 녀석의 어린 시절 이야기, 우리 고등학교로 전학 오기 전 학교에서 사고 쳤던 이야기 등. 그리고, 사회에 나오면 다시 대입 시험을 봐서 한의학을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녀석의 장래 계획까지 꼼꼼하게 세워두고 계셨다. 지난해, 정권교체가 된 후 첫 광복절 특사에서 녀석이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전할 때, 수심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상황을 설명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는 동안에도 녀석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은 드물었다. 녀석의 군 복무 기간과 내 복무기간이 서로 엇갈렸기 때문이다. 녀석이 휴가를 나왔을 때 다른 친구들과 같이 잠깐 얼굴을 보거나, 내가 휴가를 나왔을 때 녀석의 근황을 건너건너 전해 듣고는 했었다. 그리고 내가 말년 휴가를 나왔을 무렵 녀석이 또 수감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확한 사유나 혐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집시법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나 화염병과 같은 단순한 혐의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병장으로 만기제대를 한 녀석이 군 복무 기피를 위해 실형을 받을만한 일을 주도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시에는 종종 있어왔던) 조직사건 조작에 휘말린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서울 구치소에서 만났던 녀석은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아니 담담했다기보다는 무척 쾌활해 보였다. 안부를 묻자마자 집 앞에서 체포되었을 때 형사들과 몸싸움을 벌였던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당시 유명했던 조폭 김태촌을 며칠 전 구치소 식당에서 만났다는 등, 수감생활의 재미에 대해서 너스레를 떨었다. 이후에도 녀석이 진주로 청송으로 이곳저곳 옮겨 다닐 때마다 (정치범들은 이감이 잦았다) 종종 찾아가긴 했었지만, 요구르트와 밥풀을 목욕탕에 장기 보관해서 막걸리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는 등, 녀석의 허풍에 한참 웃기만 하다가 얄팍한 영치금만을 남긴 채 와야했다. 결국 녀석의 혐의에 대해서는 끝까지 알 수는 없었는데, 물론 녀석의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고 해서 당시 내가 딱히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녀석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녀석 역시 별일 없이 잘 지내는 모습 외에는 딱히 보여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수십 년간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이 15대 대통령이 되면서, 녀석의 부모님과 나는 녀석이 금방이라도 나오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녀석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으로 형을 사는 모든 사람들, 자신의 양심에 따른 행동 때문에 수감된 모든 사람들이 사면복권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새 정부 출범 몇 개월이 지나도록 지지부진했었고, 한참 후 녀석의 부모님을 통해서 녀석이 광복절 특사 기회를 거부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선거로 정권교체를 얻어낸 최초의 민주정부라는 수식어가 안쓰럽게도, 그 해 광복절 특사는 여전히 사상전향을 요구했었다. “준법서약서”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사람들에게 지금까지의 범죄 혐의를 인정하고, 앞으로 대한민국의 법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조삼모사식 행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자민련과 연합을 통해서 간신히 정권 교체를 이루고 IMF 정국을 힘겹게 헤쳐나가는 새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준법서약서”를 쓰게끔 설득하기 위해 녀석을 찾아가 봤지만, 애초에 내 설득으로 바뀔만한 수준의 결심은 아니었었다. 하지만, 매번 얼굴을 볼 때마다 너스레를 떨던 녀석은 이날만큼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수많은 양심수들과 그 가족들이 그 기만적인 “준법서약서”에 분개하고 있던 와중에, 당시 가장 급진 조직이었던 ‘사노맹’의 상징적인 인물, ‘박노해’, ‘백태웅’이 어이없이 준법서약에 동의하고 특사를 받은 것에 대해 커다란 상실감을 받은 상태였다.

“니, 그 책 읽어봤나? 아… 참 나… 사람만이 희망이었던 거, 지는 여직 몰랐었나 보데.”  

“인자 ‘불의 시간’이 저마치 흘러가뿠다 카데. 글마 거 빵 생활이 체질 아이가?”

“글마 거, 군바리는 평등하게, 때 되면 계급상승 칼 수 있다고, 후배한테 군대 가라는 시 쓸 때부터 알아봤었어야 카는데, 그라고도 지는 군대 안 갔다 카데.”

“전향서 한 장 쓰는데, 뭐꼬 그게?. 와 책까지 쓰고 난린데?…… 마, 증말 난 모르겠다.”

한참 동안 씩씩거리면서 격정을 토로하던 녀석의 눈에 눈물이 그렁 맺혔다.

“마. 다 좋아. 좋다고. 원래 시인이고, 존경할 만한 활동가였고, 자기 신념 때문에 옥고도 치를 만큼 치렀고, 다 좋다고. 마 근데 웬 전향서? 와그라는데, 갑자기? 정부랑 미리 말을 맞췄나 보지? 이카면서 새 정부를 사포트하는 거가? 것도 아니면 뭔데? 도대체 이해가 안 돼. 정세분석이 현실적, 비현실적이었냐를 떠나가, ‘사노맹’만큼 격렬했던 자생적 전위조직은 없었는데, 지들이 저래 전향서를 써뿌면 우짜자는 긴데? 지금 화염병 던졌다카는 거 하나로 빵에 와있고, 조작 사건 때문에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잡혀 온 사람들도 가마 있는데, 지들만 잘못했다고 카고 저래 나가뿌면 우린 뭐가 되는 건데? 그카고 나서 후원금 받아 유학 가고, 학위 따고, 기성 정치판으로 뛰가고 카면 우짜자는 거냐고?”

이번에도, 고통받는 녀석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십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싸이코에게 몽둥이질을 당하는 녀석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자식의 출소를 맞이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 자세를 취하게 될까?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자식과 함께 같이 환호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꾸짖게 되는 걸까? 한 시간 일찍 도착해서 문 앞에서 내내 어정거리시던 아버지는, 멀리서 녀석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이자 이내 얼굴이 굳어지셨다. 그리고, 녀석에게 손을 내밀면서 “수고했다.”라고 짤막한 인사만을 전하고는 돌아서서 주차해 둔 곳으로 냉큼 향하셨다. 걸음을 옮기는 아버지의 양 어깨가 가볍게 흔들리는 듯했다. 어머니와 함께 서둘러 두부 세리머니를 마치고 나서 우리도 같이 차에 올라 목포항 근처의 식당으로 이동했다. 거의 평생 동안 호남지역에는 인연을 안 두고 살아오신 녀석의 아버지께서, 주변 사람들에게 목포의 식당에 대해 수소문할 때 어떤 연유를 대셨을지 궁금했다. 지금쯤은 전향서를 쓰지 않고 결의를 지키던 아들이 자랑스러워지셨을 지도 궁금했다.   

술잔을 나누게 되면서, 마침내 아들이 출소했다는 걸 실감하셨는지 긴장이 풀린 아버지는 단 몇 잔 만에 금세 얼굴이 불콰해지셨다. 부모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식들의 계획을 듣고 싶어 한다. 갓 출소한 자식이라도 예외는 없다. 복학하기 전까지 중고 트럭을 사서 유기농 야채 장사를 해보겠다는 녀석의 계획에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식사 후 아버지께선 잠시 눈을 붙이겠다고 하시며 자리에 누우셨고, 그 틈을 타서 녀석과 난 식당 뒤뜰로 나와서 담배를 나눠 피웠다.  

당시 서울살이에 지쳤었던 나는 지방 도시에서 전문직 (계약직)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지역 토호들과 관공서 시스템이 한 네트워크처럼 똘똘 뭉쳐 있고, 또 그만큼 익명성이 허락되지 않는 지방 공동체 문화에 도무지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은 설익은 생각이었지만 이민에 대한 계획을 털어 놓았더니, 녀석은 의외로 이민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기성세대들 문화에 지쳤다면, 아이들을 상대로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나가면 된다고, 계속 도망만 다닌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며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한국생활에 지쳐있던 내 마음을 되돌리긴 힘들었다.  

“도망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는 게 아니라,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아서 내가 떠나는 거야. ‘공동정범’이 되기 싫어 범죄현장에서 도망치는 게 뭐가 비겁한 거냐? 아니…. 범죄현장이란 표현은 좀 심했고… 그냥 한랭지옥을 참을 수 없어서, 내가 그나마 견디기 쉬운 염화지옥으로 찾아가는 것뿐이야. 어떤 사람은 잔소리 계속 듣기보다는 그냥 빳다 맞고 털어버리는 걸 선호하고, 어떤 사람은 얻어맞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는 경우도 있잖아? 그냥 내 몸에 걸맞은 지옥을 찾아가는 거야.”

“야. 느그 부모님들도 이제 은퇴하실 때 안됐나? 어무이 아버지는 뭐라시는데?”

“하아… 씨바, 자식이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고, 법으로 부양의무를 만들어 놓은 것도 이 나라가 못 견딜 만큼 싫은 이유 중 하나라고 봐. 평생을 졸라 쌔빠지게 일했는데 나라에서 받은 건 ‘산업역군’이라는 명찰뿐이고, 정작 늙어서 먹고사는 건 자식들이 책임져야 한다니, 야, 씨발 정권교체가 되면 뭐하냐? 이런 것도 하나 안 바뀌는데…”

“마, 그캐도 아부지 어무이 늙으시면 니가 가까이 살고 있어야 안 하겠나? 아들이 마이 있는 것도 아인데.”

“야이… 너희 아버지 어머니 걱정부터 하셔, 좀. 안 그래도 아까 내려오면서 아버지랑 얘기했는데, 니가 다시 대입 봐서 한의대 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하하하. 맞나? ㅋㅋㅋㅋㅋㅋ 우리 아부진 내 고등학교 때 수학 점수도 모르고 계신다 아이가. 내가 마, 무슨 계획이 있어서 사회학과에 간 건지 아신다니까, 하하하.”

녀석의 웃음소리에는 약간의 회한과 약간의 설렘이 묻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녀석과 같이 활동했던 모임 사람들이 출소날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은 좀 이상했지만, 그 사정을 우정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물어본다고 해도 녀석이 제대로 대답해줄 리 만무하고, 또 그 대답을 듣는다고 해도 그 배후 사정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녀석과 나 사이에는 그만큼의 세월의 간극이 있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간극 때문에, 내 이민 결정을 녀석이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학점은…? 많이 모자라? 졸업 언제쯤 할 것 같은데?”

“졸업은… 마, 우짜 될 것 같은데, 그보다 시상 바뀐 거 따라갈라 카는 게 더 어려울 것 같드라. 그… 인터넷, 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인제는 뭘 하든 마, 인터넷을 해야 할 것 같든데?”

“하하하. 그거 금방 배워. 그래도 뭐 벤처 하겠다고 가산탕진하진 말아라. 아… 정말… 그러고 보니, K 형한테 연락 한번 해봐. 그 형 요즘 사람 구하고 다니는 것 같던데…”

“어, K 형? 써클 87? 그 형 뭐하는데?”

“어… 무슨 작은 입시 학원 차렸다고 하더라고. 아닌가? 논술이면 입시가 아닌가? 잘 모르겠네.”

“하하하하, K 형, 또 아들 의식화시키는 거 아이가? “

“크하하핫. 그러기야 하겠냐. 일종의 교육 벤처 아닐까? 개나 소나 벤처 하겠다고 난리라서, 요즘 그만큼 망하는 곳도 많고 그래서, 투자받는 것도 웬만큼 해서는 안돼. 그러지 말고 한번 연락해봐. 아니다. 내가 사람들한테 연락할게. 다 같이 한번 얼굴 보자.”

“맞나? 내가 그 가면 내 아들 의식화시킬텐데 되겠나? 마, 누구 말 맹키로 사람만이 희망 아이겠나?”

“뭐 ㅋㅋㅋㅋㅋ. 니 맘대로 하세요. ㅋㅋㅋ 그때쯤이면 내가 이 나라 뜨고 없을지도 모르지.”

“야 인마. 그카지 말고, 쫌. 니 이민 가면 낸 니 따라 몬가. 빨간 줄 끄서져 가지고.”

“ㅋㅋㅋㅋㅋㅋ 미친 새끼. ㅋㅋㅋㅋㅋㅋ”

이렇게 함께 피식거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녀석과 나란히 길게 뱉어낸 담배연기에는 그리움, 불안함, 답답함 등이 일렁이고 있었다.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우린 아직 어린애들이었다. 녀석이나 나나, 각자의 경험 속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마쳤을 뿐이었다. 노스트라무스가 종말로 예언했던 해였건만, 우린 종말에 대한 걱정보다는 새로운 천년에 더 기대를 하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