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August 2003

삼국지

삼국지 얘기가 나왔으니 좀 더 짚어보자면, 내가 처음 삼국지를 읽어봤던 떄는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당시 김청기 감독이 고우영 삼국지 만화영화를 만들었었고(유비가 태권V의 훈이와 같은 태권도 동작으로 적과 싸운다), 그걸 본 후 덩달아서 삼국지 전체를 읽고 싶어했던 것 같다. 마침 고우영씨가 청소년 대상으로 쉽게 (그리고 야한 장면은 덜어낸) 5권짜리 삼국지 만화가 서점에 나왔으며(그때 처음으로 종로서점이란 곳을 가봤다!!), 어릴 적이야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정말 신이 나서 보고 또 보고 해서 그 만화책만해도 20번을 넘게 봤을 것이다. 당연히 삼국지 줄거리는 모두 외우게 되었고, 한창 열중하게 되어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백과사전을 구경해도 삼국지나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을 찾아보게 되고, 당시 내게 있어서 ‘과학’, ‘로보트’, ‘미래’ 등과 함께 그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는 단어의 하나로 ‘삼국지’를 자리잡게 되었다. 당연히 아버지 서가에 있는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세로 쓰기로 인쇄된)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걸 읽으면서 어린 나이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기도 했는데, 다름아니라 관우의 죽음 장에서 였다. 어릴적부터 그리 무서움을 타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존경해 마지않는 히어로가 원통하게 죽게 되는 첫 경험이었는데다가, 만화와는 달리 월탄의 소설에서는 조조가 관우의 머리를 확인하려고 볼 때 관우의 수염이 순간 꿈틀하는 장면이 얼마나 섬찟하던지.. 그리고 조조가 병에 걸리고 나무로 몸통 조각상을 만들어 관우 머리를 붙힌 후 장사를 지내는 장면이 얼마나 오금이 떨리던지 모른다. 그 이후로 인물 사전에 나온 관우 초상을 보기만해도 가슴이 철렁 철렁 내려 앉았는데, 묘하게도 그런 느낌을 또 받고 싶어서 종종 인물사전을 펼쳐보기도 했다(공포영화를 보는 심리가 그런 거겠지..–;;)

삼국지연의를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여러가지 유형의 영웅들 중에 자신이 선호하는 캐릭터, 혹은 자신에게 투영하고 싶은 캐릭터를 한번쯤 찾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유비, 관우, 제갈량, 조조가 가장 많은 지지도를 얻게 되고, 장비나 조자룡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매니아 취급을 해줘도 무방하다. 물론 나중에 가서 중국을 통일하는 주인공은 위나라의 군사 사마의의 손자뻘 되는 친구가 되긴 하지만, 가장 극적인 승부에서 한참 뒤늦게 출현해서 그런지… 별로 지명도를 갖지 못하는 편이다. 재밌는 것은 한 개인의 선호도가 그 사람이 성장하고 연륜이 쌓여지면서 점차 바뀐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처음 삼국지를 읽었을 때에는 당연하게도 유비를 가장 선호했다. 황손인데다가, 주인공으로 생각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모든 세계를 우리편과 나쁜 놈, 양자로 구분하던 시절에서 우리 편 대장을 선호하는 것은 지당한 처사였다. (게다가 관우와 장비의 형 아닌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모든 관심이 차츰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자’에 집중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정말 이런 걸로 청춘을 보냈다는게 이젠 서글프지만) 제갈공명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역시 이유는 단순했다. 등장인물 개개인을 따로 떨어뜨려서 맞장을 떴을 떄 누가 가장 강할 것인가였는데, 관우, 장비가 아무리 날고 긴다하더라도 제갈공명의 잔머리에는 못당할 것이라는 생각 떄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연의 속에서도 제갈공명은 탁월한 선견지명과 지도력을 발휘해서 뒷날에 가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의 존경을 고루 받고 촉나라를 세우는데 크게 공헌했는데, 아마도 중학교 시절에는 강한 것이 뭔지 한창 궁금했을 때여서, 그리고 물리적인 폭력이 화려한 외관에 비해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여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에 가서는 우리편과 나쁜놈들의 양분법이 깨지게 되는데, 역시 당연스럽게도 조조를 추앙하게 되며, 한편으로는 (당시 넘쳐났던 홍콩영화 탓인지) 관우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된다. 조조의 경우는 십상시와 동탁으로 인한 혼란스러웠던 조정을 일거에 안정시키고, 원소와의 관도대전에서 누구도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승리를 거두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조조에게 있어서 가장 큰 매력은 신분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과감한 인사로 인재들을 주변에 항상 들끓게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각종 세제 및 도량형 개혁 등을 통한 국가 안정책 등 그의 그칠 것 없는 개혁적인 성향에 있었다. 물론 동시에 촉한정통론에 입각해서 쓰여진 나관중의 연의에서 왠지 제도권 교육의 냄새를 느낀 반발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관우에 대해선 철저하게 감정적인 반응이었는데,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고 있는 점이나 중국에서 사당에 모셔지는 종교적 지위(게다가 중국에서는 삼형제가 나란히 섰을 떄 항상 관우가 가운데 선다고 한다) 등의 사실보다도, 단지 그런 ‘의리’를 존중하는 품성이 ‘그냥’ 좋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무척이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고집하는 그런 자존심에서 결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조조와 관우 캐릭터 사이에서 나 자신을 투영하는 갈등은 대학을 거쳐 사회 속에서도 계속 되었다. 이런 갈등은 곧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근본적인 물음과도 맞닿아 있었다. 

나이가 들어 다시 삼국지를 읽게되자, 어느덧 유비의 매력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단지 덕망있는 지도자라는 부분이 아니라..(사실 유비는 덕망과는 거리가 멀다. 끊임없이 잔머리를 굴리는 스타일에 가깝다), 자신의 목표를 견지하면서 멀리 보고(그야말로 긴 호흠 강한 걸음의 실천자이다), 자기 자신의 마케팅에 쉼없이 정진했다는 점.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을 벌이기 적당한 때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천시天時를 기다릴줄 알았다는 점)과 자신의 이미지를 번복하지 않았다는 점 두 가지가 아니었나 싶다. 이 두 가지는 어쩌면 한 가지의 마케팅 전략과 통한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어떤 난관에 빠져있을 때에도 결코 서두르거나 무리하지 않고, 덕망있는 군주라는 자신의 이미지, 때를 못 만나 날개를 펴지 못하는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주변에 전달하는데 성공한 점이다. 때문에 의리 때문이든 멀리 보는 일종의 투자에 의해서든 자기 주변에 영웅들을 목숨바쳐 충성하게 만들었고, 통일의 위업에는 실패했지만 지금까지 덕망있는 영웅이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통일 따위보다는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는게 더 중요하다가 일찌감치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관우가 조조에 몸의 의탁하고 있을 때 잘 살아라라는 식의 편지를 보내는 점이라든지, 죽기 전에 제갈양에게 왕위계승을 권유했던 얍삽함을 생각해 보면 분명 그럴 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특히나 유비와 같이 산전수전 갖은 고생을 다 겪는 동안에, 의연히 때를 기다리고 자신의 이미지 구축에 힘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유비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대통령 되자 마자 국민 화합이라는 명분하에 보수층 끌어안기에 나서는 인간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중에 코에이에서 나온 삼국지2 컴퓨터 게임을 했을 때, 지력, 무력, 매력 3가지 포인트를 전부 계산했을 때 가장 높은 캐릭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자룡이었다. 한번쯤 조자룡을 중심으로 다시 쓰여진 삼국지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최근에 다시 삼국지와 열국지, 초한지 등 고전들을 다시 읽기 시작하는 것은 정말이지 다른 여흥거리들이 전반적으로 재미가 없기 떄문일 것이다. 특히 영화와 애니메이션 분야에 있어서는 전 세계적으로 너무도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 매트릭스와 와호장룡 이후로는 한 시간 반을 붕붕 날라다니기만 하고 끝나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써커스들이 영화라는 타이틀을 걸고 인기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내가 시대에 뒤쳐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만큼은 꾸준하게 발전하고 있다. 끊임없는 경제 불황이 작가정신을 더욱 더 투철하게 만들기 떄문일까? 특히나 최근의 만화 <20세기 소년> 등의 작품이나 애니메이션 <프리크리>, <과장왕자> 등은 아직도 나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