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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K

Beck이라는 만화책이 있다.

Rock 밴드를 만들어 음악을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인데, 콘서트의 열광이나, 기가 막힌 연주기법, 심금을 울리는 가창력 등 전형적인 아이콘이 당연스럽게도 나오지만, 이 만화의 미덕은 밴드 생활의 어두운 뒷배경을 잘 그리고 있다는 것에 있다. 좋은 부모 잘 만난 덕택에 어릴적부터 기타와 같이 살다시피 한 녀석도 나오고, 그 녀석을 시기하는 녀석도 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한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라면 먹으면서 드럼을 치는 녀석, 그나마 부모 집에 얹혀 살아서 밥 걱정은 없지만, 자기 기타를 마련하기 위해 이삿짐 센터에서 짐을 나르는 녀석 등등..

예전에 한참 생각하길, 미술은 그래도 나이 먹어서 시작해도 되지만 음악은 어릴적부터 해야할 수 밖에 없고, 때문에 부유한 집에서 자란 사람만이 음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왜냐하면, 미술은 일단 시각적인 경험을 반드시 매체를 통하지 않고도 자연에서도 많이 받을 수 있는 데다가,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갖기만 한다면 싼 재료로도 언제든지 인정을 받을 수가 있고(예를 들어 연필로만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허다하다), 노력보다는 재능이 우선되는데 반해, 일단 음악은 기교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투여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며, 음반을 돈내서 구입하지 않는다면 매체를 통해서 일반적인 경험만을 할 수 있고, 대개 비싼 악기일 수록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BECK에서 자기 기타를 갖기 위해 이삿짐 센터에서 짐을 나르는 캐릭터를 보고,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결국 자신의 꿈을 지켜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 밖에 없다. 돈이 어느정도 문제 해결을 쉽게 만들어 주긴 하겠지만, 그래도 결국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음반 사전 검열이라는 것이 있던 암울한 시절.. 이른바 빽판으로 밖에 유통이 안되던 레드 제플린이나, 비틀즈, 그 외의 여러가지 프로그레시브 음악들을 듣고 싶었지만, 레코드 플레이어가 집에 없는지라 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하루종일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맥주를 날라가며, 때로는 파트타임으로 책을 날라가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두 달 후에 조그마한 뮤직박스(라디오,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턴테이블이 합체된 소형 콤포넌트)를 구입했다. 몸이 힘들고 고달팠지만 나중에 집에 누워서 여러가지 음반들을 들을 생각을 하니 기운이 절로 솟았다. 또 한번은 4헤드 VCR을 구입할 때 였다. 단편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나에게, 정지화면과 느린 화면이 노이즈 없이 깨끗이 잡히는 4헤드 VCR이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마찬가지로 저녁에는 과외강의를 하고, 낮에는 맥주를 날라가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뒤로는 자취를 시작해서 주로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젊고 활기차던 시절이었다.

이민와서 이제 10개월이 지나간다. 오기 전에 계획했던 일들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도 많고, 생각 외로 흘러가는 것도 많았다. 그중에서 나와 아내를 가장 위축시켰던 것이 바로 취직의 어려움이었다. 사실 한국에서 하던 일을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이민 전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막상 여러 번 시도를 하고 두터운 벽을 느끼고 나니 어깨에 힘이 빠졌다. 이후에도 여러가지 직종에 시도를 했고, 나중에는 그야말로 아무 일이라도 해보려고 시도를 했지만 쉽게 일자리가 얻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알음알이로 알게된 사람들을 통해 받는 번역일이나 몇몇 파트타임 일을 해서 살림을 꾸려나갈 수는 있었지만, 아무리 해도 안정된 직장을 가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어느 나라에서건 지금의 세상에서 안정된 직장이란 자기 사업을 하는 경우 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점차 자신의 능력에 의심을 하게된다.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이 사회에 불만을 갖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런 경우가 반복되면,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되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어제는 이삿짐 아르바이트를 했다. 우선.. 안그래도 요새 운동하는데, 운동 삼아 해본 것도 있고, 여기는 이렇게 몸을 써서 하는 일이 급여가 쎄다는 이유(일당이 12만원 정도)가 있었지만, 그보다 몸이 좀 괴롭더라도, 하루의 이삿짐 일도 못해낸다면 정말로 나 자신의 능력에 의심을 할 것 같았다. 10년 전에 VCR과 뮤직박스를 사려고 열심히 일을 하던 때를 되 씹으며, 아무리 나이 먹고 이역만리에 있는 지금이지만, 맘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뭐 일종의 극기훈련이었다고나 할까… 쩝.. (말을 하고 나니까.. IMF 시절에 ‘아빠의 도전’-제목이 맞던가? – 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각이 난다. 에고)

간만에 하는 중노동이라서 몸이 좀 버겁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를 찾았다. 오랜만에 고객들이나, 동료들이 만족해하고, 고용주로부터 열심히 한다고 인정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부수입 생긴게 더 좋긴 했지만) 그래서인지.. 나는 역시 내 사업보다는 고용되어 일하는 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로 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나에게 힘을 준다.

P.S 아침에 일어나보니 단 며칠간의 운동으로 배에 세로 줄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王자가 새겨질 징조라고 했지만, 아내는 터무니 없다고 한다. 결국 오늘 하루 잘 먹고 잘 쉬었더니 그 세로줄은 어디갔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옆으로 누워 자다가 배가 꾸겨진 것이었을까? 아…王자의 길은 멀고 험하다.

우동욱 (2003-12-22 21:56:59)
하하, 너무 웃긴다야, 니 체질에 왕자는 좀 무리지 않을까? ㅋㅋ, 아직 1년도 지나지 않고 취업에 대해 너무 초조해하는건 아닌지? 좀 여유를 가졌으면…이런저런 경험해 가면서 뭔가 할일이 생기겠지..뜻깊은 성탄절 보내고! 세식구 다정하게 지내길 바랄게..

MADDOG Jr. (2003-12-23 01:46:26)
흥.. 선새임.. 이제 王자 안생긴 사람들은 안 끼워줄 겁니다.^^ 건강하세요…

Ana (2003-12-23 02:07:22)
사흘 운동하고 여기저기 땡긴다고 애고애고하면서, 王자가 생기면 나랑 안 놀거라고 협박하는 남편이었다..

석진 (2003-12-27 11:00:25)
어떤 일이든지 의미를 부여하고 열심히 재미있게 사는 모습이 좋군…

MADDOG Jr. (2003-12-29 00:47:34)
몸으로 직접 부딪히면서 사는 건 자네한테 배운 것이네. 한국에서 수해만 나면 수재민 돕겠다고 달려가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