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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

11월 23일

장소는 안양에서 살던 주공 아파트였다. 안방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거실에서 뭔가 기척이 나서 나가보니 현관 앞에 아기 호랑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짓이 고양이 마냥 귀엽고 해서 쓰다듬어 주려고 손을 머리 쪽으로 갖다 대려니, 갑자기 녀석이 달려들어 팔을 덥썩 물었다.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녀석을 이 벽 저 벽에 부딪혀 가며 간신히 떨어뜨려 놓고는, 사정없이 패기 시작했다.

한참을 패고 있는데.. 현관 밖에서 큰 그림자가 슬금슬금 들어 오는 걸 올려다보니.. 집채 만한 어미 호랑이가 지 새끼를 패고 있는 아동 학대범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단 맹수와 마주칠 때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규칙이 있는데, 절대 눈을 회피하지 말 것.. 눈 싸움에서 지면 그 땐 죽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절대 등을 보이지 말 것.. 등을 돌려 달아나도 100% 물어 뜯기게 된다. 이런 걸 머릿 속으로 더듬어 가며.. 희한한 눈초리를 만들어 어미 호랑이를 노려 보면서, 슬금슬금 뒷걸음질해서 안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궈 버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911(왜 911이었을까?? 안양이면 119를 눌러야 했을텐데)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이 친구들 느려터졌다.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돌리더니 결국 무슨 인도계 교환원이 전화를 받았는지 발음도 잘 알아듣지 못하겠고, 저 쪽에서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런 답답한 마음으로 불안해 하면서 결국 꿈에서 깼다.. 호랑이한테 물렸던 오른 손은 아직도 얼얼했는데..(잠결에 아내가 깔고 누웠는지.. 딸기가 물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한국에서 살 때에도 이런 꿈을 몇 번 꾼 적이 있었는데, 결국 너무나도 게으른 나머지 복권을 사질 못했었다. 이번에는 모처럼 기운을 내어 근처 몰 까지 복권을 사러 나갔었다. 원체.. 복권에 당첨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성격이라 반신반의로 로또 3개를 찍었지만, 또 나중에 이런 꿈까지 꿨었는데, ‘아 ~ 그때 복권 살 껄.. ‘ 하는 후회를 남기기 싫었다.

새벽에 인터넷으로 맞추어 본 아내는, 68불(한국 돈으로 6만1천원 정도..)에 당첨되었다고 나를 깨웠다. 뭐.. 그리 큰 돈도 아니지만.. 나름대로 꿈이 신통하다고 생각하고는 계속 잠을 청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자세히 다시 맞추어 보니.. 그냥 6만1천원이 아니라.. 5천5백만원이랑 숫자 하나가 틀린 것이었다. 그것도 나는 2번을 골랐는데, 당첨번호는 1번이었던 것이다. 정말로 한 끗 차이다!! 인간이 원래 간사한지라.. 새벽에는 6만원 만해도 이게 어디냐.. 하고 기뻐서 잠에 들었는데, 이제는 5천 만원 못 탔다고 아깝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내는 옆에서 이전에는 천원 이상 복권에 당첨된 적도 없는데.. 6만원이면 어디냐.. 이제부터 운이 풀리는 거 아니겠느냐.. 라고 위로해준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겠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이번에 생긴 공돈은 그간 구정물 개들 씻기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근사한 외식이라도 시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만으로 이민생활 9개월을 채우고 있다. 첨에는 청운의 꿈을 품고 넓은 땅에 도착을 했지만.. 그렇게 맘대로 녹녹치가 않다. 북미 제3의 영상도시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유휴인력이 넘쳐나서 경쟁도 심하고 내 경력으로 직장을 잡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조금씩 어떻게든 살 길이 생겼는데, 최근 몇 달 간 계속해온 번역일도 그 중 하나다. 그리 벌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꾸준하게 수입이 생겨서 아내나 나나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지난 주부터는 선배가 새로 시작한 유학원에 출근을 시작했다. 누구든지.. 여기 와서 무슨 일을 하면서도(접시를 닦든, 청소를 하든).. 첨에는 ‘내가 이 짓 하려고 여기까지 왔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던데.. 내가 그 짝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졸부들 자식 조기 유학 보내는 것을 고깝게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제는 내가 여기서 그 국물을 얻어먹게 생겼다. 그렇다고 선배가 간곡하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데, 매정하게 딴 일 찾겠다고 돌아설 수도 없는 일이었고, 타고난 외모가 전형적인 책상물림인지라 그 동안 알아본 육체노동 일도 쉽게 찾을 수 가 없었다.(겨울 동안 근육을 키운 다음에.. 봄 되면 쫄 티를 입고 다니면서 구직활동을 하든가 해야지..) 마침 향 후 몇 년간은 캐나다 조기 유학 사업의 경기가 계속 호전될 전망이므로.. 몇 년간 정착한다는 생각으로 같이 시작하기로 했다. 한국에 살 때는 졸부들이라고 경멸하던 사람들이 이젠 모두 내 소중한 고객이 되는 순간이다. 역시 사람의 인생이란 아무도 예측을 할 수가 없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의무는 있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외의 신념은 모두 방법론일 뿐이다. 이제 더 이상 특정한 방법론을 신봉하기 위해서 남을 미워하지 않아야 겠다.

*PS : 모든 사람이 저 꿈은 태몽이라더군요. 그것도 장군감을 가질 꿈이라네요. 이 글을 읽으신 분 중 아기를 가지신 분께 저렴하게 팔겠습니다.

MADDOG Jr. (2003-11-24 04:56:18)
이 글을 읽은 아내는 왜 아기 호랑이를 팼냐고 구박을 한다. 패지만 않았어도 5천만원이 됐을 꺼라나 –;;

석진 (2003-11-27 18:28:17)
잘 지내고 있구나… 한끗차이로 대박을 못 터트린 사람들중에는 복권중독자가 많다고 하니 주의하길… 건강해라

석진 (2003-11-27 19:05:15)
참 어머니께 전화드리니 전화번호가 없다고 하던데…

MADDOG Jr. (2003-11-28 15:18:00)
오랜만이구먼… 계속 이렇게 홈피를 찾아줘 고맙네. 어머니 핸드폰은 아마 해지했을거야.. 집으로 전화하면 될텐데.. 요즘 아버지 항암치료 기간이라 어떨지 모르겠군.. 잘 지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