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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에서 살아가는 법 3

밴쿠버 근교의 섬인 보웬 아일랜드에 이사온 지 벌써 4개월이 후딱 지나갔다. 처음에는 슈퍼 점원 일에 적응하느라 우왕좌왕하면서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지만, 차츰 일이 손에 익어가면서 그야말로 섬생활을 만끽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행히 대부분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곳 주민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었고, (아직 친구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꽤 친한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집 앞으로 섬에서 가장 큰 길이 지나가지만,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있는 뭍으로 왕복하는 페리시간을 따라서만 교통량이 생기므로, 평시에는 조용한 섬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한다. (이제는 철이 지났지만) 도보로 몇 분 거리에 가면 게낚시나 굴따기를 할 수도 있고, 좀 멀리 있는 해변에 가서 조개잡이도 할 수 있다. 아직 생선 손질을 하지는 못하지만, 낚시대를 던지면 척척 입질을 하는 곳이 이곳이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낚시배를 사서 좀 멀리 나가 대하도 무진장 잡아 올릴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고, 친구도 사귀고, 생활의 여유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일. 정직하게 벌어서 세금을 내고, 그 세금을 돌려받을 노후에 대한 걱정 없이 생활을 즐기는 것. 그야말로 우리가 이민을 올 결심을 했을 때 꿈꾸던 생활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인지라.. 가끔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도 마찰이 생기고, 가끔은 일을 좀 더 조금 하고 쉬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도 한다. 지금의 생활보다 좀 더 업그레이드하고 싶은 욕구도 마찬가지로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멋진 저택에서 사는 것을 보면, 그런 집에서 살고도 싶고, 좀 있어 보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신분 상승의 욕구도 느낀다. 집을 살 돈을 마련하거나 공부를 할 돈을 마련하려고 저축을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점점 여유가 없어진다. 가장 불안한 것은 내 나이 40이 넘은 후에도 이렇게 한국인 슈퍼에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면.. 그 때 그 생활을 내가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애초에 그런 걸 각오하고 이민을 왔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을 것 같지만… 인간이란 당초 나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법이고, 이렇게 자신이 안서는 것은 각오를 했다고는 하지만, 은근히 지난 20년간 간직해왔었던 창작활동에 대한 꿈에 미련이 남아서일지도 모른다. 남자에게 있어서 안빈낙도의 생활과 입신양명은 양날의 검처럼 항상 같이 동반되는 것일까?

여하튼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고 있는 우리 부부에 반해서, 그간 직장 동료 중에는 나이 서른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 많았는데, (물론 지금은 우여곡절 끝에 모두 그만두었다. 얼떨결에 우리 부부는 직장에서 최선임의 위치에 올라서버렸다).. 이는 어쩌면 최근 밴쿠버에 이민 온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서(특히 투자 이민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밴쿠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소개하자면…

일단.. 밴쿠버에 와서 패기를 가지고 뭐든 해보려고 했으나 곧 보수적인 캐나다 사회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다. 한국에서라면 특유의 밤 유흥 문화를 접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보겠지만, 밴쿠버에서는 그렇게 놀 것도 없다. 이곳에서는 어두워지면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죄다 집에 박혀 산다. 교포들을 만나러 주말보다 교회에 가보지만, 자기와 같은 속물들로 가득해서 돈만 가진 사람들이 예배는 안보고 자기 차 자랑만 늘어놓는다. 가끔 그 속물들과 어울려 골프도 치러 다니고 해봐도, 기본적인 패배감은 지워지지 않는다. 결국 갈 수 있는 곳은 이곳에 여기 저기 산재해 있는 카지노 뿐이다. 처음에는 소액으로 재미있게 놀아보려고 가지만, 탁월한 승부근성을 가진 한민족의 핏줄인지라, 곧바로 큰 배팅을 시작한다.

그렇지 않아도 가진 것은 돈 밖에 없었고, 돈이 있어도 캐나다에선 쓸 곳도 없고, 한국에서처럼 떵떵거릴 수도 없다. 다른 사람이 우러러봐주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냥 영어도 못하는 언어지체자일 뿐이다. 이곳의 모든 행정이나 사무는 한국처럼 똑 부러지는 법이 없이 흐리멍텅해서, 일일이 전화를 걸거나 직접 찾아가 말로 따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근데 언어가 안되니 그런 걸 해결 못하고 속만 끓인다. 한국에서는 찾아가 으름장을 놓거나, 꼬리를 내리고 봉투를 집어넣거나 술자릴 마련해서 형님 동생 사이가 되면 해결이 될 일인데, 이곳에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영어가 안되니 만사에 주눅이 든다. 당연히 가장의 권위도 땅으로 떨어진다.

근데 카지노는 일단 돈 많으면 VIP대우를 받는다. 영어도 필요 없다. (딜러와 대화는 원칙적으로 금지)간단한 룰만 익히면 만사형통. 더욱이 그 어렵다는 한국 수학 교육을 겪었기 때문에 배우는 데에도 큰 무리는 없다. 가끔 돈을 딸 때도 있는데, 이럴 때는 아내가 좋아하면서 가장의 권위를 세워준다. 그러나…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카지노를 이기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다. 그건 불변의 진리이다. 게임이 블랙잭이 되었든, 바카라가 되었든(바카라는 게이머가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 50%에 가까운 게임), 카지노가 지게 시나리오가 흘러가지 않는다. 몇 만불 따서 기분 좋아하다가 다음 날 수십만불 날리는 사람이 허다하다.

이렇게 되면 가정은 파탄나고 애꿎은 밴쿠버 사회에 대한 증오만 남는다. 자식 교육 때문에 버티다 버티다 못해 어떤 이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하고(근데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잘 살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는 근교의 섬으로 기어들어와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일을 해 보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가게에서 일하는 이런 캐릭터들은 어떻게든 뭍으로 뛰쳐나가 카지노에 출근을 했다고… 사실 밴쿠버가 문제겠는가? 그 사람이 문제지..)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우린 정말 돈 없이 이민 온 것을 차라리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비록 싸구려 한국 차를 사는 바람에 1년 지나자 마자 잔고장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그 외에는 밴쿠버 사회에 보다 빨리 적응하는데 도움을 얻고 있는 것이다. 앗싸리 우리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 진작에 깨달아서 목표를 잡거나 그것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덜하다. 우린 언어적으로는 초등학생 수준이고, 사회경력 상으로는 고등학교를 갖 졸업한 사회초년병인 것이다.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잡기 위해서는 개인신용을 갖는 것이 필수적인데, 고등학교를 갖 졸업한 우리로서는 일단 꾸준한 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반복적인 영어 사용을 통해서 영어 회화의 수준도 높혀야 하고, 이 사회에서 인맥을 넓혀야 차후 구직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주 정설이다. 이런 모든 우리의 목표에 있어서, 현재로는 지금 우리가 일하는 직장만큼 완벽한 조건을 가진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각종 문화 예술에 종사하는 손님들과 교분도 쌓고, 당연히 영어 사용 횟수도 늘어난다. (의외로) 돈도 짭짤히 모이고 있고, 무엇보다 세금을 납부하기 때문에 내년부터는 보다 많은 금융활동을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세금 납부 기록이 없으면 정기 저축도 개설하지 못하고, 융자는 물론 더욱 어렵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엇을 했었는지 생각하면 지금 내가 할 일을 잡는데 도움을 줄 것 같다. 일단 나와 공통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클럽에 가입해서 많은 인맥을 만들었고, 클럽 활동을 열심히 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지금 당장을 어렵겠지만, 차차 그 일을 찾아보려고 한다. 나이 40이 되어 여전히 슈퍼마켓 종업원을 하고 있더라도, 여가시간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생활에 만족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