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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따지고 보면 내가 ‘의리’라는 단어에 천착해온 이유는 죄다 내 생김새 탓인 것 같다. 어릴 적부터 내 얼굴은 ‘후덕’하다거나, ‘호탕’하다거나, ‘다정’하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었고, 좋게 말하면 ‘똑똑’해보이는 편에 속했으며, 나쁘게 말하면 ‘얌체’같은 인상이 대체적인 중평이었고, 심하게 말하면(실제로 이런 얘길 들었다!!) ‘배신’의 상(象)이라고 했으니.. 내 주위에 있던 친구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의리’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었다. 사람들의 그런 대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춘기 무렵부터는 나는 의도적으로라도 남들에게 더 호탕하게 보이려고 노력했고(… 머.. 사실 의도대로 된 적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더 ‘의리’를 따지는 것처럼 보이려 애썼으며, 실제로도 아직까지 나에게 있어서 ‘의리’라는 것은 인간이 지켜야할 중요한 덕목으로 꼽히고 있다. 결혼 전에는 개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머나먼 이민 길에 개를 데려왔고, 또 딸기 때문에 좋은 거주지를 구하는 것이 여간 힘든게 아니지만..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모두, 그것이 ‘의리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 지켜야할 일’이라고 생각(혹은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스로로부터, 혹은 어릴적 즐겨보던 홍콩 액션영화로부터 세뇌당한 나에게 ‘친구’라는 개념은 아주 귀중한 가치를 지니는데, 친구를 돕는데에 있어서는 어떤 이해관계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첫번째이고, 역시 친구를 만나는 것에도 어떤 이유나 예약이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하나의 필요조건이 된다. 근처 동네를 지나가다가 ‘어..? 한번 얼굴이나 보고 갈까?’하며 스스럼없이 볼 수 있다거나, 매일같이 만나서 별로 딱히 할 말이 없는데에도 밤새껏 술을 마실 수 있는 정도의 관계.. (사실..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가 있다면 왜 밤새 할 얘기가 없겠는지.. 내 지난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들만 늘어 놓더라도 몇 달간의 밤은 샐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런 게 친구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결혼을 통해 인생의 동반자가 생기고, 내 생활의 일정을 계획하는데 있어서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부터는, 이러한 일련의 ‘멋드러진’ 행동들이 편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어떤 기혼자로서 친구를 사귀는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해본다. 겉멋에 연연하지 않고도 내실있는 우정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역시 인간이란 이렇게 평생을 공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30여년간 살아온 조국을 등지고 남의 나라에서 살게 되었을때, 가장 서글픈 것은 가족과 떨어졌다는 것과 함께, 친구들이 계속 보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보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열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매일같이 일어나는 문화적 충격에다가 경제적인 상황도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으며, 이런 저런 문제로 아내와도 번번히 다툼이 있다보면, 무엇보다도 친구들과 만나 술 마시고 낄낄거리고 바보짓도 하면서 훅훅 털어버리고 싶었던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이민자들과 비슷한 문제에 대해 화를 내고, 소리도 지르면서 그러게 시간을 보내면, 여러가지 문화 충격에 대한 스트레스도 좀 해소가 되고 했을텐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첫번째로 내가 ‘친구’라는 개념에 대해 여러가지로 기대하는 것이 많다 보니까, 쉽사리 친구를 사귀게 되지도 않았고, 일단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세계관이 비슷한 한국인 이민자들을 만나기가 무척 힘들었으며, 젊은 한국인 유학생들은 나와는 너무도 별천지의 세상을 살고 있어서 대화조차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랜딩한 많은 한국인 이민자들의 경우 대부분 돈을 많이 가지고 들어온 터라서 생활의 기본 수준자체가 달랐는데, 예를 들어 그 사람들은 직업을 찾기보다는 사업꺼리를 찾아다녔으며, 한국보다 훨씬 싸다고 하면서 기본적으로 골프를 사교행위의 중심에 두었고(아무리 싸다고 해도 한번 치는데 일인당 10만원은 든다고 봐야한다), 자녀들 교육에 관심이 지대해서 대부분의 화제가 이곳 중등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더우기, 내가 이곳에 올 즈음에는 한국에서 투자이민(재정수준을 심사해서 이민여부를 판단)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돈지랄’이 범상치 않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아무튼 한국인 이민자 친구를 사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백인이라든지 다른 나라 이민자를 친구로 사귀는 것이 쉬운가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상대가 친구하는 개념에 대해 기대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상대가 자신이 친구로서 가져야할 의무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곳 백인들의 경우,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샌드위치나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는 것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은데(물론 위생에 관련한 문제로 받아들인다), 이런 사소한 문화적 차이가 친구로 가까와지기에는 쉽지않게 만든다. 그리고 이곳에서 태어난 젊은 ‘캐네디언’ 혹은 ‘2세대’들의 경우, 비록 우리와 비슷한 문화적 관심사를 갖거나 노는 물이 비슷하다 할지라도, 이민 1세대들의 답답한 영어를 참을성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들을 찾기는 여간 힘들지 않을 뿐더러, (이제껏 만나봤던 아이들) 대개의 경우, 너무나도 처지가 다른 이민 1세대의 입장(의사소통에 대한 문제로 주류사회에 진입하기 힘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공감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2년 남짓 이민생활동안 이곳에서 친구로 지낸 사람들은 모두 한국에서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막상 이곳에서 처음부터 만나서 친구가 된 사람은 없었다. 물론 친하게 지낸 백인들도 몇 명이 있었지만, 이걸 친구 관계로 봐야하는지… 상대가 나에게 어느 수준까지 기대하는지… 하는 듯한 (문화적 차이로 인한) 의구심이 어느 수준이상의 인간관계를 만들지 않았고, 이런 문제 때문에 평생가도 진정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할거라면서 우울해 한 적도 있으나, 언젠가부터는 머… 그냥 이렇게 친구없이 지내니까 그런대로 또 지낼만 하네.. 하는 자포자기의 형태까지 진입하게 되었었다.

며칠 전… 친하게 지내던 보웬섬의 ‘마리’할머니로부터 엄청난 통지를 받게 되었는데, 자신의 유서에 증인이 되어달라는 것과, 할머니가 아끼는 여행용 자동차를 상속 받아달라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펄쩍 뛰면서 앞으로 수십년은 더 건강하게 사실거라고 했으나.. 생각하고 보니 너무나도 고마운 얘기였다. 일단 우리를 믿어준다는 얘기고, 그리고 자신의 가족처럼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니까, 이는 내가 생각하는 친구의 개념과 가깝다.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친구를 발견해낸 기분이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 해준 것도 없었는데, 우리를 그렇게 생각해준 것에 대해 너무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한 것이라곤… 딱히 여기가 캐나다라고 해서 별달리 특별하게 한 것도 없고,, 그저 한국에서 친구들에게 한 것처럼 한 것 뿐이었다. 어쩌면.. 친구라는 것은, 그런 상대에 대한 호의는, 전세계의 어떤 문화에도 모두 적용이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올해… 벌써 반이 가까와진다. 하지만.. 지난 2년간의 이민생활에 대한 투자가 천천히,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보영 (2005-06-01 04:36:41)
정말 놀랍고도 고마운 일을 당하셨네요… 두루두루 축하드려요~~

또 보영 (2005-06-01 04:37:49)
저 또한 대단히 많이 기쁘답니다. ^^

우동욱 (2005-06-03 21:30:36)
마음을 나누는 친구란 가까이 있으면 좋겠지만 다 그럴수 없기도 해. 천천히 좋은 친구를 알아보고,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게 살아가는 일인 것 같아.

MADDOG Jr. (2005-06-04 01:01:55)
앗.. 선새임… 이렇게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