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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장자와의 만남

어제는 간만에 우리 부서에 아무 간부사원도 일하지 않는 날이라서 모처럼 편하게 하루를 보내려고 했는데, 마침 옆 동네 지점에서 전화가 와서 손님을 한 명 보낼테니 컴퓨터 수리를 빨리 좀 해줄 수 없겠냐고 한다. 뭐 원래는 이렇게 순서를 어기고 하는 경우가 없지만, 이웃 지점의 부서장이 특별히 부탁을 한 것도 있어서 그러자고 했는데, 얼마 후 어떤 할아버지가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와서는 메모리 업그레이드와 컴퓨터 청소를 오늘 안으로 해달라고 한다.

이런 젠장! 특별히 부탁을 받아서 해주는 것인데, 이렇게 당당하게 오늘 안으로 끝내달라고 하면 이쪽에서도 마음이 좀 상한다. 게다가 ‘컴퓨터 청소’라는 두루뭉실한 용어를 쓰면 내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경험상 이런 손님들이 나중에 말들이 많다. 제기,… 까탈스런 손님이라서 옆 지점에서 보낸 건가??

나 : 컴퓨터가 무슨 문제가 있는데요?
영감 : 그냥 메모리 업그레이드랑 청소만 해주면 되는데…
나 : 무슨 문제가 있는 건데요?
영감 : 좀 느려서….
나 : 잠시 체크 좀 하겠습니다.

노트북 전원을 켜고 천천히 체크를 한다. 가끔은 전혀 다른 이유가 원인이 되어서 느려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손님에게 어떤 수리를 할 것인지 미리 얘길 해둬야하기 떄문이다. 영감은 손목시계를 쳐다 보는 둥 바쁜 척을 한다. 뭐.. 그래봐야..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보아하니 그리 안좋은 상태는 아니다. 3~4년 정도 된 구형 노트북이고 여기저기 꺠진 자국도 있는데다가 바이러스가 좀 있는 것은 같지만 바이러스 방지 프로그램들이 충분히 있어서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메모리도 이미 768메가나 있다. 이 컴퓨터가 느린 것은 아마도 하드 디스크가 정리가 안되어서 그런 것일 테다.

나 : 보니까 메모리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마도 메모리를 업그레이드 해도 많이 빨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감 : 그냥.. 메모리 업그레이드 해줘요.
나 : (무시당해서 기분이 상했다) 그러죠 머.
영감 : 그리고 청소도 해주고요.
나 : 근데.. 아직 청소를 뭘 해달라는지 이해가 안가는데.. 스파이 웨어 청소를 해달라는 거예요? 아니면 레지스트리를 청소해달라는 말이예요?
영감 : (전문 용어에 좀 주눅이 들었다) 뭐 이것 저것..
나 : (에라이..) 그러죠 뭐..

뭐 이런 거야.. 늘 있는 일이지.. 냐야 잘 고쳐주고 수리비 청구만 잔뜩 하면 된다. 가만있자 이 양반한테서 얼마나 뜯어낼 수 있을라나.. 그리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영감 : 내 개인 정보 필요하죠?
나 : 네

무슨 카드를 던져주는데, 우리 회사 카드다.. 흠 직원이었군.. 근데 회사 카드 모양이 이상하다. 회사 이름이랑 자기 이름만 크게 있고, 무슨 직책인지도 없고 사진도 나와 있지않다.

나 : 이게 원데요?
영감 : 내가 이 회사 소유주거든..
나 : (!!!!!) 그래요? 알았으니까 어쨌든 이름하고 주소랑 전화번호 줄래요?

이런 젠장.. 왕회장이었구만.. 나름 의연하게 대처를 하긴 했는데…

영감 : 전화번호는 XXX-XXXX이고 주소는 회사 주소를 쓰면 되요 (명함을 던져주면서) 여기 있어요.

명함을 보니 이라고 되어있다. 쩝

뭐… 냉큼 받아서 메모리 업그레이드 해주고, 바이러스 다 잡아주고, 하드 드라이브 정리해주고… 키보드 사이에 낀 먼지까지 (알아서!!) 다 청소를 해주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수리비 청구를 해야하는지 알 길이 없어서, 우리 지점 부지점장(지점장은 휴일)한테 물어보러 갔더니 당장 난리가 난다. 창업주의 상속자가 왔으니…뭐 그래도 회사가 들썩들썩 하는 정도는 아니고, ‘너 직접 만나 본 거야?’, ‘얘기도 해봤어?’ (컴퓨터를 찾아간 후에도) ‘현금으로 내디, 카드로 내디?’, ‘플래티넘이디, 골드 카드디?’ 이런 귀여운 수준이다.

일을 모두 마치고 정신을 좀 수습해보니.. (언젠가부터 한국과 비교를 안하려고 안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이게 만일 한국 회사에서 일어았다면 어떻게 다를까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생각해보니 우습다. 왕회장 정도 되는 인간이 3~4년 된 컴퓨터를 시장 바구니에 직접 들고 다니는 것도 웃기지만, 옆 지점에서도 굳이 전화를 해서 먼저 끝내달라고 부탁을 한 거 보면 왕회장이라는 걸 알았다는 얘긴데, 회사차원에서 움직이지 않고 당사자한테 직접 다른 지점으로 들고 가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다. 뭐 물론 말하는 싸가지나 행동거지는 안하무인이지만, 차림새나 타고 다니는 차는 아무리 좋게 봐도 동네 노인네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이 이런 풍경을 만드는 걸까… 무엇보다, 경영과 소유의 엄격한 분리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런던드럭>의 왕회장도 창업자의 아들이고, <레고> 및 다른 유수 세계 기업들의 대표도 모두 창업자의 아들인데, 삼성전자 이재용이가 지 아버지 와 할애비가 물려준 회사를 가지는 것이 뭐가 불만이야…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런던드럭>의 왕회장은 그냥 창업주의 후계자라는 상징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고, 대외적으로 회사를 대표하는 이미지로서 활동할 뿐이지 모든 경영과 관리와는 상관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왕국의 통치권을 대대로 세습하는 삼성가와 다른 것이다.

예전에 내가 다니는 회사 그 동네 국회의원이 가게로 직접 와서 나와 수리비 흥정(좀 깎아달라고)을 했을 때에도 느꼈었는데.. 이곳 사람들도 정치가들이나 부자들에 대해 나쁘게 보는 편이지만, 내가 보기엔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라고 느껴지는 것은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