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B 냉동의 악명에 대해선 익히 들어왔었어. 밴쿠버에서 가장 오래된 냉동회사 다섯 손가락 안에 듦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허접하다거나, 서비스 질이 낮다든가 하는 험담이 많았지. A 냉동에서 처음 냉동 일을 시작할 때에도, B 냉동이 설치를 잘못했거나, 잘못 고친 기기들을 R 사장과 함께 고치는 일이 잦았었거든. 2년차, 3년차 학교에서도, 수업시간에 B 냉동에서 일하는 급우들이 뭔가를 실수하거나 아주 당연한 문제를 틀리면, 다른 사람들은 ‘ 음..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었고…… 사정이 이렇다 보니, B 냉동은 금방 망할 거라는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시내에 돌아다니는 B 냉동의 서비스 트럭들은 최소 10년은 넘어 보이는 낡은 차량 밖에 없었어. 그래서, A 냉동에서 저임금으로 착취당할 때에도, D 식품에서 하루에 12시간 넘는 고강도 노동에 시달릴 때에도, B 냉동에 이력서를 넣지는 않았었거든.
그러다가, D 식품의 말도 안 되는 당직 근무와 초과근무에 시달리면서 삶이 피폐해지니까,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행복추구권을 인정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무리 돈도 좋지만, 이렇게 일하다가는 전화벨 소리에 대한 공황장애가 점점 더 심각해질 것만 같더라구.
3년차 수업을 같이 들었던 급우들의 말에 의하면, 다른 회사들, (레스토랑 / 슈퍼마켓 냉동이 주력 영역이 아닌) 빌딩 공조 관련이 주 업무인 회사들의 경우에는 당직근무 로테이션이 아주 가끔 있고, 당직 주간에 콜을 받는 일도 적다고 하더라. 특히 지역노조 (UA5*6)에 가입한 회사들의 경우, 노조 규약상 최소 어느 비율 이상의 저니맨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보통 6개월에 한 번 정도 당직 주간이 들어온다는 얘길 듣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그도 그럴 것이, D 식품의 경우 당직 주간이 보통 한 달에서 한 달 반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데다가, 거지 같은 서비스 계약 때문에 일과 후 서비스 콜이 수도 없이 많아서 당직 주간 동안에는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거든. 게다가 서비스 관할 지역이 너무 넓어서 어쩔 때는 하루에 운전만 수백 킬로를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어느 주말,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데 B 냉동에서 사람을 뽑고 있다는 포스팅이 보이더라구 (지금 생각해보면, B 냉동은 항상 사람을 뽑고 있었는데). 그런데, B 냉동이 지역노조에 가입된 회사였던 거야.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지원을 했지. 그게 12월 초 였는데, 이민 와서 이력서를 수백 통 넣어 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밴쿠버 회사들의 채용계획들은 보통 한참 전에 세워지기 때문에, 대개 채용 담당자가 구인 포스팅을 6월이나 12월 즈음에 내놓고, 자신들은 휴가를 가버리는 경우가 많거든. 그러니, 12월 초에 이력서를 넣더라도 다음 해 1월 중순이 되어서야 면접 일정 연락을 받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던 거지. 이번 경우에는 좀 시간이 더 걸렸는지, 2월이 되고서야 아직 관심이 있다면 면접 볼 생각이 없냐는 답신을 받았는데, 그때가 마침 D 식품에서 4년차 수업을 듣기 위해 3월부터 학교에 가겠다는 계획이 거절당한 때여서 냉큼 물었지. 뭐.. 여전히 B 냉동의 평판에 때문에 주저함이 좀 있었긴 했지만……
B 냉동의 서비스 매니저는 회사가 아니라 커피샵에서 만나자고 하더라. 그래서 혹시 무슨 취업사기가 아닌가 싶었지만, 뭐 일단 만나나 보자는 느낌으로, 어느 날 D 식품의 업무를 마치고 만났고, 여러 가지 내 이야기를 했고, B 냉동에 대한 얘기를 들었어. 전통적으로 이런 면접은 보통 회사가 지원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는 자리이지만, 요즘은 지원자 입장에서 그 회사가 어떤 곳인지 알아볼 수도 있는 자리라고 생각해. 이 회사가 정말 그 악명 그대로인가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첫 번째로 당직근무에 대해서 물었더니 보통 6개월에 한 번씩 돌아오는데, 2019년 당직 일정은 이미 연초에 26명이 넘는 저니맨들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내가 끼어들 일은 없다는 거야. 그리고 당직 주간이라고 하더라도, 고객에게 일과 후 근무나 휴일 근무에 대한 비용에 대해 설명을 하게 되면, 보통 깜짝 놀라면서 보통 다음 근무일 아침 일찍 와달라고 하기 때문에, 사실 당직근무 주간 때 추가로 받는 7시간 분량의 급여는, 사실 고객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더라구.
그리고, 4년 차 수업을 받는 일정에 대해서 물어보니까 “음.. 그건 원래.. 노조원이 학교에 가는 일정에 대해 회사가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는 건데..”라고 말하는 거야. 그때 그 자리가 만화였다면, 저 얘기를 듣고 내 눈에 하트가 뿅뿅 솟는 게 보였을 지도.
이민 와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답답한 것 중 하나가, 다른 직장이나 직종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거였어. 한국 교민사회에선, 이런 트레이드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거든. 그런데, 심지어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현지인들 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 잘 모르더라구. 처음엔 내가 영어가 안되어서, 혹은 왕따를 당하느라 정보공유가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애초에 개인주의가 철저한 캐네디언들은 타인의 직장생활을 깊게 살펴보지 않았던 거야.
또, 한국에서라면, 매일같이 포털사이트 초기 화면에 돈 많이 버는 직업에 대해서 기사들이 (그 정보의 신뢰성은 차치하고라도) 실리지만, 인터넷 문화에서 아직 많이 뒤처져 있는 건지, 이곳 현지 사람들은 직업들을 소개하는 BC 정부 공식 사이트인 workbc.ca 에 대해서도 잘 모르더라. 하긴, 나도 한국에 살면 노동부 웹사이트에 들어갈 일은 없었겠지. 그러니, 이민자인 내가 특정 냉동 회사에 대해서, 그것도 노조 소속 회사에 대해서, 노조 가입 방법이나 회사 사정에 대해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당시 나에겐 아예 없었던 거야.
단지, 노조에 가입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중심으로 소문만 무성했었어. 노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주로 언급하는 얘기로는, 자기보다 훨씬 일을 못하는 기사들이 단지 근속연수만 높다고 해서 더 높은 급여를 받는다든지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고, 그 외에도 생각보다 돈을 못 번다든지 하는 얘기도 있었고 말이야.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일단 눈에 하트가 꽂힌 나로서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더라. 일단, 일정시간 일하고 그게 근속기간 으로 인정받아서 거기에 따라 (따로 회사와 실랑이할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급여 인상이 되는 게 제일 좋아 보였고, 내가 가고 싶을 때 학교에 돌아가서 공부를 마칠 수 있다는 점도 보다 노동자의 권리를 챙겨주는 것처럼 생각되어 좋아만 보였던 거야. 일단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저니맨이 되고 경력을 쌓아야지, 좀 더 몸 편한 직업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거든.
3년차 수업을 같이 들었던 (그리고 당시엔 그리 친하지 않았던) B 냉동 소속 기사 한 명의 이메일 주소를 어떻게 알아내서, 체면 불고하고 편지를 보내봤지, 회사 생활 어떠냐고. 밴쿠버 사람들 특징 중 하나로,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까지는 자기 직장 험담을 잘 안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 구체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면 정보를 받고 싶었었거든. 그런데, 그 친구는 건설/설치 팀 기사였고, 설치 팀은 대개 사전에 정해진 프로젝트만 딱 하고 급여를 받는 경우가 많아서 회사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선 잘 모르더라구. 서비스 팀에서 뭔가가 바뀌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는 귀띔해주긴 했지만.
뭐, 이쯤 되니 어차피, 돈 받고 일하는 거 달라질 게 뭐 있겠나 싶더라. D 식품을 그만둘 당시 이미 6900시간 정도 채운 상태였기 때문에, 뭐 수틀리면 300시간만 빨리 채우고 또 그만두면 되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 3월에 가기로 한 4년차 수업은, 새 회사에 들어가고 최소 3개월 정도는 적응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8월에 가는 걸로 바꿨어.
그렇게 3월에 D 식품을 그만두고 나서 짧은 휴가를 다녀온 후, 4월부터 B 냉동으로 출근하게 되었는데, 출근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지역노조 UA5*6 사무실에 가서 가입원서를 내는 거였어. 가입비 (2019년 당시 $190 정도였던 걸로 기억)를 내니까 모자 한 개와, 전화번호부 두께의 노조, 의료보험, 연금 등에 대한 서류뭉치를 주더라. 200불짜리 모자라고 생각하니 매일 쓰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도 들었지.
한국의 일반 회사들과 달리, 연금이나 의료보험 등 돈을 만지는 일들만 따로 떼어서 노조가 떠맡고 있는 걸 보자니 그리 좋아 보이지 만은 않았지만, 뭐, 아예 시스템 자체가 다른 거라고 이해하기로 했어. 회사에선 일감을 따온 후 그걸 직원들에게 할당하는 일을 하고, 직원들은 일을 하고 일한 시간을 회사에 보고하고, 회사가 다시 그 시간을 노조에 얘길 하면, 노조에서 직원들에게 급여를 주는 거라고 생각하니 간단하더라구. 근데 또 급여 명세서는 회사 이름으로 나오니까, ‘아… 이건 노조가 아니라 무슨 슈퍼마켓 시식코너 판촉행사에 인력을 보내는 파견업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었지.
그러고 보니, 그런 징후가 처음부터 여러 가지 있었더라구. B 냉동에 출근하기 전에, 인사과에서 위험물 취급, 고층 건물 작업, 지하 작업 등 몇몇 안전 관련 수업을 인터넷으로 듣고 수료증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내가 D 식품 다닐 때 미리 따 뒀던 수료증은 또 관할기관이 달라서 인정을 안된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한 수업당 미화 5불인가..? 를 내고 몇 과정을 이수했는데, 인사과에서 고맙다고 하면서 그걸로 그냥 끝이더라. 엥? 내가 쓴 돈과 트레이닝 받는 동안 쓴 시간에 대한 보상은? 하고 따져 물으니, 그건 노조에 가서 물어보라고 하더라구. 노조에 문의를 해보니 자기네들도 잘 모르겠대. 아니, 노조라는 곳이 돈 관리만 하고, 안전 관련 트레이닝은 모르겠다고?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얼마 안 되는 돈이니 일단 그냥 넘어갔었지 뭐.
이후에 알고 보니, JARTS / RTI에서 운영하는 각 연차 별 어프랜티스 기술 이론 교육이나, 노조에서 주관하는 신기술 세미나 모두, 수업료를 내고 듣는 거였지만 이후에 그 수업료를 노조에서 환급을 해주는 거였는데, 그 트레이닝에 참여하는 동안의 개인 시간이나, 그 수업을 받기 위해 이동하는 이동수단에 대해서는 환급이 안 되는 거였어. 그렇게 따져 보니, UA5*6 노조에서는 조합원을 조합원이 아니라, 무슨 플랫폼 노동자를 대하는 듯 하는 것 같더라구, D 식품에서 트레이닝을 받을 때마다 호텔과 비행기, 그리고 레스토랑을 제공받은 것과는 대조적이었지. 물론 D 식품에서는 어프랜티스 기술 이론 교육 비용을 자체적으로 환급해주었었고. 그래서 뭐, 직원들이 학교에 가는 걸 싫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D 식품에서 업무시간으로 계산을 해줬던 첫 출근 운전 시간도 B 냉동에서는 계산을 안 해주더라 (하지만 고객들에게 청구서를 만들 때는 교통시간을 따로 넣었지). 사실, 펨버튼에서 호프까지 장장 270km 거리에 달하는 지역을 담당구역으로 맡았던 D 식품과는 다르게, B 냉동의 경우 그냥 광역 밴쿠버 안에 있는 비즈니스만 상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침에 움직이면 대체 30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이긴 했어. 하지만, 직원들 업무 관리는 회사에서 하고, 돈 관리는 노조에서 하는 시스템이다 보니까, 뭔가 업무시간 기록 및 급여 청구하는 데에 있어서 좀 아귀가 안 맞는 경우가 있더라.
예를 들어서, 회사 창고에 들러서 에어컨 필터를 가지고, 고객 영업장에 가서 공조시설 유지보수를 하는 일이 있다면, 내 입장에서는 회사에 갈 때까지는 첫 출근 시간이고, 거기서 필터를 집어서 차에 싣는 것부터 내 업무 시간인데, 회사에서는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를 첫 출근 시간으로 계산하는 거야. 여기에 관해서 노조에 문의해 보았으나 또 묵묵부답이었고, 돈 몇 푼 가지고 왈가왈부하기 싫어서 그냥 따르기로 했지.
노조의 급여 시스템은, 말하자면 모든 복지 혜택과 휴가, 휴일 등을 통합 계산한 다음, 시간제로 다시 나눠 지급하는 식이었어. 물론 연금이나, 추가 의료보험 같은 것들은 조합원들을 대신해서 보험회사에 납부하는 돈이었기 때문에서 2주마다 받는 월급봉투에는 포함이 되지 않았지만, 다른 휴일비, 휴가비 등은 포함해서 주더라. 예를 들자면, 2020년 지역 냉동 노조 5*6에서 6900시간을 채운 4년차 어프랜티스의 경우에, 아래의 표에 의하면 시간당 $45.07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여기에 보험회사에 대리 납부되는 보험과 개인연금을 제외하면 급여명세서에 세전 $36.13로 찍히는 거지.
그런데 이 금액이 휴가비 휴일 급여가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다른 비조합 회사 급여와 비교를 하고 싶다면, 연간 휴가비용과, 공휴일 (일반적인 공휴일 11일 더하기 생일, 부활절 월요일 등 4일 추가 휴일) 을 뺀 금액인 12%를 제외하고, 또 조합비 $1.25를 뺀 $31.01과 비교를 해야 한다는 뜻이 되는 거야. 물론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또 의료보험 개인부담금, 그리고 세금과 국민연금, 고용보험금 등이 빠지는 돈이 실수령액이 되는 셈이야.
이렇게 해서, D 식품과 같은 비노조 회사 급여와 비교하 보면 좀 더 적다는 걸 알 수 있어 (물론 의료보험이나 개인 연금의 혜택은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점은, 휴가비와 휴일급여가 이미 통합되어 계산이 되기 때문에 휴가를 가거나 공휴일에 쉴 때 실제 급여가 줄어든다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는 거지. 그래서 결국 조합원의 휴일근무나 휴가 포기를 은근히 유도하게 되는 거야.
노동조합의 행정편의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조합원을 모두 플랫폼 개인사업자로 고려해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실제 조합원들이 휴가보다는 돈을 더 원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노동자의 장기적 건강이나 복지, 가족시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일 자체는 1년차 때 A 냉동에서 하던 일과 비슷하고 해서, 일단 어느 회사도 완벽한 회사는 없다는 식으로 넘어가기로 했어. 첫 출근 날, 앞으로 몰고 다닐 서비스 차량을 배정받는데, 아… 이건 뭐… 무슨 폐차장인가 싶더라. B 냉동이 오래된 차량을 쓰는 건 미리 알고 있었지만, (예전에 정육점에서 고기 배달할 때의 악몽 때문에) 그래도 그 중에서 타이어 상태가 가장 괜찮은 걸로 골라 보려고 했다. 각종 공구와 장비를 옮겨 싣고 차량 점검을 하러 가면서, 그날의 업무시간을 청구할 때, 어떤 명목으로 청구를 할지 서비스 매니저에게 물어봤더니, 갑자기 아주 당황스러워하면서 그냥 매니저 개인이 지시한 업무라고 써넣으라고 하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서는 업무를 위한 준비 과정… 아니, 고객에게 청구할 수 없는 모든 업무시간에 대해선, 회사에서 급여 지급을 해주지 않으려고 하더라구. 마치, 아마존 택배를 배송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처럼, 자기 일에 필요한 준비를 하는 시간을 모두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거지. 노조에 가입된 모든 회사들이 그런지 몰라서, 이런 상황도 노조에 문의해 봤는데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나서, B 냉동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한 달도 안된 시점이었지? 나를 채용했던 서비스 매니저가, 회사 시스템에 대한 지독한 악담을 담은 메일을 회사 전체에 날리고 회사를 떠나는 일이 있었어. B 냉동에서 20년, 서비스 부서에서만 15년 가까이 일했다고 하는데, 소문에 의하면 회사에서 그의 권한을 점차적으로 축소해 가면서, 다른 사람 – 영업 개발팀장 (Marketing Development Manager)이 서비스 매니저가 할 일을 많이 가져갔다고 하더라구. 입사한 지 한 달도 채 안된 나로서는 모를 일이었지만, 서비스 매니저 직위를 아예 없애버린 후, 서비스 기사들이 영업 개발팀장에게 업무보고를 하도록 하는 걸 보니, 뭔가 회사가 아사리판이다 생각되더라.
B 냉동이 밴쿠버에서 가장 오래된 냉동회사 중 하나이다 보니까, 그래도 제법 안정적인 고객을 많이 확보한 상태였는데, 공립 중고등학교와 공립 대학, 대형 병원이나 BC 주 질병관리센터 (BC CDC)와 같은 공공기관들이 주 고객이었어. 그런 걸 보니, 몇 년 전부터 곧 망할 거라는 소문이 돌던 B 냉동이 여전히 버티고 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더라구. 내 경우는 에어컨이나 건물 공조시설보다는, 냉동 쪽 경력이 많다 보니까, 주로 냉장고, 제빙기 등을 담당했는데, 특히 VCC (Vancouver Community College 밴쿠버 공립 대학)의 조리학과 건물에 배치된 냉장고 전체와, VGH (Vancouver General Hospital 밴쿠버 종합병원)의 냉장고, 그리고 어느 D 레스토랑 체인의 냉장고 및 제빙기 등을 담당하게 되었어. 종합병원에 웬 냉장고가 있겠나 싶겠지만, 시체 안치소 역시 크게 보면 냉장고였던 거지.
한 번은, VCC 조리학과의 한 교실에 있는 조리대 형 냉장고 시스템을 통째로 교체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서, 어떤 장비를 얼마나 설치해야 하는지 보고를 했더니, 영업 개발팀장이 자기가 견적서를 만들어서 VCC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도매 업체로부터 장비를 주문해 뒀다고 하더라. 설치 당일 새벽에 컴프레서와 증발기, 그리고 동 파이프 등 각종 장비를 도매상에서 픽업한 다음 작업 현장에 도착해보니까, 영업 개발팀장이 완전히 다른 형태 (조리대 형이 아니라 캐비닛 형)의 증발기를 주문해 놨더라구. 결국 그날은 설치를 취소하고 나랑 같이 일하도록 일정을 잡아뒀던 어프랜티스 들도 하루 공치게 되었지.
회사로 돌아가 그 영업 개발팀장과 얘길 했더니 자기는 잘 모르고 도매업체에서 추천한 증발기였다고 우물거리 더라구. 나중에 회사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까, 회사에 영업 개발팀이라는 건 이전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었고, 이 영업 개발팀장이라는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는데, 냉동/공조 업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고, 단지 사장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소문만 돌고 있다고 하는 거야. 그러면서 앞으로 견적을 만들 일이 있으면 내가 직접 한 다음에 영업 개발팀장한테 건네 주라고 하더라구.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냉동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자기 권한을 다 뺏겨버렸다는 전임 서비스 매니저의 비애를 알 것만 같더라.
5월 연휴가 다가오자, 회사에서 일감을 직원들에게 분배하는 디스패처가, 갑자기 연휴 주말에 당직근무를 하라고 말하더라. 모든 걸 떠나서… 어이가 없더라구. 느닷없이 전화해서 주말에 일하라고 명령하는 것도 웃겼지만, 그렇게 말하면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 “당직근무 스케줄은 연초에 이미 다 결정 되었다고 들었고, 그 스케줄에 변동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며칠 전에 덜컥 얘기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번 주말에 개인적인 계획이 있다.” 라고 해버렸지. 그땐 또, 시큰둥하게 알았다고 하더라. 이 때는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 줄만 알았지.
하지만 그 이후부터, 일이 안 들어오더라. 아니, 정확히 얘길 하자면, 보통 고객으로부터 서비스 요청을 받으면, 다음날 아침에 갈 수 있도록 전날 오후에 미리 알려 주는데, 나에게는 항상 떨거지 일이나, 다른 기사가 시작했다가 수습을 못한 일들만 계속 주더라구. 그것도 대체적으로 오후 12시쯤 전화가 와서는 당장 출발하라는 식이었어.
처음엔.. 아이구 이게 얼마 만에 늦잠이야… 하면서 상황을 즐겼었는데, 그래도 아내와 생활시간을 맞춰야 했기 때문에, 아침 8시에는 어느 정도 출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거든. 그렇게 출근 준비를 한 상태에서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리다가 12시가 넘어서야 전화를 받는데, 냉장고 수리나 제빙기 수리가 다 그렇듯이 응급을 요하는 상황이 많았지. 이렇게 이미 기다리다 지쳐 진이 빠질 만큼 빠진 상태였다가 허둥지둥 나서야 하는 경우가 계속 생겼어. 그래도, 300시간.. 길어야 10주 정도만 버티자는 심정으로 일을 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하루 이틀 남기고 주말 당직근무를 지시하고, 나는 또 그걸 거부하고 하는 일이 반복되고, 서비스 콜 배치도 직장 내 괴롭힘 수준으로 엉뚱한 시간에 들어오는 상황이 반복되고 그래서, 결국 노조에 가서 또 상황 설명을 했지. 그런데, 노조에서는 또 업무 분장은 회사의 권한이라는 말만 하더라.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고 있는데, 디스패처로 부터 응급 서비스 콜을 받아 가라고 하더라구. “내가 오늘도 일을 12시 지나서 받아서 8시간을 아직 못 채우긴 했지만, 저녁엔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일과 후에 들어온 콜은 당직근무자에게 넘겨라” 하면서 이때도 거절을 했지. 그랬더니, 다음날 사장이 직접 전화를 해서는, 이유도 상황도 물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말하더라구. 우리 회사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아놔… 나도 맞받아칠 수 밖에 없었지 “당신이 디스패처 말만 듣고, 내 사정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지금 나한테 이렇게 얘기하는데, 서비스 매니저가 없는 지금, 난 누구에게 내 상황을 얘기해야 하나?”
D 식품을 그만둘 당시 날 만류하던 한 선임기사는 나에게 “그래도 넌 적어도 이 회사가 어떻게 거지 같은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잖아. 지금 다른 회사 가면, 그 회사가 왜 거지 같은지 원인 찾느라 또 시간을 허비한다니까?”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B 냉동의 문제는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 같더라.
이렇게 새 회사에 2개월이 넘도록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에, 우연하게 엄청난 사실을 발견했는데, 보통 BC에서 냉동기술 분야 저니맨이 되는 과정은 첫째, 7,220 어프랜티스 근무 시간 수료 (2021년 현재 6,210시간으로 축소), 둘째, 각 연차 별 어프랜티스 기술 이론 수업 수료, 셋째, 국가 자격시험 합격, 넷째, 어프랜티스로 일하고 있는 스폰서 회사로부터 인증 서명, 이렇게 네 단계로 이루어졌었거든. 그리고 노조에 가입된 회사에서 일할 때는 스폰서가 회사가 아니라 노조 이름으로 어프랜티스 등록이 되어서, 인증 서명도 노조에서 해주는 거였어.
그런데, 문제는, 노조에서는 7,220시간이 아니라 9,000시간을 채워야 (2021년 현재 7,200시간으로 축소) 인증 서명을 해준다는 거야. 뭐? 300시간이 아니라 2,100시간이 남았다고?
내가 아무리 고분고분하지 않고 회사 사장한테 개기고 그래도, 노조에 가입되어 있는 이상 나를 자르거나 할 수는 없었지. 하지만, 회사 쪽에서는 언제든지 서비스 콜 배당을 줄이거나 없애버릴 수가 있기 때문에, 당장 시간을 채워서 저니맨이 되고 싶은 어프랜티스 입장에서는 회사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던 거였어. 내 경우는 300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바득 바득 개길 수 있었는데… 그게, 완전히 잘못된 계산이었더라구.
그리고.. 회사 사장 및 관리자들에게 문제 사원으로 찍힐 만큼 찍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회사에서 나머지 2,100 시간을 채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더라. 아직 입사한 지 3개월도 안되었지만, 서둘러서 또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아니, 사실, B 냉동에 처음 와서 낡아빠진 서비스 트럭을 고를 때부터, 구직활동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된 바에, 굳이 또, 노조에 가입한 회사에 들어가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비노조 회사 중심으로 새 직장을 알아보았는데, UA5*6 냉동 지역 노조의 경우 한번 가입을 하게 되면 이후에 다른 회사로 옮긴다고 하더라도 계속 조합원 자격을 유지할 수가 있었어. 단지, 연금이나 건강보험 불입 같은 건 중단이 되고, 매월 소정의 조합비를 계속 지불해야 했던 거야. 그래서, 노조 회사를 그만두더라 하더라도 언젠가 노조에서 뭔가를 해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꾸준하게 조합비를 냈던 거지.
UA5*6 노조는 또 한 가지 특이점이 있었는데, 처음 가입할 때는 가입비가 $190 수준 (저니맨은 $340)이지만, 한번 탈퇴하고 다시 가입하려면 재가입비로 $2,500을 내야 한다는 점이었어. 그래서, 이것 때문에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노조에서 저니맨이 되려면 최소 1년을 더 굴러야 한다는 뼈 아픈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난 그냥 탈퇴를 선택했어.
조합 탈퇴 의견서를 보냈더니, 그동안 모든 질의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노조에서 그제야 무슨 일인지 물어오더라. 회사 사정이 이러이러하고, 업무 배치가 일정치 않아서 내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다라고 했더니, 그럼 다른 직장을 소개해주겠다고 나오는 거야.
‘아…. 그랬구나. 정말 노조가 아니라, 일 소개해주고 수수료 받아먹는 인력 사무소였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여전히, 노동조합이라는 건,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회사의 부당한 업무지시에 대해 회피만 한다면, 노조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솔직히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졌다. 퇴사가 결정되고, 짧은 시간이지만 좀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과 만나서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었어. 그런데.. 내가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생각했던 일관성 없는 서비스 콜 배치나 느닷없는 당직근무 지시가 나만 겪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이 회사에선 어프랜티스를 상대로 아주 당연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던 거였더라구. 직장 동료 중 한 명은 지난 2주 급여가 70불 딸랑 나왔다고 하소연 하기도 하고 말이야. 일감 할당을 통해서 어프랜티스의 회사 충성도를 조정하는 일이 당연할 수 있는 환경. 이쯤 되면, 회사도 노조도 아닌, 어프랜티스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