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들어서고, 소프트 아이스크림 기기 등, D 식품이 관리하는 각종 냉동기기 들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무렵, 시카고 근교 ROCTON에 있는 T 냉동 공장으로 연수를 가게 되었다. 명목상 T 냉동에서 만드는 햄버거 그릴 기기에 대해서 기술연수를 받으러 간 거였는데, 사실 단 3~4일간의 교육으로 햄버거 그릴에 대해서 정통해지리라고는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들도 기대할 수는 없겠지.
그보다, T 냉동의 위탁 서비스를 맡고 있는 북미지역 하청업체 수리기사들을 대상으로 소소한 위로연을 열어주는 것에 가까웠어. 비행기 티켓이나 시카고 근교 호텔 숙박, 그리고 매일 점심, 저녁 식사 대접까지 풀코스로 제공되는 (관광 코스만 빠진) 패키지 관광일정 같은 거였는데, 변변한 산업이 없는 밴쿠버에서 한동안 살았던 나에게 있어서는, (마치 포항이나 울산처럼) 하나의 기업이 지역 전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보는 것이 아주 신선하더라.
뭐, 맥도널드 같은 대기업의 전세계 매장에 자사 기기를 독점적으로 납품을 하는 회사라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북미 다양한 도시에서 동종업계 일을 하는 친구들과 지역별 노동조건에 대한 경험을 나누는 것도 재미있었고 (확실히 미국은, 특히 남부는, 우리와 같은 블루 칼라의 노동조건이 더 혹독하더라).
회사로 돌아오니, 내가 수리와 설치를 담당하는 기기 중에 햄버거 그릴이 포함되었더라. ‘하하, 아놔. 뭐.. 관광일정 같은 연수였지만, 그래도 가기 전에 트레이닝 좀 해달라고 했음에도 그냥 백지상태로 보내져서 수업시간에 따라가기 힘들었는데 (실제 수업은 햄버거 그릴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커리큘럼이 맞춰져 있었다), 갔다 오자 마자 그릴을 고치라니… 아니 그것보다, 담당하는 기계가 늘어나면 당연히 급여부터 더 올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뻔한 불만이 생겼었지만, 뭐, 바로 1월에 대폭 인상을 받은 터라 또 서로 얼굴을 붉히기 싫었다. 결국,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는데, 내 직무 범위가 확장되는 스케줄이 매번 내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현상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더라. 이건 뭐 치밀한 전략 하에 전진하는 장기판의 졸도 아니고, 매번 상황을 대충 수습하는데 동원되는 깍두기 같은 느낌이더구만.
그리고, “그릴 트레이닝을 받았다(?)”는 이유로, 공식적 으로 “당직근무 수리기사 명단 (On-Call Techs List)에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무슨 뜻인가 하면, 4~6주마다 한 주씩 당직근무를 서면서 일과 후나 주말에 발생하는 수리 요청에 혼자서 대응해야 한다는 거였어. 기본적으로 차를 몰고 가는 출장 수리가 주 업무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주 내내 술을 못 마시는 거였지 (강제로 건강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일과 후나 주말에 회사 번호로 걸려 오는 전화를 무조건 받아야 했고, BC 주 외곽지역에서 생긴 서비스 콜의 경우, 필요하면 우리 회사의 협력업체를 찾아서 내가 하청을 줘야 하기도 했어. 내가 당시 몰고 다니던 회사 서비스 차량 옆에는 “24시간 / 365일 서비스” 대문짝 만하게 쓰여있는데, 그걸 온전히 당직 기사가 혼자 떠맡게 되는 거였지.
물론 일과 후 (하루 8시간 근무 이후)나 주말에 서비스 콜을 받아서 일을 하게 되면 야근 / 특근 수당으로 일하는 시간의 1.5배를 받게 되는 거고. 여기에 출퇴근하는 운전시간도 근무 시간으로 계산되긴 해. 당직 주간에는 보통 당직 수당이 나오는데, 하루에 한 시간씩 쳐서 일주일에 7시간 근무 시간 분량의 돈을 당직 대기 수당으로 받기도 하지. 사실, 하루 24시간 전화기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7시간 분량의 금액밖에 계산이 안되는 거였지만……
뭐.. 이건 업계 관행이라 그렇다고 치더라도 말이지. 그런데, 나는 심지어 그 정도의 수당도 받지 못하고 약 3.5시간 정도밖에 계산 안해주더라구. 이 일로 회사 인사과 급여팀과 우리 지역 서비스 매니저를 달달 볶았었는데, 누구에게도 만족스러운 설명을 듣지 못했어. 어쩌면,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거나, 그게 왜 그런 건지 알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보통 일주일에 몇 번의 After hour call (일과 후 서비스 콜)을 받느냐 하면… 정말 미친 듯이 많이 왔어. 앞서 말했지만 세븐일레븐과 같은 대형 24시간 편의점 체인과는 연간 단위의 서비스 계약을 맺을 때는, 매장에 귀책사유 없이 기계 자체에 문제가 발생했을 시의 서비스 콜은 주말이나 일과 후 상관없이 모두 연간 계약에 포함되어 있도록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무진장 서비스 콜이 만들어지더라구.
최소 하루에 한 두 건은 꼬박꼬박 생기고, 보통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해야 되는 경우도 많았어. 처음엔 새벽 2~3시에 전화가 와서 슬러시 기계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이건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새벽 2시에 슬러시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간다고 그러는 건지…
물론 전화를 건 세븐일레븐 직원도 자기가 응급 서비스 콜을 만들면, 수리기사가 자다가 깨서 4시간 안에 현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계약 사항을 모두 알고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근본 문제는 ‘갑’기업과 ‘을’기업 간의 이런 악랄한 계약의 존재였고, 그 계약 이행을 위해 몇 명의 노동자가 개인 / 가족 시간을 희생하며 일해야 하는 노동조건에 있었던 거지. 이렇게 당직 대기 주간을 맡을 때마다 벌이는 제법 짭짤해졌지만, 번 돈을 쓸 시간적 여유는 전혀 안생기더라구.
당직 주간에는 아내나 친구들과 같이 뭔가를 하려는 계획을 아예 세울 수 조차 없었고 말이야. 꼭 당직 주간이 아니더라도, 별안간 야근이나 출장이 잡히는 경우가 많아서 일과 후 계획을 세우는 게 아주 힘이 들더라. 당연하게도 아내와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고, 일을 마치고 집에 와도 그냥 소파에 기대 누워있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걸 할 수가 없었어. 나중에는 이놈의 당직 서비스 콜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엄청나게 날뛰는 불안 장애가 생겨서, 마누라한테 별 큰일이 아니면 근무시간 동안에는 전화하지 말고 문자로 보내라고 짜증을 부리기도 했어.
한편으로는, 맥도널드의 햄버거 그릴 수리 및 유지 보수도 하게 되었다. T 냉동의 맥도널드의 햄버거 그릴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아래쪽 스테인리스 불판 (Lower Platen) 위에 패티를 놓고 나서, 뜨겁게 달궈진 상판 – 뚜껑 (Upper platen)으로 약 40 ~ 90초간 꽉 눌러서 햄버거 패티를 굽는 형태의 그릴인데. 상판의 개수에 따라서 2판 그릴 (Two-Platen Grill) 혹은 3판 그릴 (3-Platen Grill) 이 되고, 각 판마다 6개 혹은 8개의 패티가 한꺼번에 구워지게 되는 거야.
T 냉동의 맥도널드 그릴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는 바로 이 상판에서 발생했어. 엄밀히 얘기하자면 상판을 제대로 청소하지 않아서 단단한 숯덩이가 생기는 문제였지. 이 숯덩이 때문에 상판이 잘 안 내려간다든지, 아니면 균형이 틀어져서 한쪽 구석 패티만 제대로 안 구워진다든지 하는 일이 생기는 거야.
얼마 전에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맥도널드 햄버거병 사건에서, 한국 맥도널드는 패티가 전자동 초고온 그릴에서 구워지기 때문에, 단 한 개의 패티만 덜 익혀지는 일은 없다고 입장을 밝혔는데, 만일 한국 맥도널드에서도 동일한 T 냉동의 그릴을 사용한다면, 청소를 제대로 안 해서 상판에 숯덩이가 쌓였다면 사실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지.
어쨌건, 특정 위치의 햄버거 패티 온도가 안 나온다는 서비스 콜을 받고 가서는 그릴 청소만 하고 오는 경우가 빈번했어. 그것도 세제 뿌리고 슬쩍 닦아내는 그런 청소가 아니라, 몇 달간 쌓인 숯 덩어리를 스크래퍼로 북북 긁어내는 청소였는데, 하하, 이건 그 어떤 기술보다 완력이 더 필요한 작업이더라구. 이런 서비스 콜뿐만 아니라, 정기 유지 보수를 가는 날에도, 그런 숯덩이가 발견되면 (사실 모든 매장의 그릴에 숯이 쌓여있지) 매장 매니저에게 보여주고 추가 작업 승인을 받은 후 (대부분 승인해준다) 사전 예방 차원에서 숯을 빠짐없이 벗겨내야 했어. T 냉동에서 기준으로 잡은 그릴 유지 보수 시간은 3판 그릴의 경우 3시간 반이었는데, 그릴 청소만 별도로 2시간 훨씬 넘게 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되면, 기기 한 개당 유지보수 작업이 6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야.
근데, 레스토랑 매니저 입장에서는 햄버거 그릴 한 대를 6시간 가까이 구동을 못한다는 사실이 달가울 리가 없지. 그릴이 고장 나서 고치는 것도 아니고, 멀쩡한 그릴을 유지보수 하러 와서는 6시간 동안 운영을 못하게 하는 거니까. 나머지 한 대로 패티를 굽다 보면 아무래도 속도가 늦어져서 고객 불만이 생길 수 있고, 혹은 미리 어느 정도 재고를 쌓아둬야 점심시간 같은 걸 버틸 수 있는지 감이 안 오는 거야. 결국 이러저러한 논란 끝에, 그릴 유지 보수는 어찌 되었건 간에 점심시간 (10시 30분 ~ 13시 30분)을 피해서 하라는 지침이 내려오더라. 무슨 얘기가 되냐면, 청소상태가 안 좋은 (숯이 쌓여있는) 3판 그릴을 유지 보수하려면, 보통 새벽 5시 이전부터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인 거지.
게다가, 그릴이 2대가 있는 레스토랑 측에서는, 한번 유지 보수를 하는 날에 같이 하고 싶어 하거든. 각각 다른 날 해서 수리기사의 교통비를 2중으로 부담하고 싶지 않으니까. 다시 말해, 그릴이 2개가 있는 매장은 유지보수 서비스를 같은 날 해야 한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5시에 일을 시작해서, 중간에 3시간 쉬고, 다시 일을 시작해서 오후 6시나 7시에 일을 마치는 스케줄이 되는 거야.
물론 중간에 3시간 쉬는 동안에도 돈을 벌려면 다른 서비스 콜을 받아서 일을 하면 되지만, 그릴 한 대랑 (그리고 그 그릴의 숯더미와, 소고기 기름 묻은 부품들) 6시간 동안 씨름을 하다 보면, 정말이지 의식이 안드로메다 저 너머로 탈출하게 되어서, 여기에 또 다른 일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어.
특히 더운 여름철에 이런 유지보수 서비스를 하게 되면, 그릴과 씨름하는 동안 얼굴이 시뻘겋게 달궈지게 되고 (보통 그릴은 유지보수 직전까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달궈져 있는 상태거든. 유지 보수를 마친 후에도 그릴 테스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뜨거운 기계에 얼굴을 바짝 붙여 일을 하게 된다), 땀이 쉴 새 없이 나와 불판 위로 떨어지면 그대로 “치이익” 하면서 스팀이 나와서 얼굴을 데우는 게 반복되는 거야. 이러다 보면 결국 완전 탈진 상태가 되는데, 옷에서는 감자튀김과 햄버거 기름 냄새 플러스 내 땀 냄새가 섞여 구역질이 나더라구.
이렇게 첫 번째 그릴 일을 마치고 밖에 나오잖아? 그럼, 내 서비스 트럭도 이미 여름 한낮 더위에 달궈져 있는 상태였어서, 그 안에 들어가 점심을 먹다 보면 매번 열사병 초기 증상을 겪고는 했다. 그렇다고 에어컨을 돌리기 위해 차를 공회전 시키면 또 주변에서 신고가 들어가기도 하고.
결국, 내 경우에는, 회사와 고객으로부터 각종 비난과 협박을 들었음에도, 그릴 유지보수 일은 하루에 한 대 이상 못하겠다고 선언해버렸어. 매니저가 교통비 2중 결재를 걱정하는 레스토랑 측 입장을 언급하면서 같은 날 두 대를 다 하라고 지시를 했지만, 나는, “만일 교통비가 문제라면 두 번째 그릴을 유지 보수하러 가는 날에는 내 운전 시간을 근무 시간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아무튼 나는 도저히 힘이 들어서 못하겠다. 이대로 하다가는 내가 운전하다가 사고를 낼 것 같다”며 거절했지. 띠바… 캐나다에선 육체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다 누가 그랬나? 결국 인사과에서 내 업무 지시 거부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BC 주 노동법에 “’스플릿 시프트 (Split Shift : 분할 근무. 중간에 쉬는 시간을 두고 일을 하는 것)’의 경우 하루에 12시간을 넘지 않는다” 라는 규정이 있었고, 현실적으로 그릴 유지 보수를 하게 되면, 주간에 3시간 쉬는 것 포함해서 하루에 13시간 넘게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들어 인사과랑 한판 붙었어. 결국 점차적으로 나는 그릴 유지 보수 업무에서 제외되게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