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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라이트 얘네들은……

20년간 밴쿠버라는 사회와 여기 사는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문화적 충격을 받고, 그 때마다 30년간 살았던 한국사회와 비교해가면서 “얘네들은…”으로 시작하는 불평을 하며 살았었는데, 이제 “뭐… 그런 거 아냐?” 하면서 심드렁하게 넘어가게 된 시점에서 캐나다-밴쿠버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글을 써보려니 좀 민망하긴 하다.

게다가 캐나다 시민권을 받으면서 자동적으로 (이중국적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한국 국적이 소멸된 지 이미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우리나라”와 “얘네 들은”이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거든. 그러다 보면 왠지, 내가 나 스스로를 캐나다 현지 사회에서 차별하는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안 쓰려고 하고 있기도 하고……

또,  “캐나다 사람들은…”이라고 누군가를 단정 짓는 발언 자체가, 자칫 나의 지엽적인 인상과 경험 때문에 그릇된 선입견을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더 조십스럽네. 사실, 나도 캐나다 사람이고, 내가 겪어 온 중국계 이민자 직장동료, 대만계 이민자 직장동료, 이란계 이민자, 인도계 이민자… 모두 캐나다 사람, 밴쿠버 시민이라고 봐야 하거든.

물론 그 사람들은 그들이 어릴 적 자랐던 모국의 문화적 특징을 아직도 가지고 있지만, 캐나다라는 다문화 사회에서는 그걸 다 포용하고 활용하는 것이 주요 정책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런 모든 사람들과 문화들이 캐나다 사람, 캐나다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어쩌면, 이민 1세대들이 각 모국의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지독한 선입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 이제껏 여러 직장을 전전하면서, 세 명의 이란계 이민자에게 채용이 되었었는데, 그들이 나중에 말해준 내 채용 이유 중 하나가 “한국 사람을 좋아해서”였거든. 그들은 어쩌면, 한국계 남성 직장인들이 기본적으로 ‘가족과 같은 직장 분위기’, ‘주인정신을 가지고 근무’, ‘연장자, 상급자에 대한 복종’, ‘회사가 필요하면 야근도 불사’와 같은 마인드를 기본 장착했으리라 기대했겠지만… 사실 난 저런 게 싫어서 한국을 떠난 것도 있기 때문에, 그들의 기대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했었지.

그럼에도, 이런 글을, 이 시점에서 굳이 써보려고 하는 건, 지난 20년 가까이 현지 직장을 다니고 현지 사회에 적응을 하기 위해서, 내가 이해 못하는 문화에 적응을 해보려고 했던 일이 분명히 있었고, 그걸 밴쿠버 문화, 캐나다 문화라고 단정까지는 짓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후에 비슷한 길을 걷게 될 누군가가 재미있는 팁 정도로 써먹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야. 부분적으로는 좀 과도한 선입견으로 보여질 수 있는 내용이 있을지 몰라도, 그냥 재미로 읽어주라.

밴쿠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밴쿠버라이트 (Vancouverite)’라고 칭하길, 또 그렇게 불리길 좋아 하는데, 이 단어에 대한 이상한 자긍심조차 있어서, 밴쿠버에 이제 막 이주한 사람들에게 “최소한 5년은 살아야 스스로를 밴쿠버라이트라고 자칭할 자격이 있어” 하면서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친절하다’, ‘느긋하다’, ‘평화주의자’, ‘문화 애호가’, ‘환경운동가’, ‘인종이나 성적 지향성에 대한 차별 반대’ 등 여러 가지 본인들 스스로 자화자찬 식의 자기규정이 존재하기도 하고, 밴쿠버 밖에서는 ‘마리화나 애호가’, ‘자전거 도로에 환장한 인간들’, ‘고어텍스와 요가 팬츠에 환장한 인간들’, ’ 우산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인간들 (요즘은 우산 잘 쓰고 다닌다)’ 등으로 밴쿠버라이트들을 놀리기도 해.

사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도시의 인구분포도, 주요 문화도 달라지기 때문에, 어쩌면 저런 스테레오 타이핑 들은 이제 은퇴한 유럽계 백인 베이비부머 세대들에게만 국한된 얘기일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저 중에서 내가 느끼기에 지난 20년간 변하지 않았던 것을 짚어보자면,

밴쿠버라이트 들은 순응적이다 – 내가 느끼기엔 어느 정도 맞는 말로 보여. 특히 우리 어릴 때, 한국에서는 경찰이나 공권력들을 시민의 적으로 간주하던 때가 많았어서 그런지, 이곳 사람들이 경찰이나 조사관 (Inspector) 등 법 집행자들에게 순응하는 모습이나, 아니면 의사와 같은 전문가들을 존중하는 모습 등이 좀 인상적이더라구.

어쩌면, 이는 이민자 사회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어. 아무래도 그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관습에 약한 신규 이민자의 입장에선, 웹사이트에서 확인이 가능한 성문법이나 규칙 같은 것에 많이 의존하게 되고, 자신이 규칙을 잘 지킴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수 있는 불이익에 대해선 공권력의 보호를 받고 싶어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 다는 얘기지.

이곳에 와서 알게 된 현지 경찰 친구에게 이런 첫인상에 대해 말했더니, 그는 껄껄 웃으며 나에게 퀴즈를 내더라구. “풀장에서 놀고 있는 밴쿠버 사람 20명을 5초 이내에 다 나오게 하는 방법이 뭔 줄 아니? ‘모두 나오세요’라고 한마디 하는 거야 Saying ‘everybody, get out!’”

밴쿠버라이트 들은 친절하다 – 이것도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아. 기본적으로 남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편이더라구. 이민 1세대들은 자신이 예전에 처음 정착할 때 받았던 친절을 다른 사람을 통해 갚는다… 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여기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어째서 계속 그런 친절함을 가질 수 있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캐나다 에서는 ‘착한 사마리안 법’의 경우도 강제 조항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을 모른 척 지나간다고 해도 본인 에게 해가 되는 일은 딱히 없거든. 결국, 그냥 성품이 친절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너무 친절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지. 예를 들어, 길을 물어보면 본인들이 아는 한에서 충분히 시간을 두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데, 근데, 그게 틀리는 경우가 너무 많아. 너어무. 이런 일이 한두 번 벌어진 것도 아니고 최근까지도 많이 겪었던 일이야. 처음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원어민 친구가 두 가지 단어를 가르쳐 주더라구. ‘Double check (재확인)’ 과 ‘Second opinion (다른 의견)’.

반대로, 나 같은 경우는, 내가 100% 확신이 없는 경우 모른다고 딱 잘라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나름대로 오정보를 줘서 상대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의도이지만, 그럴 때마다 상대방에게서 너무나 무례한 인간을 만나 놀랍다는 표정을 보게 되기도 해.

날씨에 진심이다 – 봄이 가까워지면, 모두들 하나같이 지난 겨울이 얼마나 우울했는지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어. 기본적으로 밴쿠버 겨울은 흐리고 비가 많이 오는데, 이 말은 곧, 그렇게 춥지도 않고, 눈 피해도 그다지 많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되거든. 그럼에도 밴쿠버 사람들은 어둡고 비만 줄창 오는 겨울을 무척 싫어해. 영하 20도로 떨어지는 다른 지역 사람들과 대화할 때, 비가 오는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Wet Cold라는 신조어도 만들면서) 강조하는 뻔뻔함도 가지고 있고 말이지.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웠는데, 매일 사무실에 가면 지난 밤에 얼마나 더워서 잠을 설쳤는지에 대해 한참이나 얘기하기도 했었어. 도대체 왜 이리 호들갑들일까?

먼저, 날씨에 실제로 진심이기 때문인 점이 있겠지. 미주 서해안 북부 지역인 밴쿠버는 워낙 날씨가 좋은 동네였어서, 평소에는 아주 작은 기후변화 (폭서, 폭설)에 대응 준비가 안되어 있는 편이거든. 그런데, 워낙에 밴쿠버라이트의 일상 생활에 야외활동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보니까, 이렇게 대응이 안 되는 기후변화가 더 충격적인 거겠지

거기에, 타인과의 친절한 대화의 첫 단계로 날씨얘기를 많이 해서 그럴 수도 있는 것 같아. 무턱대고 “어? 너 어느 나라에서 왔어?”하고 직설적으로 묻는 건 밴쿠버라이트 스타일이 아니거든. 다른 사람에게 친밀하고는 싶지만, 처음부터 어느 선을 넘지 않으려는 노력에 애꿎은 날씨만 불평 대상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

자연을 사랑하고 환경보호에 관심이 많다 – 여기에 대해선 사실 잘 모르겠어. 일단 BC가 자랑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셀럽 중에는 데이비드 스즈키라는 동물학자 겸 환경운동가가 있지. 또, 여기서 자란 청년들은 대학생이 되면 한 번쯤 채식주의자가 되어 볼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리고 밴쿠버 시를 포함해서 광역 밴쿠버의 여러 기초 도시에서는 (차도를 줄여서라도) 꾸준하게 자전거 도로를 확충하고, 또, 다운타운의 경우 심지어 차량 유입을 줄이기 위해 통행 요금을 받겠다는 정책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야.

외곽 도시인 써리, 랭리에서 밴쿠버 쪽으로 오려면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하는데, 현 주정부가 처음에 이 다리의 사용료를 없애겠다고 했을 때에도 밴쿠버 사람들 중에서는 반대 의견이 많았어. 통행 차량이 늘어나는 건 세계적인 환경 보호 흐름에 어긋난 다는 이유에서였지. 이런 걸 보면, 적어도 밴쿠버라이트들은 자신들이 환경 보호에 앞장서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해.

 문제는 이렇게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겠지. 대부분 다운 타운이나 밴쿠버 시에 사는 사람들일 테고, 일에 필요한 공구나 다른 큰 짐 없이, 그냥 사무실로 몸만 출퇴근하면 되는 사무직 노동자들뿐일 거야,

다시 말해 내 입장에선, 이런 자연사랑, 환경보호에 대한 자긍심은, 전세계 도시 중, 지역 노동자 급여로는 집 값을 가장 감당하기 가장 힘들다는 밴쿠버 시 인근에 거주하면서, 도보 혹은 자전거 통근이 가능한 거리의 다운타운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하는 사람들 만을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의심의 눈빛을 거두기가 쉽지 않아.

얼마 전, 내가 일하는 건물에 일회용 커피 컵 분리 수거함을 비치했을 때에도, 우리 건물에 입주해 있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그걸 보고 환경 보호에 진일보한 정책이라고 갈채를 보냈었는데, 막상 그 컵들을 손으로 하나씩 골라서 별도의 분리수거 봉지에 처리 / 보관하는 사람은 우리 건물에서 일하는 청소용역 할머니였거든.

물론, 계속되는 경찰들의 진압 / 체포에도 불구하고 대책 없는 난개발과 오래된 고목 벌채를 막으려고 헌신하는 환경운동가들도 있지만, 지역공동체와 현장 노동자들과의 합의,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불편함을 감수할 각오가 없는 환경보호 운동은, 좀 뭐랄까, 그냥 립서비스에 가까운 거 아닌가 싶더라.

건강, 야외활동을 사랑한다 – 다운타운 밴쿠버에서 서쪽으로는 ‘스쿼미시 (Squamish)’라고 세계적으로 암벽으로 유명한 동네가 있어. 밴쿠버 섬 서편에는 ‘토피노 (Tofino)’라는 세계적으로 서핑으로 유명한 마을이 있기도 하고. 이런 동네들 말고도, 군데군데 모퉁이만 돌아서면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하는 경우가 수두룩해. 날씨가 화창한 밴쿠버는, 그야말로.. “우와… 정말 예쁘구나… “라는 감탄사만 반복해서 나오지.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자연환경을 백 퍼센트 활용하는 오락거리가 더 발달했던 것 같아. 그러고 보면, 밴쿠버라이트들이 죽고 못 사는 등산이나 캠핑과 같은 야외활동, 스포츠 / 레저 활동 들은, 엄밀히 얘기하자면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이용한 오락을 사랑하는 거였던 거야

축복과도 같은 자연환경 – 10분이면 산 꼭대기에서 바닷가까지 갈 수 있는데, 그런 자연에서 뛰어 노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밴쿠버가 배출한 세계적인 두 제조업인 <아크테릭스 Arc’teryx>와 <룰루레몬 Lululemon> 이 등산복과 요가복 어패럴 회사라는 건 이런 지역 분위기를 볼 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어 (현재 아크테릭스는 중국기업 소유지만).

물론, 이 역시 광역 밴쿠버 전체 지역을 하나의 경향성으로 묶을 수는 없을 테고, 굳이 수고를 더해서 구분을 하자면, 다운타운이나 밴쿠버 시, 혹은 아파트나 타운하우스에 사는 사람들은 조깅이나 요가, 등산, 스노슈잉 등을 좋아하고, 외곽지역에서 살거나 저택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RV를 세울 수 있고, 여러 세대가 같은 집에 사는 경우가 있어서인지) 캠핑, 낚시, 사냥 등을 즐기는 경우가 많더라. 어쩌면 반대로. 캠핑보다 요가를 좋아해서 도심 아파트에 살고, 요가보다 캠핑을 좋아해서 외곽 하우스에서 사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문을 잘 잡아 준다” 라든지, “‘Thank you’와 ‘Sorry’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와 같은 자화자찬 성격의 특징이 있지만, 뭐.. 살다 보니 딱히 의미 없는 버릇 같아 보여서 이번엔 넘어갈게. 뭐 여기까지 쓴 것만 해도 충분히 자화자찬이라서 좀 민망하긴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