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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1998년이었을 거예요. 지금은 엎어진 어떤 작품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당시 뭔가 투자유치에 문제가 생겼는지 스텝들은 어느 날부터 돈을 못 받고 있었어요. 작품 진행이 안되니까 감독님들과 만나면 “와… 이건 뭐.. 버스 비가 없어서 출근을 못하겠어…” 뭐 이런 식의 앓는 소리를 하거나, 일상생활에서 떠오르는 새 작품 아이디어를 서로 경쟁하듯이 늘어놓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에 나와 (할 일이 없다 보니) 또 신문 1면에서 마지막 면까지 쭈욱 읽고 있는데, 귀퉁이 해외토픽란의 기사가 눈에 확 들어오더라구요.

<생텍쥐페리 팔찌, 실종 54년 만에 발견 https://www.joongang.co.kr/article/3718022>

보자마자…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러닝타임을 꽉 채운 영화가 돌아가는 듯 하더라구요. <시민 케인> ‘로즈버드’ 미스터리를 추적하듯이, 그 팔찌에 새겨진 문장의 미스터리를 추적하고 나중에 반전이 일어나는 것까지 말이죠.  당시 사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찜”을 선언했습니다. 이건 내꺼라고. 내가 영화 만들겠다고. 극장 앞에 길게 줄을 서있는 관객들의 모습도 눈에 선했구요. 이틀 만에 시놉시스 초고를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결혼 후엔 같이 세계일주 계획을 잡던 아내를 설득해서 마르세유 항구까지 답사도 갔었어요. 시나리오 속에서 초반 액션씬과 추격씬이 나왔거든요. 그 앞바다에서 팔찌가 발견되었다니 그 동네 시장 상인들로부터 뭔가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했구요. 하지만… 막상 갔더니 (저도 못했지만) 영어를 하는 사람들을 찾기가 너무 힘들더군요. 간신히 (그리고 우연히) 만났던 영어를 하는 주민 중 한 명은 저의 ‘생텍쥐페리’ 발음을 못 알아듣는 건지 서로 의사소통이 너무 안되기도 했습니다. “왜, 있잖냐. 리틀프린스 쓴 작가인데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비행 중에 실종된 사람…” 하면서 더듬더듬 설명했더니 마침내 “오우~ 앙뜨완느!!” 하더군요 (네. 당연히 ‘생텍쥐페리’는 성(姓 Family Name)이었습니다).

여하튼 그런 우여곡절 끝에 도입부 첫 장면을 대충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폭풍우가 치던 밤, 마르세유 앞바다 한가운데 보트 선상 위에서 격투가 벌어지고, 주인공이 물에 빠지고, 다음날 어부에게 구조되고 그런 장면을 포함해서 말이죠. 그땐 나름 신선한 액션씬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음 해 겨울에 <본 아이덴티티> 첫 장면에서 빼다 박은 듯 똑같은 구성이 나오더군요. 그것뿐 아니라 극 중반부에 파리 뒷골목을 관통하는 자동차 추격전 역시 <본 아이덴티티>에 제가 썼던 시나리오 그대로 재현된 것을 보고 너무 깜짝 놀랐었죠.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CIA에서 내 컴퓨터를 해킹했나?

나중에 알고 보니 로버트 러들럼이 쓴 <본 아이덴티티> 원작 소설이 출간된 때가 80년대 중반이었고, 그걸 미국 방송사에서 리처드 챔벌레인이 주연으로 TV시리즈를 만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게 88년 혹은 89년 KBS에서 방영을 했었는데, 그 기억이… 제 잠재의식 속에 십여년간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거죠.  그렇게 무의식 속에 표절을 하고라도 재미가 있었다면 그래도 나름 자기만족이라도 될 텐데…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니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수고했다” 라는 말만 듣기 일쑤였습니다 (혹은 ‘만화 대본인지, 영화 대본인지, 애니메이션 대본인지 구분이 안 간다’라든지 ‘비슷한 영화가 너무 많은데’라는 얘기도 듣고요). 얼마 후 현자 타임에 다시 읽어보니 이건, <인디아나 존스>를 생각하고 쓴 글이 <용형호제>보다 황망하고 재미가 없더라구요. ㅎㅎㅎㅎ 그래도 시나리오 단계에서 손절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사실, 이런 무의식 중 표절이란 저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전에, 정말이지 한국의 모든 정부 지원금들이 ‘한국 창작 애니메이션 제작’에 몰리는 것처럼 보였을 때, 그래서 한국의 모든 실사 영화감독들이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들려고 했을 때, 당시에 충무로에서 매우 촉망받던 어느 젊은 감독님과 같이 일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분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말이죠. 시나리오는 너무나 근사했어요. <헴릿>의 ‘살부(殺父) 이미지’를 모티브로 해서 쓴 스페이스 오페라였습니다. 주인공 소녀와 안드로이드 로봇 남동생이, 은하 제국 황제인 아버지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맞서 싸운다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캐릭터들이 잘 잘 살아있는 건 물론, 감초 같은 조연 로봇들의 코미디도 매우 좋았어요. 결국 반란이 성공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두 개의 붉은 태양이 뉘엿뉘엿 지는 사막 행성에 나란히 서 있는 주인공 소녀와 안드로이드 로봇 동생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전,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었던 터여서 여러 가지로 감이 좀 떨어져 있던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마침 좋아하던 감독님과 좋아하던 SF 장르 작품을 같이 한다고 하니, 좀 캐치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스페이스 오페라 고전 <스타워즈> 시리즈를 다시 정주행 했는데… 아…… 은하 제국, 아버지에 맞서 싸우는 남매 이야기… 그리고 두 개의 태양이 지는 석양까지… 죄다 나오더군요. <스타워즈>에…… 다음날 그 이야기를 듣고 당혹스러워하던 감독님의 파랗게 질린 얼굴이 아직 기억납니다 (그리고 이 작품도 결국 엎어졌습니다).


꼭 창작활동 중 다른 작품들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야지만 이런 우연이 일어나는 건 아니죠. 누구나 한 번쯤은 시장에 새로 소개되는 신상품을 보고 “아… 저거 내가 작년에 생각했던 건데……” 했던 적이 있을 겁니다. 이는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상품의 필요성을 느꼈던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겠죠. 예전에 아이폰이 처음 나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추운 겨울에 장갑을 벗어야 하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할 때, 미국의 한 스타트업 기업에서 아이폰 용 카메라 셔터 버튼 장치를 개발했었습니다. 아이폰 아래 30 pin 커넥터에 쉽게 장착해서 쓸 수 있는 이 상품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서 펀딩 시작 이틀 만에 목표 금액의 두배를 확보했었죠. 돈벌이에 문외한인 저조차도 이 사업에 투자할까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리고 시장의 열광적인 반응에 고무된 기업에서 상품 출시를 선언하기 바로 전날, 애플에서 새로운 아이폰 운영체제 업데이트를 발표했죠. 볼륨 버튼을 카메라 셔터 버튼으로 쓸 수 있는 기능을 포함해서요.Red Pop(https://www.kickstarter.com/projects/haltek/red-pop)

이렇듯, 신상품 개발이나 창작작업에 있어서는 이전 작품에 대한 무의식적인 영향, 혹은 동시대에 살면서 느끼는 비슷한 감정 등에 의해 우연한 표절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에겐 이런 일들이 살면서 너무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서, 최근에 불거진 어느 뮤지션의 표절 논쟁이 딱히 놀랍지도, 별나지도 않았습니다. “평생 존경하고 영향을 많이 받아왔던 선배 뮤지션 작품에 대한 무의식적인 복제”라는 그 뮤지션의 해명도 너무나 이해가 갔거든요. 저만 그런 생각을 하는게 아닌 건지, 원작자들 입장에서도 표절작품이나 그 작품을 마케팅하는 과정에서 표절 작가의 탐욕이나 무례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굳이 문제 삼지 않는 상황도 종종 발생합니다.

사실, 이런 무의식적인 표절을 피하는 방법은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수십 차례 교차 검증하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도 음악의 경우엔 요즘은 Shazam이나 유튜브 알고리즘 같은 게 워낙 잘 되어있어서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비슷한 전개의 곡이 미리 나와있었는지 알 수가 있겠죠. 물론 여기서 안 걸러지는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번의 경우 악보가 나오자마자 꾸준히 되었어야 할 교차 검증이 녹음을 마치고, 디지털로 출시되고, LP가 인쇄되기까지도 잘 진행되지 않았다는 건 좀 아쉽기도 합니다. 이렇게 벌써 여러 사람의 수고와 투자자금이 들어간 상태라면, 차라리 표절 작가의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작품 출시를 쉽게 뒤엎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결국 타인의 저작물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방식이 표절이라는 혐의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본인 기획을 그냥 접든지, 아니면 금전적 보상과 크레디트 부여라는 방식이 되든지 말이죠. 패러디나 오마쥬가 표절과 구분되는 점이 바로 ‘원작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하잖아요? 사실 따지기 무척 애매모호한 기준이긴 하지만, <스물 다섯 스물 하나>의 ‘나희도’처럼 “알겠어? 선수들은 모를 수가 없어.”라는 표현으로 밖에 설명이 안 되겠습니다. 또, 누가 봐도 패러디나 오마쥬인데, ‘아 이거 표절 아니냐? 보상금 내놔라!’ 하면 또 가오 빠지는 원작자로 전락하는 바닥이기도 하죠.

‘1분 미리 듣기’와 ‘스트리밍 구독 서비스’를 통해서 대중음악이 너무 쉽게 쉽게 판단되고 소비되는 시장의 현실을 어떻게든 타개해 보려한 기획이 첫 단추부터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는 건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의를 갖추어 저작물을 소비했던 옛 트렌드를 다시금 복원해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원작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못한 모양처럼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래도 취지를 봐서라도 너무 가혹한 비난은 안 들었으면 해요. 정말이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거든요.


한 번은 또, 어느 날 갑자기 ‘엥?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군인이 탈영하는 얘기가 한 번도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없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직 군 복무는 여러 가지 의미로 뜨거운 감자인 것일까? 자긴 두 번 가기는 싫지만, 남들이 땡땡이치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건가?’ 하면서 말이죠. 그때가 아마 저녁 8시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다음날 새벽까지 잠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생각에 빠지니까 이야기 줄거리가 무럭무럭 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자려고 자리에 누웠지만, 이야기를 만드느라 심장이 계속 두근대서 잘 수가 없더군요.

군 복무 동안 저도 탈영을 많이 생각했었고 동기 중에 결혼하고 입대한 놈이 있었는데, 아내가 애를 가지자 어떻게든 탈영하려고 했던 실화를 발단 삼아 여러 가지 인물들을 밀어 넣어 봤습니다. 멋진 사내들이 있는 군대에 있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보다 많은 성적인 일탈을 하고 싶어 탈영하려는 게이, 그냥 지루해서 탈영을 해보려는 녀석…… 흠.. 아예 탈영 후 은행 무장강도가 되기 위해 자원입대한 녀석도 집어넣고, 형의 군대 의문사를 추적하기 위해서 빽을 써가면서 형이 있던 부대로 전입한 신입 소대장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면 되겠다… 고 신이 나 있었죠. 심지어는 이 영화가 히트치고 난 후 인터뷰할 때 할 얘기들을 미리 준비하기도 했었어요.

다음날 일어나서, 밤새 머릿속을 한참 헤집고 다니던 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을 정리해보려고 컴퓨터를 켜는 순간…

<프리즌 브레이크>라는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P.S. 2년 전쯤에는, 정말이지 느닷없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던 멜로디가 있었습니다. 그 멜로디가 한 달 넘게 계속 반복적으로 맴돌더라구요. 저야, 뭐, 작곡을 한다든지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으니, 도대체 어느 노래가 이렇게 뇌리 속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지 궁금해서, 기타 탭 악보로 따놓고 여기저기 검색을 했었죠. 근데… 애매하게 부분적으로 겹치는 부분은 있어도, “아! 바로 이 노래잖아!” 하는 건 안 나오더군요. 결국은  베리의 <Born Free> (1966, 영화 <야성의 엘자 Born Free> 주제곡) 멜로디를 기억하는 건데 머릿속에서 좀 편곡을 해서 나오는 게 아닌가…로 정리했었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크리스마스 시즌 쯤에 우연히 어디선가 흘러나오던 이 노래! ‘Santo and Johnny’의 <Sleep Walk (1959)>!!  전에 어디서 들었었나 했더니, 1988년에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라밤바 La Bamba>에 삽입되었었더군요. 30여 년간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멜로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