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해가 되면서, 나 역시 학교를 잠시 떠나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써클 활동 때문에 학업을 등한시하는 바람에 학사경고가 2회 누적되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당시에는 누적 3회가 되면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써클이나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중적인 대학생 신분에 도무지 적응을 못하겠다는 변명을 내세웠다. 그걸 안주 삼아 매번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고, 또 술 마실 때마다 그 투정을 반복했었기 때문에 써클 사람들은 내가 금방이라도 학교를 그만두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로는, 신입생 후배들이 들어오면서 나라는 인간의 실체가 까발려질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비록 한 살 차이, 혹은 재수나 삼수를 해서 나이가 나보다 많은 후배도 있었지만, 이 당시만 해도 ‘선배의 도리’, ‘후배의 도리’ 같은 권위주의 시스템이 (심지어 사회 시스템 본질적 변화를 꿈꾸는 운동권들에게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한 학년 아래 후배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게다가, 워낙 습관적으로 허세 부리며 살던 나로서는, 그걸 어느 후배가 언제나 눈치채게 될지 몰라 항상 전전긍긍해있기도 했다. 내가 할 일만 그냥저냥 잘한다면, 선배들에게는 입장에서는 내가 허세를 부리든 허풍을 치든 간에 귀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후배들에게 내 허울이 들통난다면 왠지 그 자리에서 그냥 매장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리고 그런 조짐은 항상 있었다.
지난 겨울방학 워크숍으로 작업을 했던 단편영화는 박노해의 ‘시다의 꿈’이라는 시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 여름과는 달리 이번에는 선후배 참가 인원도 충분히 있어서 편집과 후반 작업도 포기하지 않고 다 마칠 수 있었고, 봄에 신입부원들이 들어왔을 때 간단한 상영회를 열었었는데, 그 영화를 본 한 신입생이 어느 장면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주인공이 ‘시다 (시다바리, 수습 재봉사)’라면서 어떻게 재봉틀을 돌리고 있냐고 하면서……
열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이 작품을 제작하는데 참여하는 동안, 그 누구도 ‘시다’는 재봉틀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는, 이 상황이 당시 영화운동을 해보겠다는 대학 영화써클의 실체를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 같았다. 말로는 “영화는 혁명의 무기다”라고 부르짖었지만, 실제로는 노동자가 어떻게 사는지 조차 알려고 하질 않았다는 것. 우리에게 “노동해방”이라는 단어가 옷을 치장하는 브로치와 과연 얼마나 달랐던 걸까? 모두 입만 까진 책상물림에 불과했고 죄다 껍데기였을지도 모르겠다. 녀석이 써클에 남아 있었어도 이런 실수가 있었을까? 지난 11월에 만났던 청계 피복노조 노동자들의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 후배의 단순한 질문 때문에 나는 한동안 얼굴을 들고 다니질 못했고, 더 이상 발가벗겨지는 것이 무서워서 결국 휴학계를 내야 했다.
휴학을 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해야했던 것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었다. 1학년 때, 남들 다 하던 대학생 과외교사라는 걸 해보려고 했었지만 나한테는 맞지 않았다. 내가 죽기만큼 하기 싫었던 입시 공부를, 아이들이 똑같이 하느라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과 같이 상담을 하면서 다른 전망을 보여주려고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선생님은 그 대학에 이미 입학하셨으니까 그런 말씀을 할 수 있는 거예요.”내가 다녔던 학교가 배출한 졸업생들이 이 나라를 줄곧 망쳐왔다는 걸 나도 알고 그들도 모두 알았겠지만, 그렇다고 뭔가 더 이상 내 설득이 먹혀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편의점이 없었던 시절이라, 대학생 과외를 제외하고 휴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란, 보통 새벽 신문배달과 오후에 호프집 서빙이었다. 나는 그때 학생운동의 어정쩡한 위상이, 바로 가정에서 받는 재정지원 덕에 생계에 대한 고민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재정적 독립이 없는 변혁운동이란, 무슨 올바른 얘길 늘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치기 어린 젊음의 반항”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지금은 “사회와 문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함으로써 그 대가로 육체노동을 면제받을 수 있는” 지식인의 삶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당시에는 부모들이 하지 말라는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부모로부터 금전 지원을 받는 상황에 대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당 800원 받는 호프집 서빙으로 재정적 독립을 이루기란 어려웠고, 휴학을 시작할 때의 거창한 결심과는 달리 점차 룸펜이 되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남들처럼 공장투신이나 농투신을 하는 건 엄두도 나질 않았다. 예전에 잠깐 청계 피복노조의 모임에 참석했을 때처럼, 초면부터 나이 까고 “형님, 누님” 하면서 집단 내 질서에 스며드는 일은 또다시 허세를 부리며 사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그렇다고 나만 유별나게 깔끔을 떨자니 왠지 “학출 (학생출신)” 티를 너무 내는 셈이 될 것 같아서, 도무지 어떤 스텐스를 잡아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만일 내가 투신을 결정한다면, 그건 무슨 커다란 조직가나 전업 활동가가 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명문대 간판을 단 기득권 회사원으로 평생을 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내 진정한 모습으로 맞다이하며 사는 노동자가 되기 위한 투신이었기 때문에, 또 다시 나 자신을 속이는 짓거리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 지난해 <파업전야 공투위>에서 만났던 선배와 연락이 닿아서 그가 만드는 다큐멘터리를 돕기로 나섰다.
1991년은 학생 운동, 민주화 운동, 노동 운동 현장에 죽음이 끊이지 않던 한 해였다.
먼저, 명지대학교 앞 시위 현장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을 피해 학교로 후퇴하려던 대학교 1학년생 (강경대, 당시 19세)을 경찰 사복체포조 (백골단)가 쇠파이프로 머리를 마구 쳐서 살해한 사건이 시초가 되었다.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바로 다음날로 내무부 장관을 경질하고, 그다음날에 사건 관계자 경찰 5명을 구속하는 등 즉각적인 민심수습 차원의 대응을 했지만, 이미 도망가는 학생을 뒤에서 잡아 때려죽인 공권력에 대한 시민들 적대감과 절망감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1990년 말에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부터, 이미 상식을 벗어나 있던 공권력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4월 27일에는 보안사의 감시를 받던 사회연구소 연구원 (김영환, 당시 26세)이 자취방에서 사체로 발견되었고, 전노협 가입과 관련해 수감되어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는 노동자 (박창수, 당시 31세)가 감옥에서 의문의 부상을 당한 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가, 5월 6일에 병원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여기에 경찰은 다음 날 5월 7일, 전경 22개 중대를 동원해서, 병원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가 시신을 탈취하기도 했다.
정권의 폭력과 살인에 절망하고 분노한 사람들의 투신 /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의 폭력. 그리고 언론의 침묵에 대항하기 위해, 가진 것 없는 작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자기 몸을 쥐어 짜 불을 붙이거나 높은 곳에 홀로 올라가서 외치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다른 방법이 없기도 한 시대였다. 처음에 경찰의 살인진압에 분개하던 시민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죽음 소식에 점차 지쳐갔고, 정원식 총리 후보자가 학생들에게 계란을 얻어맞는 장면이 뉴스에 연달아서 방영되자 “어른에 대한 학생들의 패륜”을 운운하면서 여론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여기저기서 쉬지 않고 새로운 죽음의 소식이 들려왔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선배들과 함께 카메라를 들고 시위 현장을 뛰어다니던 매일매일, 또 하나의 꽃 같은 생명이 사라질 때마다 나는 슬픔과 분노를 참기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혹여라도 녀석의 이름을 뉴스에서 보게 되지 않을지 계속 마음을 졸여야 했다. 억겁과 같던 몇 개월의 초조함이 지나고, 녀석이 시위 현장에서 화염병으로 현장에서 체포된 후 검찰 기소장 대신 입영통지서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녀석의 부모님을 통해 전해 들었다.
<계속>
강경대, 19, 명지대학교 1학년, 4월 26일 시위 후 도주 중 백골단에게 쇠파이프로 폭행, 두부 함몰, 사망
김영환, 26, 한겨레 사회연구소 연구원, 보안사의 추적을 받던 중 4월 27일 자취방에서 의문사
박승희, 20, 전남대학교 2학년, 4월 29일 전남대학교 대학 본부 건물 뒤에서 분신, 5월 19일 사망
김영균, 20, 안동대학교 2학년, 5월 1일 안동대학교 학생회관 앞에서 분신, 5월 2일 사망
천세용, 20, 경원대학교 2학년, 5월 3일 경원대학교 공대 건물 2층에서 분신, 5월 3일 사망
박창수, 31,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91년 2월 집회 참석의 이유로 구속된 후 안기부에서 조사. 5월 서울 구치소 수감 중에 의문의 부상 – 안양병원 이송 후 5월 6일 의문사, 5월 7일 전경 22개 중대가 영안실 벽을 부수고 들어와 시신 탈취, 이후 비공개 부검을 한 후 추락사로 발표
김기설, 26, 전민련 본부 사회부장, 5월 8일 서강대학교 본관 옥상에서 분신, 5월 8일 사망
윤용하, 22, 서울 직장 민주화 청년연합 회원, 5월 10일 전남대학교 대강당 화장실에서 분신, 5월 12일 사망
이정순, 39, 식당 노동자, 5월 18일 연세대 정문 앞 철교에서 분신, 5월 18일 사망
김철수, 18, 보성고등학교 3학년, 5월 18일 보성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분신, 6월 2일 사망
차태권, 32, 운전기사, 5월 18일 광주 전일여객 차고에서 분신, 생존
정상순, 25, 건설업, 5월 22일 전남대학교 병원 영안실 옥상에서 분신, 투신 5월 29일 사망
김귀정, 24, 성균관대학교 3학년, 5월 25일 경찰의 시위 진압 중 최루탄과 진압봉 / 방패 구타로 인해 압박 / 질식사. 경찰이 영안실에 들어와 시신 탈취를 시도했으나 무산
이진희, 27, 인천 (주)삼미 기공 노동조합 홍보부장, 6월 8일 임금인상 보고대회 중 노동조합의 타결 하에 분노하여 분신. 6월 15일 사망
석광수, 30, 인천 공성 교통 노동조합 대의원, 6월 14일, 사측과 임금협상 중 발생한 노조 지도부 연행에 항의하며 6월 15일 분신, 6월 24일 사망
손석용, 22, 대구대학교 2학년, 8월 18일 대구대 대명동 캠퍼스 옥상에서 분신 / 투신, 8월 19일 사망
한국원, 27, 서울 대학교 공업 화학과 대학원생, 9월 17일 시위대 옆으로 지나가던 중 진압 경찰 총격에 사망
양용찬, 25, 제주 서귀포 나라 사랑 청년회, 11월 7일 ‘제주 개발 특별법’ 저지를 외치며 나라사랑 청년회 건물 옥상에서 분신/ 투신. 같은 날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