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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연 2

미연 : 두 사람… 물어볼 게 있는데…

준표 : 어우.. 질문하는 습관 되게 좋은 거예요 ㅎㅎㅎ

미연 : 둘이 왜 헤어졌어? … 동진씨가 바람폈어? 

준표 : 어유.. 얘가 무슨 그런 주변머리가 있나요.

미연 : 니가 돈을 막썼어? 

지호 : 우리언니가? 저 왕소금이?

미연 : 때렸어? 

은호 : 아니 얍삽하고 무책임하고 제 멋대로인 대다가 가끔 재수없고 남의 속을 벅벅 긁긴해도… 그렇게 나쁜놈은아냐. 성격차이야, 더 이상 같이 살다가는 진짜 꼴도 보기 싫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헤어졌어.

미연 : 그렇구나….. 둘 다 끝장을 안 봐서, 바닥을 안 쳐서 미련이 남은 거야.


무협소설을 좋아했었다. 어릴 적부터 성룡영화를 보러 혼자 극장에 다니곤 했다. 자연스럽게, 내공을 쌓고 어떤 초식을 익히기 위해선, 애초에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던가, 아니면 마당 쓸기 3년, 물 긷기 3년, 물푸레 나무 건너뛰기 5년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당연히 나는 후자에 속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관찰력과 상상력, 기억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벼락처럼 지나가는 번호판, 간판을 관찰하고 외우는 연습을 했다. 지나가면서 흘려 듣는 사람들의 대화를 메모에 남겼다. 한숨을 쉴 때 어깨가 내려가는 모습, 우쭐할 때 가슴이 치솟는 모습을 눈에 익혔다. 슈퍼에 가서도, ‘아… 이런 성격의 사람들은 이렇게 가격을 흥정하는 구나… 나중에 써먹어야지’ 하면서 머릿속에 적어두었다.

목적의식적으로 계발했던 관찰력, 상상력, 기억력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처음엔 자상한 남자라는 칭송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나의 집요함에 모두 지쳐나갔다. 나중에 ‘스토킹’이라는 새로운 범죄유형이 소개되었을 때, 아… 딱 내 성향과 같구나 싶었다. ‘그럼 뭐 어때. 이게 다 불후의 명작을 만들기 위한 건데’ 라며 스스로를 속였다. 그러면서 내심으로는, 언제 만들 수 있을지 모를 내 창작물보다 지금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을 더 원했다. 

그래서, 식사제공, (사무실 내 스티로폼) 숙박제공, 연봉 500만원의 충무로와 연을 끊기로 했다. 해외하청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애니메이션 업종에선, 그래도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자친구에게 젓가락이 아닌 포크와 나이프로 먹는 음식을 사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밥 한 끼 사줄 형편을 못 만들어 주는 영화가 다 무어람.. 이라고 생각했다. 몇 해가 지나자, 마치 농담처럼 애니메이션 기획붐이 일었고, 영화와 애니메이션 양쪽에 다 경험이 있는 프로듀서 인력이 귀해졌다. 한동안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최저생계를 꾸릴 수 있는 날들을 만끽했다.

배움이란 것에 순서가 있고, 성장에도 단계가 있다는 내 오랜 믿음은 ‘한국식 민주주의’나 ‘낙수효과’ 라는 궤변도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산업으로서 영화와 산업으로서 애니메이션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느덧 선거철 정치가들처럼 명함을 돌리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영상산업의 초석을 다진다고 생각했는데, 영화’판’, 애니메이션’판’이라는 아사리판,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고 온갖 탐욕 덩어리들만 넘실거리는 현실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데끼진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초기 산업 형성기에 존재하는 부산물 정도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뭐가 되었든, ‘난 그동안 노력했었기 때문에, 이정도의 기초생활은 누릴 자격이 있어’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 모은 책과 음반을 꽂아 둘 정도의 공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아침상을 차릴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갖는게 뭐 어때서? 내가 이 아사리판에 뭐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는 건데? 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그렇게 갖고 싶어서 노력했던 능력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던 능력들을 묻어버리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말투나 사소한 행동을 관찰하고, 그걸로 엉뚱한 상상을 하는 습관을 버렸다. 헤어지고 나면 훌훌 털어버릴 수 있도록 기억력도 버렸다. 가끔 아사리판의 혼탁함 때문에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지만, 뭐 그럼 서울을 떠나서 다시 시작해보지…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틱’하고, 낡은 필라멘트 줄이 끊어지듯, 모든 게 끊어졌다. 세상에 하나 도움 안되는 마스터베이션은 이제 그만.


어눌한 영어 탓인지, 이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내가 캐나다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걸 쉽게 눈치챘다. 그리고 곧 따라오는 질문은 “한국에선 무슨 일 했어?

처음에는 조금 겸연쩍게, 그리고 사람들의 깜짝 놀라는 반응이 재밌어지자 이후엔 좀 우쭐거리면서 대답을 했다. Film industry에 있었다고. 하지만, 내가 그 얘길할 때 마다 내가 무슨 회한의 냄새를 풍겨댔는지, 사람들은 곧이어 “아이고… 네가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혹은 “근데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밴쿠버 영화판은 안 찾아봤어?” 하며 나를 위로하고 채근했다. 아직은 내 마음에 사람들의 진심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위로나 공감은 오히려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한 나의 선택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거부했다.

한국에 가서 옛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지겨워졌다. 초반 30분은 자식농사 얘기들, 그리고 다음 한 시간은 재태크, 부동산… 그리고 그 가운데 버릇처럼 끼어드는 탄식, “난… 넌 정말 끝까지 영화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게 말야. 우리 중에 영화 할 놈이 얼마나 있었어? 저 새끼랑, 또 …”

그래서 뭐. 나보고 어쩌라고. 누구처럼 아내를 닥달해서 처가집 명의로 은행 빚이라도 지란 말인가? 그렇게 아쉬우면 일찌감치 엄마 아빠한테 부탁해서 돈 천만원이라도 투자하지 그랬어. 아니 그것보다, 영화가 뭐, 별 건가? 그렇게 대단해?


용돈을 조금씩 모아 이젤과 그림 도구를 사두었던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이들 다 시집 장가 보내고, 아직 힘이 남았을 때 은퇴를 하면, 가까운 교외로 터전을 옮기고 그림을 그리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아름다운 상상을 하셨겠지. 하지만, 당신이 휴일마다 즐겼던 건 그림을 그리거나 미술관 산책을 하는 게 아니라, 소주와 함께 권투중계 방송을 보시는 거 아니었나? 아버진 과연 그림을 좋아하셨던 걸까?

그렇게 닮기 싫어했던 아버지와, 머리도 비슷하게 벗겨지고, 턱살도 비슷하게 늘어지면서, 휴일에도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저기서 느낀다. 앗 뜨거라 싶어서, 서둘러 글을 쓰고 책을 냈다. 설익고 거친 문장, 뒤죽박죽 문단이라는 걸 알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을 받지도 못했지만, 병상에서 이젤을 바라만 보면서 후회 가득한 말년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영화 일에 다시 연을 맺게 될지.. 아직도 알 수는 없다. 누구 말처럼 지금부터 열심히 써야 70에 데뷔할 수 있는 건 사실이겠지. 하지만 다시 영화를 찍든, 내 책을 또 내든 간에, 내가 지금 글을 쓰면서 충분히 즐거운지, 글을 통해 만난 인연들 덕분에 내 삶이 더 충만해지는지, 손끝에 물집이 잡히고 손가락 근육에 쥐가 나는 시기를 이겨낼 만큼, F 코드를 잡고 기타를 퉁기는 것이 행복한 일인지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