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Archives: July 29, 2022

아니! 어디서 이런 괴물딱지가!!

LEVEL 0 (스포일러가 전혀 없거나, 간략하게 있더라도 영화 감상에 크게 지장 없습니다)


예전에 자주 가던 젤라또 가게 (238가지 맛을 고를 수 있다고 자랑하는 https://lacasagelato.com/)에는 카레맛 젤라또, 김치맛 젤라또, 와사비맛 젤라또가 있었습니다. 그냥 뭐, 아주 딱,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여줬던 괴식이었어요. 하지만, 그런 괴상한 맛을 시식할 수 있었던 덕분에 그 젤라또 가게에는 연일 사람들이 몰렸었죠. 나갈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초콜릿 젤라또를 손에 들고나가더라도 말이죠.

이렇듯 살다 보면 가끔 완전히 상상도 못 할 새로운 걸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우연하게 얻어걸린 것 같이 말이죠. 물론 처음부터 그걸 쉽게 받아들일 수는 힘들지만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MBC 오디션 무대에 나왔을 때 ‘전영록’ 심사 위원으로부터 혹평을 들었던 건 아주 유명한 얘기입니다. 밴드 ‘들국화’도 처음에는 ‘가창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기도 했구요. 사실, 새로운 문화라는 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여진다면 그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라는 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소설집 <아담이 눈 뜰 때>가 나왔을 때, 처음엔 좀 당황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물론 차차 적응이 되자 그의 신간은 모두 찾아 읽기도 했지만요. 영화 <중경삼림>도 마찬가지였어요. 처음에는 그냥 있어 보이려고 힘 준 대사, 현란하기 짝이 없는 카메라 정도로만 받아들여진 적도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태지’와 ‘들국화’가 방송에 나오고, ‘장정일’이 출판이 되고, <중경삼림>이 개봉될 수 있었던 건, 판매자 입장에서는 어쩌면 ‘카레맛 아이스크림’과 같은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소비자의 호기심을 일단 유인해보는 거죠. 동시에 특이한 입맛도 포용할 수 있구요. 가게 밖으로 나갈 때는 대부분 초콜릿 젤라또를 선택하겠지만 말이죠. 물론 이들 외에도 수많은 괴식들이 소리 소문 없이 호기심용으로 시식되었겠죠. 하지만 이들이 전설로 기억에 남을 수 있었던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시장을 장악하는 자신들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기성세대들에게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때쯤 되면 이제 이런 새로운 문화가 기존 문화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는 거죠.

‘서태지’의 <환상 속에 그대>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가사가 하나도 안 들렸었어요. 하지만, 곧이어 그의 음악은 대한민국 가요계에 한 축이 되어버렸죠. 그의 음악이 예전 인기가요들을 싹 다 갈아엎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태지’ 이후에 나온 음악들은 좋든 싫든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중경삼림> 역시, 장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가, 이후에 나온 수많은 영화들로부터 레퍼런스로 활용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고전적인 영화 문법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구요.

영화만 놓고 봤을 때는, 사실 요즘처럼 OTT를 정기 구독하는 문화에서 이러한 ‘상상도 못 했던 만남’을 가질 확률이 더 높아지긴 했습니다. 적어도 넷플릭스나 디즈니처럼 미디어 공룡이 운영하는 OTT 서비스에선 더욱 그렇죠. 디즈니 플러스가 아니었으면, 세계 최초 극장용 애니메이션인 <백설공주>에서 왕비가 ‘천둥 치는 밤, 곡괭이를 든 일곱 난쟁이에게 쫓겨 산으로 달아나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거나, 가족용 애니메이션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가 담배를 피우면서 당구를 치는 장면’이 나올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겠죠.

하지만, 많은 영화들이 극장에서 개봉하는 걸 고려해서 연출되고 제작되었다는 걸 생각할 때, 여전히 OTT 서비스 만으로는 이런 만남을 가지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잘해야 예전에 학교 앞 비디오 가게에서 개당 200원씩 비디오를 (두 봉지 가득!!) 빌려서 주말 내내 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거겠죠. 그래도 그땐 동네마다 동시 상영 재개봉관이라도 있어서 우연히 얻어걸리는 행운을 대형 화면으로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웅본색>이 아주 대표적인 사례죠. 전통적인 액션 영화 문법을 한참 벗어난 잔인한 총격전이 남발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평단의 외면을 받았지만, 변두리 재개봉관에서 열광적인 호응을 받아서 다시 재평가를 받게 되었잖아요.

물론 이런 우연한 만남의 기쁨은 ‘영화제’를 통하는 게 가장 적절하겠지만, 사실 영화제 기간 내 자유롭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패스 가격은 만만치가 않죠. 지금은 일반적인 극장 관람료도 무척 올라서, 뭔가 새로워 보이는 작품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 결국, 이제는 OTT 밖에 없는 건가요?

물론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 있긴 합니다. 바로 입소문이죠. 꼭 내가 최초 발견자일 필요는 없잖아요.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 누군가가 추천을 해주면, 또 그걸 믿고 보러 가게 되는 거죠. <영웅본색>도 <터미네이터>도 다 처음에는 작은 극장에 단관 개봉으로 시작해서 입소문 만으로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아예 이런 입소문에 기대어 점차 상영관을 넓혀가는 배급 전략 – 플랫폼 릴리즈 (Platform Release)도 있죠. 이럴 경우 최초 배급 비용도 아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최근에는 이마저 OTT 기업들의 선구매로 사라지는 경향입니다. 어떤 영화는 극장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OTT에 풀리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던 와중에 바로 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라는 영화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단 한 단어로 소개받았어요 ‘Crazy’라구요. 이런 약 빨고 만든 영화 처음 봤다는 거예요. 이때가 5월 말 즈음이었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처음 개봉은 3월 말에 했더라구요. 이렇게 마케팅 하나 없이, 신문이나 TV 기사도 안 나오는 영화가, 맨땅에 헤딩만으로 2달 동안 시내 웬만한 극장에 다 걸려 있다뇨 (<토르>와 싸우느라 잠깐 극장에서 떨어진 이 작품은, 7월 말 8분을 늘인 확장판으로 재개봉합니다)!! 그것도 무명 감독에 메인 캐릭터는 모두 중국계 배우인 영화가 말이죠. 이때쯤 되니 촉이 오더라구요. 아! 이 영화 봐야겠다! 이제부터 모든 정보를 끊고 백지상태에서 봐야겠다. 1996년, 홍대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집어 든 <Our Nation> CD에서 <말달리자>를 발견하고 받았던 충격을 또 한 번 느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첫 감상은, 아니나 다를까 “Crazy!!”였어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제작 : A24, AGBO production, Year of the Rat

배급 : A24

각본 / 연출 : 다니엘 콴, 다니엘 샤이너트 (Daniel Kwan, Daniel Scheinert – Two Daniels)

출연 : 양자경, 키 후이 콴, 스테파니 슈, 제임스 홍

LEVEL 1 (영화 이해를 돕기 위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래도 완전 백지상태에서 보고 싶으신 분들은 여기서 멈추시길)


그래도 나름 어릴 적부터 영화를 꽤 봤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제 전통적인 서사에만 의존하는 영화는 그렇게까지 끌리진 않습니다. 서스펜스 장르도, 공포물 장르도, 어느 정도 장르의 관습과 반전을 예측하기 때문에 그냥 그렇구요. 오히려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들은 몇 번을 다시 봐도 좋더군요. 연기와 화면만 좋으면 고전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더라도 종종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근데 도무지, 이 괴상망측한 영화는 보는 내내 예측이 안되더라구요. 계속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설정이 몰아쳤습니다. 정신없이 깔깔 웃다가 2시간 20분 영화가 끝났는데, 여전히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갔어요 (중국어 엑센트가 강한 영화라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래서 처음엔 차마 감상문을 쓸 엄두가 안 났다가, 최근에 우연하게 한번 더 보게 되니 이야기 앞뒤가 좀 맞더군요.

미국 어느 도시에서 세탁소 (북미의 임대용 아파트에는 세탁기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문에, 한국과 달리, 북미의 세탁소는 저소득층 고객들이 동전을 넣어 셀프서비스로 세탁을 많이 해서,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쉽게 운영할 수 있는 비즈니스입니다. 한국계 중국계 이민 1세대들이 많이 운영을 해요)를 운영하는 중국계 이민 1세대 ‘에블린 (양자경)’은 너무 정신없이 바쁩니다. 평일에도 불평을 하거나 치근덕거리는 손님 상대하랴, 세탁기에 신발 넣는지 감시하랴 바쁜데, 지난 몇 년간 세무신고를 할 때마다 국세청에서 감사를 한다고 해서 영수증들을 죄다 다시 정리해야 하거든요.

게다가 그 담당자라는 사람은 얼마나 깐깐하게 구는지,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을 잡기도 합니다. 일부러 어려운 영어단어를 골라 쓰는 것 같기도 하구요. 당장 오늘 저녁에 가게에서 설날 (Chinese New Year) 파티를 하려고, 홍콩에서 ‘아버지 (제임스 홍)’가 비행기 타고 어제 도착했는데, 파티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아도 지금 당장 시급한 건 세무감사부터 확실히 마무리 짓는 겁니다.

남편 ‘웨이먼드 (키 후이 콴)’는 도무지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에블린이 영수증 정리를 하는 동안에 자기 아버지 식사를 챙겨주거나, 귀찮은 손님들 상대를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직도 아버지 입맛도 제대로 모릅니다. 게다가 이 바쁜 와중에 자꾸만 말을 걸며 대화 좀 하자고 하는 겁니다. 물론 그게 이혼에 관한 이야기라는 건 에블린으로선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가끔 세탁소에 걸린 TV 화면에서 멋진 무도회 장면이 나오면, 내가 그때 선택을 잘했다면, 세탁소 주인이 아니라 저런 멋진 무도회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딸, ‘조이 (스테파니 슈)’는 오늘 밤 파티에 동성 연인을 초대하면서 외할아버지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에블린은 어릴 적부터 구박을 들으면서 자라왔던 터라, 이 사실을 알면 아버지가 얼마나 노발대발하게 될지 불 보듯 뻔합니다. 아니 그전에, 평소에는 별로 연락도 안 하고 살다가, 자기가 요구할 거리가 있을 때만 이렇게 말을 거는 딸이 얄밉기만 합니다. 더럽고 치사해서 아침에 국세청 직원을 만날 때에도 딸의 통역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딸과 대화를 이어나가기 싫습니다. 이날 아침에도 딸에 한 얘기는 “살쪘으니 음식 좀 가려 먹어라” 였습니다.

결국 이러저러한 소동을 대충 수습하고 영수증을 들고 찾아간 국세청.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 남편도 딸도 믿을 수 없어서 혼자 모든 걸 (Everything) 떠맡았던 에블린에게, 이제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하지만 무척 매력적이기도 한 새로운 모험이 시작됩니다.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도입부인데, 2시간 20분 영화에서 초반 14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얼마나 압축적으로 전개되는지 짐작 가시겠죠? ‘지루한 일상에 염증이 난 중년의 일탈’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과 같은 전통적인 소재는, 이후 멀티버스라는 개념이 들어가면서 과거와 현재, 또 다른 차원의 현재를 정신없이 넘나듭니다.

양자경이 분한 ‘에블린’이라는 캐릭터는 모든 걸 자신이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영어권 사회에서는 Control Freak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죠. 그러면서 본인은 자신이 희생하는 거라고 생각하죠.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안 하기 때문에, 가뜩이나 바쁜 내 시간을 쪼개서 떠맡고 있다구요. 사실은 자기가 설정한 기준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는 걸 견디지 못하는 것 뿐이지만요. 어떻게 잘 아냐구요? 제가 바로 그런 인간이거든요.

처음 에블린을 봤을 때는, ‘이야… 정말 캐릭터 잘 잡았다…’ 싶었습니다. 기존에 영어권 사회에서 만든 영화에서 나오는 아시아계 중년 여성들은, 흔히 순종적인 스테레오 타이핑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아니면 맨손 격투의 달인이든지). 하지만, 제가 이제껏 만나 본 많은 아시아 중년 여성들은 (특히 중국계 이민자) 무척 강인했습니다. 어떤 일을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경우도 많았구요. 두 감독 중 한 사람이 중국계라서 캐릭터 이해가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루소 형제가 제작한, 블록버스터 액션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화에 이런 생생한 캐릭터가 나오니 반갑더군요. 처음에는 양자경 역할을 성룡을 고려했다고 합니다. 2017년에 쓰인 시나리오 초고를 봤더니 아예 캐릭터 이름이 Jackie Chan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물론 성룡도 대단히 훌륭한 배우이고 Control Freak 역할도 잘 해냈겠지만, 초기 시나리오에서 아내에게 윽박지르는 장면을 읽는 것만으로도 좀 꾸리이이해지더라구요.

이 영화에서 소개되는 ‘멀티버스’ 개념은, 말하자면 개인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평행우주와 같은 걸로 보입니다. 마치 예전에 코미디어 이휘재씨가 “그래. 결심했어!” 하며 외치던 <TV 인생극장> 처럼 말이죠. 말하자면, 과거에 웨이먼드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경우 달라졌을 운명이 평행우주로 나오는 셈이죠. 그런데 여기서, ‘버스점핑’이라는 개념까지 동원됩니다. 다른 평행우주에서의 또 다른 나 자신과 동기화되어 그의 능력을 빌려오는 거예요. 예를 들어 평행우주에서 내가 숙련된 요리사라면 그 조리능력을 빌려와 현재 우주에서 쓰는 걸 ‘버스점핑’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봤을 때는 이렇게 정신없이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연출 때문에 무척 혼란스러웠는데, 두 번째 볼 때는 알겠더라구요. 다른 우주로 갈 때는 화면 비율이 바뀐다는 사실을요.

영화에서 세무감사를 받고 설날 파티를 준비하는 ‘현재 (멀티버스 영화에서 ‘현재’라는 단어가 얼마나 유효할지는 모르겠지만)우주’의 경우는 화면비 16:9로 나옵니다. 그리고 새로운 평행우주가 생성되기 전의 과거 이야기는 4:3으로 (대개 흑백으로) 표현되구요. 그리고 ‘버스점핑’을 한 상태라거나 ‘알파버스 (자세한 설명은 영화를 보세요)의 이야기는 2.39:1로 나옵니다. 근데 이것도, 나중에 개난장판이 되면 막 뒤섞이더라구요. 하지만 그때까지 가게 되면, 이미 줄거리는 어느 게 현재이고 어느 게 평행 우주인 건지는 크게 상관이 없어지긴 합니다.


LEVEL 2 (결말을 포함한 많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뭐, 줄거리 전개를 이해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그냥 팝콘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본다면, 영화는 충분히 유쾌하고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일단 줄거리를 떠나서, 감독의 뻔뻔한 연출이 무척이나 웃겨요. 마치 “이해 안 간다고? 앞뒤가 안 맞는다고? 그럼 좀 어때?”라고 하며 나자빠지는 주성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1992년에 <명자, 아키코, 쏘냐>라는 영화에서 52세 김지미 배우가 20대 역을 연기한다고 해서 그렇게 욕을 먹었었는데, 여기서는 60세 양자경이 20대 여인의 역할을 천연덕스럽게 합니다. 메인 빌런이 양손에 거대한 딜도를 들고 경비원을 뚜까 패는 장면을 슬로비디오로 보여주는데 배경음악으로 드뷔시 풍의 피아노 독주곡을 턱 걸쳐두는 것도 뻔뻔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 영화의 코믹한 부분을 얘기할 때 빼먹을 수 없는 설정 중 하나는 ‘버스점핑’인데요. ‘버스점핑’을 하기 위해서는 ‘점핑패드’라고 하는 어떤 특별한 준비행위가 필요합니다. 영화상에서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행동을 느닷없이 하는 걸 말해요. 걸그룹 댄스를 춘다든지, 챕스틱을 먹는 다든지, 종이로 손을 네 번 벤다든지, 양쪽 신발을 바꿔 신는다든지 하는 행동 같은 것들이죠. 가뜩이나 전개가 정신없이 몰아치는 영화가 이 때문에 더 정신없이 유쾌해집니다 (근데 이렇게 쓰고 있자니, 왜 한국에서 아직 개봉을 못했는지 알 수도 있는 것 같기도 ㅠㅠ).

그리고, 수많은 다른 영화들의 레퍼런스를 찾는 것도 영화광들에게는 눈이 즐거운 일이겠죠. 90년대 초반에 많이 나왔던 <총알 탄 사나이>류의 패러디물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면서도 매우 즐거워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일단 영화의 주된 뼈대는 <매트릭스>와 <터미네이터>에서 빌려왔습니다. 무료한 일상에 지친 주부의 액션물이라는 점에서는 <트루라이즈>와 결을 같이 하기도 하죠. 그 외에도 7~80년대 중국 무협영화나, 이소룡의 <용쟁호투>, <사망유희>같은 헐리우드 쿵후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타워즈>, <화양연화>와 같은 클래식, 애니메이션 <라따뚜이>나 게임 <스매시 브라더즈>도 레퍼런스로 사용됩니다. 중간에 영화를 끝내는 ‘메타 엔딩’의 경우 ‘콘 사토시’의 <파프리카>나 ‘미카엘 하케네’의 <퍼니게임>을 연상케 하기도 하구요. 영미권 팬들은 ‘알렉스 콕스’의 <리포맨>도 있다고 하는데, 전 잘 기억이 안 나서……

생각보다 액션도 괜찮았습니다. 아니 사실 매우 좋았어요. 중국 무술영화나 무협지를 좋아하셨던 분이라면 영화 <샹치>에서 나온 것처럼 남권 (홍가권, 영춘권)과 북권 (소림권)의 격투 장면을 보고 감동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의 무술감독 (Fight Choreographer) ‘Andy Le’가 <샹치>에서 스턴트맨으로 참가했다더군요. 여기선 무술감독뿐 아니라 직접 출연도 합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Alpha Jumper – Bigger Trophy 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영화를 보신 분은 무슨 뜻인지 아실겁니다).   

어느 날 사는 게 지긋지긋해져서, 베이글에 모든 걸 다 넣어봤어. 내 성적표, 내 꿈, 모든 종류의 강아지, 중고 직거개 광고, 참깨, 소금 등 정말로 모든 걸…… 그랬더니, 이렇게 되더라. 정말 모든 걸 넣으면, 진리가 되거든. 어찌 되었든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진리가 – 모든 게 부질없다는 진리에 도달하면, 인생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이나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려 – 베이글에 통째로 빨려 들어가

영화의 큰 주제는… 사실 뭐, 크게 새로운 건 없습니다. ‘가족 간의 불화는 진심을 담은 대화로 풀 수 있다’ 뭐 이런 디즈니 풍의 주제라고 할 수 있어요. 결정권도 없고 믿음직하지도 못한 아빠, 언제나 바빠서 자신과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엄마, 그리고 색다른 성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딸 ‘조이’가, 어느 순간 뭔가가 툭 끊어져서 뭐 될 대로 돼라 식의 절망에 빠진다는 내용인데.. 이걸 미친 방식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1부에서 우주 최악의 위기처럼 보여지는 에브리씽 베이글은 2부에서는 개인의 깊고 깊은 절망을 말하고 있구요. 영화상 또 다른 갈등으로 등장하는 ‘중년의 위기’는 해결 방식이 너무 식상해서 언급하기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들더라구요. 왜 항상, 부모에게 구박받으면서 자란 아이들이, 늙어서도 부모로부터 더 인정을 받으려고 할까… 하는 질문이요. 본인이 태어나는 장면을 회상하는 에블린은 의사가 아버지에게 “미안하지만, 딸이네요 I am sorry, It’s a girl.” 이라고 말하는 걸 듣습니다. 성장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칭찬 한 번 듣지 못하고 자란 것처럼 나와요. “시끄럽게 뛰지 말아라”, “넌 항상 그래, 일을 제대로 못 끝내고……” 식으로 야단맞는 일 말고는요, 결국 에블린이 웨이먼드와 같이 떠날 때도 아버지는 한 번도 붙잡지를 않습니다. 예전 시트콤 <프렌즈>에서 ‘모니카 갤러’가 인정 욕구 컴플렉스에 시달렸던 것이, 성장과정에서 부모로부터 칭찬을 못 들어서 그랬던 거라는 에피소드가 연상되는 장면이었어요.

북미 사회에서 가정상담을 받으러 가게 되면,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를 많이 묻습니다. 부모님들의 부부관계는 어땠는지도 포함해서 말이죠 (왜 이렇게 잘 아는지는 묻지 말아 주세요).  에블린이 딸에게 살갑게 굴지 못하고 툭툭 쏘듯이 야단만 치는 아마도 본인이 아버지에게 겪었던 걸 그대로 하는 것이겠죠. 이런 걸 보면, 좋은 가정교육이란 다른 것 없이 그냥, 좋은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배급사 A24는 <문라이트>, <플로리다 프로젝트>, <라이트하우스>, <미나리>, <애프터양>과 같은 엄청난 영화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미국 독립영화계의 신흥 강자입니다. 그런데 포트폴리오를 보면 딱히 뚜렷한 방향성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양성”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말이죠. 아마 향 후 10년간은 이 회사의 포트폴리오 중에서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가장 미친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작은 최근에 <그레이맨> 개봉으로 유명해진 루쏘 형제들의 AGBO에서 했구요.

전형적인 n차 관람 영화입니다.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보고도 그냥 지나쳤던 걸 VOD로 봤더니 새롭게 발견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자잘한 장면 하나하나가 단서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구요. 첫 장면 에블린의 테이블에 너구리 인형이 놓여있는 거라든지, CCTV 모니터에 잡힌 웨이먼드의 행동도 포함해서 말이죠.

남주인공 ‘웨이먼드’는 예전에 <인디아나 존스 – 죽음의 사원>에서 ‘숏라운드’로 나왔고 <구니스>에서 ‘데이터’로 출연했던 ‘키 후이 콴 (Ke Huy Quan)’ 이었습니다. 어쩐지 서글서글한 눈빛이 너무 눈에 익다 싶었어요. 이렇게 동시대에서 같이 늙어가는 배우의 영화를 보는 즐거움도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