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겨울 여행기
일을 시작하고 거의 1년 만에 정식으로 휴가를 내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민 이후 처음으로 맘 편하게 휴가를 즐기게 되는 셈이다.
일주일 남짓의 휴가를 받아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잠깐이지만 한국에 갔다 올까 하는.. 식구들이 많이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너무 시간이 짧아 보고 돌아오는 길이 우리에게도 식구들에게도 더 아쉬울 것 같아서 그건 다음 번으로 미루기로 하고, 겨울이라 우리 차로는 갈 수 있는 데도 마땅치 않아 가까운 밴쿠버 아일랜드로 휴가지를 정했다.
밴쿠버 아일랜드는 우리가 사는 밴쿠버와는 다른, 캐나다 서남단에 자리한 섬이다. 지도상으로는 작게 보이지만 섬의 크기가 남한면적의 2/3나 되는 큰 땅덩어리다. 밴쿠버에서는 페리로 1시간 반 정도면 도착하고 부차드 가든 등 관광지도 조성되어 있어 하루 여행지로 인기가 좋다. 우리는 이번에는 섬의 서쪽 해안에 자리잡은 토피노라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토피노는 가장 긴 백사장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다고 한다. 서핑, 카약, 고래 보러가기 관광 등으로 여름엔 굉장히 인기가 있지만 (주민은 1600명 정도인데 여름엔 하루 22000명 정도가 올 때도 있다고..) 겨울엔 비교적 조용하고 폭풍우 구경 정도의 할 거리가 있다고 한다. 이 곳이 아름답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오래 되었지만 거리가 꽤 되어 엄두를 못 내다가 이번이 첫 방문이다. 인터넷으로 숙소를 검색해보니 정말 비싼 숙소들이 많다. 바다를 바로 면한 발코니에 야외 욕탕 등 여러 가지 시설을 만들어놓고 하룻밤에 몇 십 만원부터 백여 만원까지 받는 곳도 많았다. 우리는 일단 가서 저렴한 숙소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좋은 숙소들도 겨울엔 특별할인가를 많이 적용하니까 가서 흥정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제 1 일
전날 밤에 9시까지 일하고 간소하게나마 짐을 꾸리느라 늦게 잠자리에 든 때문인지 생각처럼 일찍은 아니고 8시쯤 잠에서 깨었다.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9시에 집에서 나섰다. 우리는 집에서 가까운 호슈베이 페리 터미널을 이용할 생각이지만 뉴스를 보니 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츠왓슨 페리 터미널은 바람이 너무 심해서 배가 운행을 멈추고 있다고 한다.
9시 30분경 호슈베이 도착. 늘어선 차들이 그리 많지 않다. 연휴를 앞둘 때면 몇 줄이고 늘어선 차들과 배를 기다리며 차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로 술렁거리던 곳인데.. 우리가 섬으로 갈 때 이용하던 같은 터미널이다. 항상 가까운 보웬만 가다가 좀 먼 곳으로 나서게 되었다.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기다리다가 10시가 좀 넘자 밴쿠버 아일랜드의 나나이모 행 페리가 도착하고 차들이 다 빠진 후 배에 올랐다.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다.
일단 딸기를 차에 두고 카페테리아에 가서 아침을 먹기로 한다. 사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맛있는 음식에서 오는 것인데 우린 캐나다에서 그 점은 포기하고 있다. 어딜 가도 같은 메뉴. 샌드위치, 햄버거, 파스타, 스테이크다. 하루끼의 <하루끼의 여행법>을 읽다 보면 미국횡단 여행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다른 곳을 여행할 때의 자세한 기술이 정말 간략하게 바뀐다. 말하자면, 한참을 달려도 비슷한 모텔, 비슷한 햄버거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완전 공감이다.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길 좋아하는 우리로서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그 곳의 먹거리가 있다는 것이 한국에서의 여행의 아주 큰 즐거움이었다고 생각된다.
역시 배의 메뉴는 버거류, 피자, 아침으로는 오믈렛과 소시지, 베이컨 등이다. 별로 입맛이 안 땅겨 커피와 스콘을 집어 드는데 남편도 식빵으로 만든 달걀 샌드위치를 먹겠다고 한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오물오물 빵을 먹는다. 밖의 날씨가 무척 좋다. 햇살이 내리쬐는 바다 위를 페리는 조용히 나아간다. 물을 좀 얻어서 차에 있는 딸기에게도 밥을 먹인다.
밥을 먹고 남편은 게임 하는 곳을 구경하고 나는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고 (살 거 정말 하나도 없다..) 숙소 정보지를 잔뜩 뽑아온 남편과 자리에 앉아 어디서 묵을지를 의논해 본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나나이모 도착.
나나이모는 볼 건 아무것도 없지만 페리 터미널이 생기면서 많이 발전한 도시라고. 콤콤한 비린내가 풍기는 항구도시다. 나와서 옆 주영 주류점에 가서 술을 좀 사고 동네를 조금씩 둘러보면서 길을 떠난다. 집들은 오래되고 새로 지은 아파트들이 많은, 뭔가 약간은 우중충한 항구도시의 모습이다. 우리 생각보다 꽤 큰 도시라 약간은 놀랐다. 밴쿠버에서 볼 수 있는 큰 할인점들도 대부분 다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려 포트 알버니로 향한다. 포트 알버니는 우리의 목적지인 토피노까지 중간정도 되는 작은 타운. 버스 정류장을 중심으로 숙소와 식당들이 좀 있다고. 좋던 날씨가 나나이모를 떠나면서 어두워지더니 포트 알버니에 이르러서는 꽤 세찬 비가 내렸다. 2시쯤 되어 꽤 배가 고팠다. 밴쿠버에서 노상 다니던 캐주얼 레스토랑
금용반점에는 아내가 평소에 꼭 가보고 싶어 하던 영화 속 식당의
실내 구조로 되어있었다. 창 가에 의자가 있어야 하며, 맞은 편
의자 와는 붙어 있어야 하고, 창 밖 풍경은 별게 아니어야 한다
따뜻하게 배를 채운 후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는 고속도로를 따라 길을 재촉했다. 토피노까지는 116Km. 열심히 달려야 해가 남아있을 때 도착할 수 있다. 해가 좀 길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5시가 넘으면 어둑해진다.
가는 길은 Pacific Rim이라고 해서 자연림이 울창한 산길이다.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다더니 비가 많이 와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오래된 나무들과 심심하면 나타나는 호수들이 계속된다. 산길을 열심히 달리는데 어느 순간 비가 눈으로 바뀌더니 엄청나게 눈발이 거세어진다. 마음이 급해진 우리는 눈이 아직 질척한 동안은 열심히 가보려고 서두르다 눈 깜박하는 순간에 미끄러져 차도 밖으로 밀려가 버렸다. 순간 너무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 눈 더미에 부딪혀 멈춰 큰 충격도 없었고 차도 다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서 그랬으면 가로대가 없는 절벽이었는데 너무 감사할 뿐이다.
놀란 가슴을 달래면서 차를 다시 끄집어내 덜덜 떨리는 다리로 20Km도 안되게 차를 몰았다. 조금만 브레이크를 밟아도 차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휙휙 미끄러지는 판이라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남편은 별로 안 놀랐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그 와중에 차가 서버린 아주머니의 트럭을 만나 구조를 요청하는 전화를 하려 했지만 산중이라 전화가 안 터져 아주 나중에 거의 토피노에 도착한 후에야 전화를 할 수 있었다. (다니는 차들이 꽤 있었으니 도움을 받았을 거라 생각된다.)
다행히 어느 정도 가자 눈이 다시 진눈깨비로, 또 다시 비로 바뀌고 길에 눈이 사라졌다. 다시 속력을 내서 열심히 목적지로 향한다.
난 정말 하나도 안 놀랐었는데.. 사실 차가 휘청하고 밀릴 때까지만 해도 더욱 겁이 나는 것은 초행길, 그것도 산길 한가운데에 눈에 갇힐까 봐 걱정이었다. 이 눈길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폭설이 언제 멈출지 전혀 모르는 가운데에 날은 어두워져 가고.. 한시라도 빨리 산길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차가 눈 쌓인 곳에 박히자 놀라기 보다는 짜증이 확 짜증이 나버렸다. 쓰…버.. 정말 멋진 휴가구만.. 하고 말이다. 쏟아져 내리는 눈을 맞아가며 타이어 앞에 있는 눈을 죄다 치워서 차를 빼내는데 성공하자 운전석을 아내에게 냅다 뺏겨 버린다… 치이.. 과속하다 차가 돈 게 아니었단 말이쥐..
다,행,히,도, 몇 킬로를 지나 산길이 완만해지자 눈은 다시 비로 바뀌었고 그나마 그 비도 좀 지나자 멈추기 시작했다. 참, 나, 너무 정신이 없어서 눈에 박혀있던 차의 사진을 찍을 겨를이 없었지만, 그나마 이 눈발 사진이라도 안 남겨 두었다면 아무도 우릴 믿지 않을 것이다.
겨울의 토피노는 ‘폭풍’으로 유명하단다. 말하자면, ‘폭풍 관람’, ‘사나운 폭풍을 거실에서 벽난로와 함께 즐기십시오!”, ‘겨울 폭풍관광 패키지 특매!!’ 등등과 같은 광구문구들이 이곳 토피노 겨울 관광 정보에 가득한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해마다 찾아오는 태풍과 그로 인한 임시휴교, 각종 속보, 수해 등등을 겪고 자란 우리들에겐 괜한 호들갑으로만 느껴졌지만, 아무 생각 없이 계속 토피노로 향하기로 한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가고 있고, 일단은 아무 숙소를 잡아서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무 숙소나 우리가 친히 차를 몰고 찾아가 주면, 숙소 주인이 버선발로 나와 맞아주고, 평소 가격의 반값까지 후려쳐 방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정작 찾아가보니 대부분의 숙소가 이미 예약이 차있거나 싸고 전망 좋은 방은 없었다. 헐값에 스웨덴식 사우나와 벽난로에 와인을 마시며 폭풍을 구경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난 아마 평생 이 헤어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ㅜㅜ), 게다가 우린 ‘딸기’까지 델구 다니다 보니까..
비는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고, 이곳 저곳을 전전하면서 방 구경을 하고 다니다가 다행히도 다행히도 아주 마음에 드는 작은 모텔을 찾아냈다. 관리인 여자는 딸기를 보더니 너무 귀엽다고 벌써 사랑에 빠져 버렸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방을 안내해준다. 항구가 바로 보이는 아담한 방이다. 비록 스웨덴식 사우나와 벽난로는 없었지만, 가격도 괜찮고 깨끗하다.
미국영화에 보면 나오는 전형적인 모텔이다. 2층으로 되어있고 문 앞에 바로 주차장이 있다
짐을 풀고 나서 갑자기 피로가 몰려들어 한시라도 빨리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일단은 먼저 허기를 채워야 하기도 해서, 근처 식당을 향하며 동네 구경을 잠시 한다. 정말이지 모든 마을이 예쁜 레스토랑이나 민박, 모텔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청평’이나 ‘강촌’과 같은 관광지의 느낌을 받았다. 이곳도 원주민 인디언들이 조용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던 마을이었을 테고, 고래 관찰이나 서핑 등 상품이 개발되고 관광지로 발전하면서 주민들은 마을의 번영을 기대하였을 텐데…… 그 때 그들이 기대했던 모습이 정말 이런 모습인지는 알 수가 없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우리도 예쁘장하게 치장된 레스토랑에 가서 간단한 식사를 했다. – 토마토 소스 홍합 조림과 메이트 플레이트(굴 튀김, 가이바시 구이, 새우 구이, 연어 구이, 광어 구이 등의 콤보 메뉴… 하지만 허겁지겁 먹는데 정신을 팔다가 사진을 못 찍었다는 ㅜㅜ)
슈너 레스토랑.. 미사리에 있는 여느 통나무집 레스토랑과 비슷하다
숙소로 돌아왔지만 아직 9시도 되지 않았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몸을 푸우욱 담갔다. 끄으응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몸 속의 피로가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나도 모르게 목이 스르르 뒤로 젖혀진다. 욕실 천장을 보면서, 뜨거운 목욕을 마친 후 마시는 차가운 맥주를 상상하니 침이 꿀떡 넘어간다.
* * *
뜨거운 물에 잠겨 있으니 낮 동안 쌓인 긴장이 스르르 사라지며 휴가 온 느낌이 돌아온다. 낮에 눈 속에 갇혔을 때만 생각하면 다시 돌아갈 생각에 머리가 아파오지만, 어쨌든 우린 먼 길을 달려 서쪽해안에 도착한 것이다!
베란다에서 바로 토피노 항구가 보인다. 뭐 이런 정도의 경치는 보웬에서부터 익숙하지만..
딸기는 먼저 침대 위에 떡허니 자리를 잡고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을 청하고 있다. 남편은 이미 맥주 한 캔을 비우고 희희낙락하고 있다. 난방을 최고로 올리고 낮에 나나이모에서 산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TV를 본다. 발코니 쪽으로는 작은 어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항구가 보인다. 이쪽은 유명한 백사장 쪽은 아니고 반대편의 작은 만이지만 조용하고 예쁜 항구다. 방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든다. 오기 전에는 인터넷으로 호화로운 숙소를 많이 검색했었는데 정작 가서 보니 그렇게 비싼 돈을 지불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에 좀더 저렴한 숙소를 잡고 차라리 맛있는 거나 많이 먹자는 의견을 보게 된 것이다. (잘 생각했지!)
조금 있다 잠들었지만 잠자리가 낯설어 새벽에 깼다. 정보지 나부랭이들을 읽으면서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 또 잘 생각으로 decaf를 마셨는데 마시고 나니 속이 넘 쓰려서 또 우유를 한잔 마셔야 했다. 방안에 커피메이커랑 냉장고 등 필요한 건 다 갖추어져 있어서 편리하다. 한 두어 시간을 뒤척이다가 다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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