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야. 많이 힘든가 보구나.
그래도 이 녀석아. 난 깜짝 놀랐다. 난 정말 네가 많이 아프거나 한 건 아닌지 걱정했잖냐. 그렇다고, 뭐, 네 현 상황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사실 이런 얘기는, 만나서 하거나 전화통화로 하기보다는 애초에 이렇게 글로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상황이 어떻게되었든… 반갑다. 정말.
무슨 일을 하든, 어디서 살든지 간에, 우리 나이 때에 최우선적으로 챙겨야 하는 건 건강인 듯싶다. 정말 하루 하루가 달라. 어쩌면 네가 작년까지는 버텼는데 올해 많이 힘든 건 나이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한 건가? 어쨌건, 이제 우리 나이에 운동은 몸짱이 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생명유지를 위한 필수가 되어버렸다. 나보다 술 많이 마시고 담배 피우고 과로하는 넌 두세 배로 더 많이 운동해야겠지. 한국에서 회사 생활하는 사람들한테 술 끊고 담배 끊으라는 얘기는 하나마나 한 얘기일 테니,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투자 해서 운동하자고. 종합비타민만 계속 입에 털어 넣지 말고.. 뛰고, 런지, 푸시업, 스쾃 하자.. 정 안되면 주말에 사람들 만날 때 만이라도 꼭 산 꼭대기에서 만나든지.
사실.. 얼마 전부터, 너랑 만날 때마다, 통화할 때마다.. 너무 바빠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래도 회사를 옮긴 후부터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긴 했는데…… 근데 너,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하는 거 아니냐? 내 짧은 한국 회사 경험만 봐도, 사무실에 있으면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한 두 명이고, 대부분 시간만 대충 때우고, 설렁설렁, 사우나 갔다 오고, 아침 반나절에 다 할 수 있는 일을 띵가띵가 놀다가 저녁 먹고 와서 야근한답시고 시작 하는 인간들 많았거든. 그런 사람들은 일찌감치 진급을 포기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지만… 포기하면… 편하긴 할 거야.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암은 안 걸릴걸?
좀 쉬엄쉬엄 하고 살아. 내가 보기엔 국민학교 때부터 우등생이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 잔소리 듣거나 꾸중 듣는 걸 못 견딘다는 거지. 내가 알아서 어련히 잘 할 텐데… 왜 저렇게 나를 들들 볶나 싶고 말이야. 그게, 처음 일을 배우고 익히는 시간 동안에는 하나같이 재미있고 잔소리도 다 주옥 같은 배움인데, 나중에 몇 년간 같은 잔소리를 듣다 보면… 아.. 저 사람은 정말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구나.. 싶은 거지. 그리고, 그걸 또 듣기가 싫어서 어떻게든 완벽하게 해보려는데.. 그게 또 함정 이야. 그럼, 그때부터 몸이 망가지는 거야. 그냥 진급 포기하고.. 설렁설렁하고 살아. 이제 우등생 소리 안 들어도 된다고.
너한테서 이민 얘기를 듣는 건 두 번째인 듯싶다. 처음에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였지. 그때 내가 딱 잘라 서 말하지 않았나? 이민생활 만만치 않다고. 가지고 있는 거 모든 걸 버리고 맨땅에서 몸 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근데 여기에 언어까지 안되면 맨땅은커녕 걸음마부터 시작해야 하거든. 근데 사실 3년 정도 맨땅에 헤딩하면 생존 영어는 그냥 저냥 터득해. 물론 남한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습득해야 하는 거지만… 마치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배우게 된 개구리 헤엄 같은 영어를 하게 되는 거지.
가장 중요한 건 이민 오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해. 정말 모든 걸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지.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한국 생활을 그리면서 돌아가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정말로 부모와 친지를 등지고, 자신이 40년 넘게 적응해왔던 모든 걸 버리고 리셋 (Reset) 할 수 있는지.. 그런 각오가 가장 중요한 거 같아. 나야.. 어릴 적부터 새로운 출발점에 다시 서고 싶은 생각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영화 했다가, 다큐 했다가, 애니메이션 했다가, 지방 소도시에도 갔다가, 그렇게 매일매일이 리셋이었지만…… 넌 어때? 자신 인생을 리셋 할 각오가 되어 있나? 가지고 있는 모든 지위, 재산, 인간관계를 청산하고 새로 시작할 자신이 있는지?
여기 이민자들 대상의 정착 프로그램 등에서 강의를 듣게 되면, 이민자들은 보통 5단계를 거친다고 하는데;
1단계는 캐나다의 모든 것이 환상적으로 보이는 단계. 이미 모국에서부터 눈이 뒤집힌 상태에서 온 거라서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거지. 이게 한 1년 정도 가고
2단계는 처음으로 현실과 부딪히는 단계. 이제 막 주변의 도움 없이 하나하나 스스로 해보는 단계인데.. 생각만큼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거지. 이게 보통 2년 차
3단계는 현실에 적응하는 단계. 보통 서바이벌 잡으로 첫 직장을 갖거나 해서 처음 월급봉투를 받고.. 캐나다 사회에 하나하나 적응하는 단계. 한창 자신감이 붙을 때이지. 보통 사람들이 “음.. 이제.. 자리 잡은 것 같아..라고 생각할 때가 바로 이때라고 봐. 2-3년 차
4단계는 현실의 벽에 좌절하는 단계. 자신의 언어능력 한계.. 또는 인맥이 없는 것에 한계를 느껴서 가장 크게 좌절하는 단계야. 보통 2년 차에서 4년 차에 겪게 되는데, 이때부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게 되니까 진정한 이민생활이 시작되는 셈이지. 언제 올진 모르지만, 누구나 다 겪게 되는 단계. 이 시기를 빨리 겪게 되면 될수록 나중에 빨리 정착하는 거야
5단계는 비로소 현실과 마주하면서 사회에 정착하는 단계. 4단계에서 좌절을 겪은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고, 그때부터 자신의 미래를 그리게 되는 단계이지. 이제 여유도 생기고, 캐나다 사회에 친구들도 생기고, 진정으로 캐나다 생활을 즐기는 단계가 되는 거야.
얼마나 걸리게 될지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지만, 공통적인 건 4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5단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거다.
그리고, 어느 나라에 가서 정착을 하든, 가져간 돈 가지고 사업하면서 쉽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쩌면 그 사업이 6-7년간 번창할 수도 있겠지만, 사업이란 건 흐름이 워낙 들쑥날쑥 해서 재미와 승부욕 때문에 하는 거지, 편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리고, 어디든 정착을 하려면 최소한 3년 정도는 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봐. 그 나라 사람들이 돈을 쓰는 곳에서 몸을 써가면서 일을 하면서 말이야. 다르게 생각하면, 돈을 벌면서 그 사회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
예전 직장에서 어떤 한국 분을 만났었는데, 한국에서 대기업 전자회사 해외영업부에 근무했었다나봐. 그래서 영어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더라구. 뭐 사실 마트 매장에서 TV 팔 정도의 영어는 되는 것 같았고. 아무튼.. 자식 교육을 빙자해서 이민을 오긴 했는데, 그래서 큰 집도 사고 (그때만 해도 여기 집 값이 한국에 비해 좋았을 거야), 넓은 땅에서 정말 할 게 많아 보였는데, 당장 먹고 사는 일로 뛰어들려니 이곳이 상당히 배타적인 사회라는 걸 나중에 아셨더라구. 그래도 이 분의 경우 오래 지체 하지 않고 곧바로 취직을 했던 거지.
근데 시간당 9불, 10불 받으면서 (2011년 기준 최저 시급) 살기가 너무 힘든 거야. 네 식구 살림에, 아무리 집 모기지를 안 낸다고 해도 두 아이가 고등학교 다니면 이것저것 할 일이 많거든. 아무리 긴축하고 살아도 최소 월 5000불은 생활비로 나갈 텐데 (2011년 당시 물가 기준), 우리 회사에서 시간당 9불, 10불 받으면서 일하면 (그리고 세금 떼면) 아무리 주 40시간 풀로 일해도 월 1500불 안쪽이야.
그 때 얘기하기로는 한 달에 3000불에서 4000불씩 저축에서 빼서 쓰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럼 이런 경우, 예를 들어 이 집 두 부부가 둘 다 직업을 갖고 (당시 부인은 학교를 다니고 있던 중)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만큼 벌 때까지 4년 걸린다고 하면, 최소 15만 불은 예비로 통장에 있어야지 버텨나갈 수 있다는 말이 되지. 근데.. 현실적으로, 당시에 애들 학교 보내고 하면 최소 월 7천 불은 들었어. 그야말로 생존이 아닌 어느 정도 생활, 그러니까 외식도 하고 극장에도 가고, 주변으로 캠핑이나 그런 여행도 가고 그런 생활을 하려면 30만 불은 예금에 있어야 4년을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 되는 거지.
그런데 이 분이, 우리 회사의 쥐꼬리 만한 월급에 견딜 수가 없어서 한국으로 다시 갔었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기러기 생활을 잠깐 했던 거지. 물론 예전에 다니던 대기업으로 다시 돌아가진 못하고, 전자제품 양판점에 자리를 하나 얻어서 들어갔나 봐. 밖에서 보기에는 양판점이 구매자고 예전에 다니던 대기업 전자회사가 제조사지만, 사실, 한국에서 위치는 대기업 제조사가 슈퍼갑이니까. 양판점 입장에서는 대기업 인맥을 살려서 좋은 물건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나 보지.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하는 일이 매일 옛날 회사 동료들 만나고 새벽까지 술 마시고, 그리고 기러기니까 누가 끼니를 챙겨주지도 않고… 그러다가 몸이 정말 망가져서 결국 밴쿠버로 다시 돌아왔대. 그렇게 다시 우리 회사에서 처음부터 9불 10불 받으면서 일하게 되었던 거야.
한국에서 물론 돈을 더 벌었지만, 그 보다 병원비로 더 나갔대. 그리고 적게 벌고 적게 써도 밴쿠버가 살기 좋다고 하더라고. 그야 통장에 3억 정도 있으면 그렇게 여유로운 말도 나오겠지만, 그게 없다면, 당장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하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야. 대리운전 일 같은 건 없지만, 심야에 건물 청소하는 일이나 음식 배달 하는 일은 여기도 많거든.
이렇게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 중에는, 한창 조기유학 붐이 불 때 유학생 가족들 대상으로 사업이 번창했던 분들도 있어. 안타깝게도 초기 정착기간 5년 10년을 당장 한인 상대 비즈니스로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현지 사회에 들어가 적응할 수 있는 연습이 안되어있었던 거야. 영어도 안 되는 거고.
뭐.. 내가 소위 성공한 이민생활을 즐기는 건 아니지만 나름 운은 좋았다고 생각해. 그 말도 안 되는 회사를 10년 동안 다니면서 여러 가지 병도 걸려 봤지만 그래도 마누라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나름 그 회사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거기서 일했던 거? 뭐 마트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만큼만 힘들었지 뭐. 그래도 인간적인 업신여김을 당하는 게 한국보다는 덜한 편이었고, 또 나는 고장수리를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나마 좀 존중을 받고 일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맨날 자기 컴퓨터부터 당장 고쳐내라고 생떼 부리는 인간들, 말도 안 되는 서류 작업만 더 늘리는 회사, 같이 일하는 동료들 시간은 점점 줄고… 그런 걸 볼 때면 스트레스를 엄청 받긴 했었어. 2010년에 한국 갔을 때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얼굴에 편측 마비가 왔었지. 그래서 잠시 도피 삼아 휴가로 한국에 갔었던 거야.
뭐.. 그래 봤자, 네가 받는 스트레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걸 잘 안다. 나는 거기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했다 해도 주 40시간 이상 안 했고, 하루 8시간 이상 안 했으니까. 그리고 힘들면 언제든지 휴가를 갈 수 있었고. 뭐.. 이런 점을 최소한 인간이 누릴 권리라고 생각하고 그 외에 모든 걸 다 포기할 각오를 하고 있다면, 네가 이민 오는 걸 적극 지지하겠다.
네가 진정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결정했다면, 아예 이 기회에 세계여행을 해보기를 권한다. 물론 애 둘 데리고 다니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네가 살아보고 싶은 나라 만이라도 다니면서 좀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아마 20여년간의 직장생활을 접고 여유를 즐겨보는 것도 인생에 다시 없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그리고 또, 유학을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이들이 유학을 와도 되고, 너희 부부 중 한 명이 유학을 선택하면 더 좋고.. 그럴 경우, 차후에 혹시 이민을 선택하게 되면 현지 직장을 구하는데 더 쉬워질 테니까. 아내에게 먼저 공부하는 걸 권유하는 게 제일 좋을지도. 여긴 학교에 탁아소 같은 것도 싸게 지원되니까. 그 동안은 네가 보호자로 일할 수도 있고 말이지 (물론 주로 몸 쓰는 일이겠지만).
지금 당장 이민을 신청하더라도 최소 3년은 걸린다고 들었다. 그러니.. 올지 말지는 영주권을 받고 나서 고민을 해도 사실 늦지는 않아. 그리고 지금 결정이 단지 충동 적인 거라고 하더라도 3년 정도면 그 결정을 고민해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된다는 거지. 비용도 그렇게 많이 들지 않을 거야. 본인이 직접 수속하면 아마도 200만 원 정도면 될 거고, 최근 온라인에서 적은 수수료로 수속 대행을 해주고 있는 회사도 많은데.. 그들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300만 원 정도. 그러니까 일단 시작하도록 해.
사실 네가 캐나다로 오겠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십 몇 년 먼저 왔다고 잔소리하는 거 정도겠지. 반대로 다른 어떤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걸 비난할 능력도, 자격도 없다는 걸 잘 안다. 맨 처음에 얘기했듯이, 일단은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게 최고라고 생각해. 그리고, 예전 10대 20대 때처럼, 뭉쳐서 다니는 건 이제 어렵다고 하더라도, 가끔은 서로 지루한 얼굴로 만나서 바보짓도 하고.. 또 그걸 보고 서로 “미친 새끼 ᄏᄏᄏᄏ”하며 낄낄거리고.. 그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건강하자. 친구야.
2022년 밴쿠버에서 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