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가요

가끔 일본 만화나 영화를 보다 보면 ‘어른스러움’에 대해서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벌컥벌컥 하지 않고, 오기나 자존심은 부리지 않고, 개인의 굴욕 같은 건 참아 넘기고, 점잖게,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일’처리를 하는 걸 말하는 것 같더라구요. 굳이 갖다 붙이자면 요즘 말하는 ‘자본주의 미소’도 그 일종이라고 봐야 하나요? 따지고 보자면, 성장한 사람으로서 지 밥벌이를 하기 위해선 굴욕 정도는 당연히 감수하고 자기감정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표현일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어른스럽다’라는 표현을 이런 상황에서 종종 써왔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전 무척 싫어했었지만요 (하지만 몇 년 후 캐나다 땅에 와서 고객 서비스 업종에서 10년 넘게 일하게 됩니다 ㅠㅠ).

단순히 싫어한다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악’ 정도로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저런 ‘어른스러움’들이 개인의 소신이나 행복을 뒷전에 두는 행태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를 만들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일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적절한 절충이나 타협 같은 것도 있을 수 없었어요. 내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거나 내 말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본래 기획에서 벗어나 절충으로 끝날 일이라면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뭐 하나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중간에 엎어버리는 일이 허다하기는 했습니다.

지금은 뭐… 남의 돈으로 내 창작욕을 채우는 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다시 말해 창작일을 밥벌이로 할 생각은 애당초 접었기 때문에, ‘혹시 이게 내가 지금 시장논리에 타협하고 있는 건가?’ 하는 걱정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시장논리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구요. “내가, 마, 맘만 먹으면, 마, 다찌마리 넣고, 마, 베드씬 넣고, 마, 상업적 흥행 같은 건 좆도 아냐!” 이렇게 외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상업적으로 인기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는 알고도 남죠. 단지, 예전에는 오히려, 스스로 시장논리에 먹혀버릴까봐 더 걍팍하게 굴었던 거고, 지금은 아예 부담 없이 글을 쓴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런 건 있어요. 아무리 종이로 인쇄될 작품을 쓰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이렇게 비트, 바이트로 구성된 디지털 데이터로 남기는 것만 해도 사실 엄청난 자원 낭비인데… 그냥 자기만족을 위한 글을 쓰면서, 굳이 한국 굴지의 대형 포털 서비스에서 공짜로 제공하는 인터넷 공간을 점유해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 말이에요. ‘예술의 사회적 기능’, ‘지사적 글쓰기’ 뭐 그 딴 건 죄다 차치하고라도 말이에요. 내 일기장에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쓰는 거라면, 글을 읽어줄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같은 게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거죠. 글이 유익하고 말고를 떠나, 진실하고 말고를 떠나, 재미있고 말고를 떠나서, 최소한의 ‘가독성’이라는 건, 공개된 공간에 자기 글을 끄적이는 사람이 기초적으로 갖추어야 할 ‘예의’ 같은 거 아닌가 말이죠. 때문에 문단 나누기라든지, 글꼴 모양이라든지, 모바일 환경에서는 글꼴이 구별되지 않아서 색깔로 변화를 준다든지… 하면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편입니다.  

그리고 이런 낯간지러운 생각과 동시에, (남 얘길 들을 생각은 안 하면서) 내 얘길 좀 더 떠들고, 많은 인기를 얻고 싶다는 관종 본연의 자세 역시 잃지 있습니다. 가끔, 농담처럼, 다음 메인에라도 툭 걸리는 날이면, 오우~ 유입수가 장난 아니게 늘거든요. 어떤 캠핑 글은 무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조회수가 14,000이 넘기도 했었어요 (한국 국내 캠핑 정보라고 오해하시고 클릭하신 분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이후, 이게 팔로우어 숫자로 바로 연결되지 않는 걸 보고 제 필력의 한계를 더 목도하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1분이 멀다 하고, 조회수가 100, 200… 5000, 10000, 이렇게 뛰고 있다는 알림을 뜰 때는 왠지 흥행에 성공한 감독 심정이 되기도 했거든요.

그렇다면, 이후부터 더 인기를 얻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을 하느냐… 또 그건 아니란 말이죠. ‘작가적 양심’, ‘상업성과 거리두기’.. 뭐 이런 거룩한 동기가 아니라, 무조건, 절대로, 전적으로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고고한 선비의 자세를 가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단지 게을러서 그렇다는 거죠.

사실… 다 알잖아요. 예전보다 창작 환경이 엄청나게 편해졌다는 거. 훨씬 훨씬 더 자유롭고, 고품질의 작품 창작이 더 쉬워졌다는 거. VHS Tape으로 단편영화를 찍고 나서, 원본 화질을 안 떨어뜨리기 위해 편집 과정을 얼마나 더 간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는 때가 더 이상 아니라는 거. ‘브런치’와 ‘유튜브’라는 플랫폼이 국경을 넘어 인터넷이 연결된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는 거. 내가, 지금, 이 순간, 공개된 공간에 쓰는 글이 정치적 검열을 당할까봐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창작자로서 해야 하는 고민이라는 게, 단지 ‘어떻게 내 생각을, 내 느낌을 더 아름답고 재미있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 뿐이라는 거.


구린내 나지만, 하는 김에 옛날 얘길 좀 더 하자면… 왜 ‘건전가요’라는 거 기억하시나요?

당시 시장에서 팔기 위해 만든 모든 가요 음반, 앨범들은 ‘공륜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거쳐야 했는데, 이때 심의 대상 중 하나가 ‘건전가요’의 수록 여부였습니다. 다시 말해 음반에 ‘미풍양속을 저해하지 않고 건전한 문화를 추구하는 노래’가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했다는 거죠.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더 웃긴 얘길 하자면 당시 팝송 음반에는 금지곡도 많았거든요. ‘비틀즈’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Revolution 1>과 <Revolution 9>은 앨범 재킷이나 라벨에는 기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EMI에서 출시한 음반에서는 빠졌더랬어요. ’68 혁명 세대의 현실에 대해 심각한 회의와 좌절을 드러낸 내용이었음에도, 단지 제목이 ‘혁명’이라는 이유 만으로 들어보지도 않고 심의에서 탈락시킨 거죠.

‘건전가요’를 강제적으로 작가의 창작물에 넣어야 한다는 사실도 매우 폭력적이었지만, 사실 작가들도… 그냥 무기력하게,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던 것 같아서 안타까왔습니다. 여러 가지 ‘건전가요’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못마땅했던 건 <시장에 가면>이라고 하는 건전한 상거래를 권장하는 노래였는데,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너어무나 리듬이나 멜로디가 방정맞았거든요. ‘이선희’며, ‘산울림 (김창완)’, ‘송창식’ 등 당대 대중음악계를 흔들던 최고 가수들이 소속되어있던 <서울음반>에서 발매한 대다수 음반들의 경우 그 노래를 수록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주 슬픈 발라드를 듣고 있다가 난데없이 방정맞은 <시장에 가면>이 튀어나오면… 정말 확 깼죠. 저만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이 아닌지, 제가 알바로 맥주 서빙을 하던 까페 사장님은 가게 스피커에서 ‘건전가요’만 나오면 홀이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외치시곤 했습니다. “O군아!! 판 돌려라!!”라고요.

가끔 어떤 음반에서는 가수가 직접 <어허야 둥기둥기>를 불러서 수록하기도 했지만, 대개 그냥 기존에 녹음된 ‘건전가요’ 곡들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려는 욕심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심의 완화를 주장했었고, 군사 독재의 잔재가 문화를 압살하려 한다고 믿고는 있었지만, 그걸 뭐 바꾸려고 싸운다던가, 막상 그 틀 안에서도 어떻게든 완벽성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거죠. 누가 자신의 음악성을 의심한다면? 정부의 후진 문화정책 탓을 해버리면 되니까 말이죠. 하지만 ‘들국화’ 음반은 달랐습니다.

‘들국화’의 ‘건전가요’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우리의 소원>이었어요. 그것도 자신의 앨범 수록곡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화음으로 멋지게 불러냈었죠. 전혀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특히 1986년에 출시된 첫 번째 라이브 앨범에서는, 라이브 현장에서 <우리의 소원>을 멋지게 불러내고, 이를 또 후속곡 <Come Sail Away>와 완벽하게 연결해내어서, 도무지 이질감을 느낄 수가 없었거든요. 다시 말하자면 ‘들국화’ 앨범에는 그 ‘건전가요’라는 게 없었던 거죠. 마치 그들이 <행진>과 <그것만이 내세상>을 부르듯이, <우리의 소원>이 앨범 마지막에 불렸던 거예요.

이외에도 ‘들국화’가 당시에 획기적이고 선구적이었던 부분은 많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쉽게 찾기 힘들었던 노랫말 내용부터, 앨범 재킷에 ‘도와주신 분들..’해서 땡큐 크레디트를 남기는 데에서도, ‘~님’이라는 말투를 처음 사용했었죠. 그 후 ’님’이라는 존칭형 접미사는 피씨통신과 인터넷 문화 관용어를 지나 이제는 일상에서도 쉽게 쓰이고 있구요. 하지만, 40년이 다 되도록 들국화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부분은 역시 ‘건전가요’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저는 정말, 무슨 일을 하든, 그렇게 핑곗거리를 찾는데 너무 시간을 낭비했던 것 같단 말이죠. 대기업 계열 영화사 기획실에 근무할 때에도, 지방 도시 공무원 노릇을 할 때에도, 항상 중간에 도망갔었던 일이 많았거든요.

불합리한 절충 과정과 타협 과정에 지친다라거나, 경직된 공직사회 마인드를 깨낼 수가 없다는 이유를 늘어놓기는 했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냥 제가 게을러서, 가장 꼴불견 형태로 마무리를 짓고 말았어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만의 최고 결과물을 찾아낼 노력도 안 하고, 그렇다고 아예 피 터지게 싸우다가 쫓겨난 것도 아니고 말이죠. 애초에 그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걸 모르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고,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주어진 울타리 내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한계에 대처했다면, 저도 ‘들국화’의 <우리의 소원> 같은 ‘건전가요’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박찬욱’ 감독이 <스토커>를 찍을 때였나? 암튼, 하루는 뉴욕의 편집실에서 후반 작업을 하고 있는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만났다고 합니다. 너무 반가워서 악수하고, 얼싸안고, 팬이라고 하면서 사인 받고 뭐 그랬겠죠. 그러면서 물어봤대요. 당신처럼 오랫동안 영화를 찍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그랬더니 스콜세지 영감님의 첫마디가 그거였답니다. “자꾸 불평하는 습관을 버려라.”

왜 아니겠어요.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이라고 하더라도, 사실 자기 마음대로 다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언젠가 ‘뉴욕타임스‘에서 조사했었던가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결정을 한순간에 내려야 하는 직업이 ‘미국 대통령’ 다음으로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이라고 하던데, 60년 넘게 현역 영화감독으로 일하면서 얼마나 많은 스튜디오의 간섭과, 스타 배우들의 땡깡과, 로케이션에서의 돌발상황을 겪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마다 불평하고 핑곗거리 만들고 그랬다면 달랑 2년도 못 버텼겠죠. 60년 동안 수많은 ‘건전가요’를 맞닥드릴 때마다 수많은 <우리의 소원>을 만들어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그래서, 이제 일본 만화에서의 어른스러움을 싫어하지 않으려고요. 지킬 자존심 다 지키고 고고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 보니 뭐 하나 제대로 만들어낸 게 없네요. 히키고모리 파트타임 창작자인데, 그냥 정신승리만 넘치게 하고, 정작 제대로 된 평가 하나 받아본 적이 없어요. 앞으로도 건전가요 같은 상황이 끈덕지게 넘쳐날 텐데 말이죠. 게으르게 핑계만 대면서 탈출구 먼저 찾기에는, 이젠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그래서 기본으로 돌아가렵니다. 쓰고 싶으니까 쓰고, 읽어주길 바라니까 쓴다는 기본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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